1. 개요
買血/賣血, selling blood혈액을 매매하는 행위. 전자(買血)는 수혈받기 위해 피를 산다는 뜻이고, 후자(賣血)는 자기 몸의 피를 뽑아 판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매혈이라고 하면 후자를 말한다.
2. 한국의 매혈
2.1. 법규
혈액관리법 제3조(혈액 매매행위 등의 금지) ① 누구든지 금전, 재산상의 이익 또는 그 밖의 대가적 급부(給付)를 받거나 받기로 하고 자신의 혈액(제14조에 따른 헌혈증서를 포함한다)을 제공하거나 제공할 것을 약속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누구든지 금전, 재산상의 이익 또는 그 밖의 대가적 급부를 주거나 주기로 하고 다른 사람의 혈액(제14조에 따른 헌혈증서를 포함한다)을 제공받거나 제공받을 것을 약속하여서는 아니 된다. ③ 누구든지 제1항 및 제2항에 위반되는 행위를 교사(敎唆)·방조 또는 알선하여서는 아니 된다. ④ 누구든지 제1항 및 제2항에 위반되는 행위가 있음을 알았을 때에는 그 행위와 관련되는 혈액을 채혈하거나 수혈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18조(벌칙)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_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_에 처한다. 1. 제3조를 위반하여 혈액 매매행위 등을 한 자 |
2.2. 역사
미국의 헌혈 제도를 모델로 도입된 헌혈은 도입 초기에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1950년대 이래로 헌혈에 대한 인식이 미약했기 때문에 주로 매혈로 혈액을 충당했으며 당시에 헌혈을 하면 받을 수 있는 금액이 끼니 몇 번을 때우고도 남는 돈이었던지라 유용한 급전이나 용돈, 학비 마련 수단이 되어 왔다. 그런데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고 매혈 자체가 돈이 되다 보니 깡패나 부랑자들이 먼저 피를 뽑겠다며 행패를 부리거나 매혈자에게 삥을 뜯는 소란이 일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헌혈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생겨나게 된 것은 4.19 혁명때로 부상자들의 피를 제때제때 수혈해 준 것이 시초였다. 그러나 경제사정이 하루 아침에 달라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후에도 생계형 매혈이 성행했다가 1964년 라이샤워 사건을 계기로 관주도의 매혈 제도 개혁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매큔-라이샤워 표기법으로 동아시아에 알려진 에드윈 라이샤워는 1964년 주일 미국 대사로 재직하던 중 19세였던 일본인 조현병 환자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게 되었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된 라이샤워 대사는 수혈을 받게 되었는데 직후 "이제 제 몸에도 일본인의 피가 흐르게 되었습니다."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문제가 발생했는데 수혈받은 피 중에 간염 환자의 피가 있어서 간염에 걸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안 그래도 대사급 외교관, 그것도 자유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대사가 자국민에 의해 습격당하는 사건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일본 정부와 여론이 발칵 뒤집어졌다.[1] 주일 미국 대사가 자국민에 의해 공격당한 것에 이어 당시 의학 수준으로는 치료가 매우 어렵던 간염에까지 수혈로 인해 걸렸다는 것이 밝혀지자 일본의 혈액 관리 체계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특히 건강 및 위생 관리가 어려운 가난한 사람들이나 부랑자들에게서 피를 사들이는 매혈로 인해 감염병에 오염된 혈액이 혈액 유통 체계에 유입되고, 이 오염된 혈액이 혈액을 제공받은 환자들을 감염시킨다는 지적이 나오자 매혈을 원천 차단하는 방향으로 법률 제정 및 관리 체계 강화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유심히 지켜보던 한국 관료들에 의해서 매혈 제도에 대한 검토가 시작되었다.
1967년 보건사회부의 초안을 기초로 1970년 혈액관리법이 제정되었다. 국가기록원에서도 이 법률의 배경 중 하나로 "직업적 매혈을 하고 있는 공혈자들의 건강문제의 심각성"을 지목하기도 할 정도로 매혈은 진지하게 고려된 문제였다.# 그러나 이 법률에는 아직 매혈 금지조항이 들어가진 않았는데 매혈비가 (당시 기준으로) 꽤 비쌌던 시절이었던지라 서민들의 유용한 급전 마련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서 매혈금지법을 통과시킨다는것은 급전을 마련할 수단 하나를 없애겠다는 말과 비슷했기 때문에 민심이반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정책은 3선 개헌을 만지작거리던 박정희에겐 그리 썩 달가운 정책이 아닐 수 밖에 없었다. 혈액값이 인상되기라도 하면 몰려드는 사람을 막기 위해 병원 문을 걸어잠그던 시절#이기도 했으니...
정부에서는 100% 무상 헌혈이 1981년에 달성됐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피 팔아서 돈을 버는 것이 연간 노동시간이 3000시간에 달했던 당시 기준에서는 편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혈액은 1990년대 말까지도 거래되었다. 1975년 고재필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은 “혈액 한 병이 위스키 한 병보다 싸서야 말이 되느냐”며 혈액 320㏄ 한 병값을 3500원에서 1만원으로 거의 세 배 인상했는데 이 가격은 90년대 초반까지 등락을 거듭하며 이어졌다. 즉, 1970년대 중후반에는 매혈을 월 10회씩 한다고 가정하면 웬만큼 자리잡은 직업인만큼 돈을 벌 수 있었고 청소부나 여공 같은 저임금직에 비해서도 돈을 훨씬 많이 벌었기 때문에[2] 몸 관리와 연줄관리(...)만 잘하면 편하게 돈을 벌 수 있던 꿀알바였다는 얘기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매혈이 급전 마련이나 비상금 마련 수단으로 나름대로 유용했던 금액이었지만 물가가 나날히 올랐기 때문에 그 가치는 점점 떨어졌고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로는 혈액 가격이 직장인들에게 푼돈 수준으로 줄어들 정도로 가치가 (상대적으로)하락하면서 매혈의 비중은 차차 떨어졌다. 헌혈을 하는 사람 가운데서 10대와 20대의 비율이 압도적이게 된 것도 이때부터의 일이다.[3] 다만 이때도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직장인 사이에서나 푼돈이 되었지 학생이나 백수, 노숙자, 저임금 노동자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직까지도 용돈벌이로 유용한 금액이었다. 아무리 물가가 올랐다고 해도 90년대 말까지도 5000원~1만원이 식당에서 한 끼 거뜬히 때울 수 있고 만화책도 몇 권 사 볼 수 있던 돈이니 마냥 작은 돈은 아니었다. 이는 당연히 언론에 의해 사회 문제로 보도되었으며 1999년 개정 혈액관리법에 매혈 금지 조항이 도입되고 나서야 완전한 매혈 금지가 정착되었다. 결국 경제 성장 덕분에 매혈의 반대급부가 상대적으로 보잘것없어진 후에야 매혈의 법적 금지가 가능해졌다.
그렇지만 매혈이 법적으로 금지된 후에도 헌혈률이 썩 높지 않다 보니 이전과 같이 대놓고 현금을 주는 방식은 아니더라도 청소년들을 상대로 편법적으로 문화상품권을 보상품으로 주는 경우가 있어 용돈이 고픈 청소년들이 문화상품권을 받기 위해 헌혈을 하는 경우가 많아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와 비교해 본다면 애교에 불과한 수준이고 21세기의 헌혈은 부족함이 문제라면 문제이지 매혈은 이미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3. 매혈 제도 부활 가능성
WHO를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들의 노력 끝에 현재는 헌혈 제도만을 시행하는 국가가 가족헌혈 또는 매혈 제도를 인정하는 국가보다 수가 많아졌다.[4] 더 나아가 국제기구들은 가까운 미래에는 모든 국가에서 헌혈만으로 100%의 혈액을 수급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정하고 매혈제도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대세를 거스르면서까지 매혈 제도가 한국에서 부활할 가능성은 그리 크진 않다.그러나 민감한 주제이긴 하지만 한국을 포함해 여러 나라에서 매혈 제도의 부활에 대한 여론이 생기기도 한다.[5] 혈액의 완전 헌혈 수급이 수십년 동안 지속되면서 매혈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혈액을 제공하는 사람에게도 정당한 가치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6] 수십년 전에는 동네 각 의원에서 중구난방으로 이루어지는 매혈이 위생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큰 문제였지만 선진화되고 중앙화된 현 의료시스템에서는 매혈로 수급되는 혈액도 체계적이고 명확하게 관리가 가능하며 혈액 제공자의 건강상태를 미리 확실히 체크할 수 있기 때문에 예전의 상황을 대입하기 어려운 지금은 매혈을 통한 혈액수급으로도 충분히 안전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헌혈로 수급되는 혈액의 70%에 가까운 양이 학생[7]과 군인[8]들에게서 뽑아낸 혈액이라는 점은 과연 순수한 봉사와 기부의 의미로 혈액이 수급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9] 거기에 더해 인구절벽 현상으로 젊은이들의 수가 가파르게 줄어들면서 학생 수가 적어지고, 전방에 말라리아가 퍼지면서 군인들에게 헌혈을 받기도 어려워진[10] 암울한 상황에 처해 있다. 수술 등 혈액제제가 간절하게 필요해지는 고령자의 인구비중은 계속해서 늘어만 가는 상황에서 헌혈만을 통한 혈액수급에는 분명한 한계가 오는 때가 올 것이 불보듯 뻔하기 때문에 더욱 매혈을 통한 절대적인 혈액수급량 증가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수혈에 필요한 혈액은 헌혈을 통해 자급하고 있으나 의약품 제조에 필요한 혈장은 일정 부분을 해외에서 수입하고 있다.
헌혈 자체도 엄밀히 말하면 공짜로 기부받는 혈액이 아니다. 헌혈자들의 순수히 자발적인 기부에만 의존하면 혈액 수급량이 바닥을 칠 것은 뻔하고, 혈액제공자를 강제로 끌어올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헌혈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사용되는 비용에도 만만치 않은 세금이 들어간다. 헌혈 시 지급되는 기념품을 포함해 유명 연예인을 활용하는 마케팅, 좋은 입지에 있으므로 드는 헌혈센터의 비싼 임대료 등 매년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지만 이 돈이 매혈처럼 직접적으로 혈액 제공자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경제적 효율은 극히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상기된 것처럼 한국은 학생들과 군인들의 피로 현 헌혈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순수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헌혈도 분명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 헌혈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세금이 돌고 도는 과정에서 소비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니 '그럴 바에야 돈을 달라'는 소리가 안 나오는 게 이상한 형편이다.
결론적으로 혈액수급의 방법에서 헌혈만이 유일한 상황에서는 필연적으로 비효율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으며 혈액은 그 특수성[11] 때문에 더욱 효율의 필요성이 부각되는 품목이다.[12]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세금을 내는 납세자들과 혈액제제가 절실한 환자들이 돌려받고 있기 때문에 매혈의 부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2.4. 매혈 제도의 부작용
헌혈을 통해 공급받은 혈액은 매혈에 비해 굉장히 저렴한 가격으로 채집할 수 있어 최종적으로 환자의 금전적 부담이 크게 줄어든다. 그러나 매혈은 혈액공급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혈액제제 가격의 상승은 피할 수 없는 문제다.[13] 현재 한국의 혈액제제 가격은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저렴한 편에 속해서 환자의 부담이 거의 없다시피한 나라인데[14] 매혈 제도가 부활한다면 이 가격을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백혈병을 위시한 지속적인 수혈이 필요한 환자들이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과거에는 과도하게 매혈을 하다가 몸이 축나거나 심하면 사망한 사람도 간혹 있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이전에는 매혈비가 당시 소득 기준으로 비싸서 비교적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점 때문에 3일에 1번씩만 피를 뽑을 수 있다는 규정[15]을 어기고 하루에 몇 차례씩 피를 뽑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매혈 그 자체의 문제는 아니고 피를 뽑은 후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아 발생한 문제이긴 하지만 1978년에는 한 30대 청년이 매혈을 통해 번 돈으로 그 날 저녁 포장마차에서 술을 사마셨다가 그대로 즉사하는 사건도 있었다. 적십자사에서도 안내해 주는 사항이지만 채혈한 날은 금주다.[16] 헌혈 전후로 헌혈자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채취하는 혈액량까지 제한하는 현대의 헌혈 제도 하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 일이다.
매혈이 중구난방으로 이루어져 위생에 신경쓰지 않는다면 에이즈 같은 같은 혈액을 매개로 전염되는 전염병이 발생할 수 있다. 한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병원체계가 제대로 잡혀있어 1회용 채혈도구가 법적으로 의무화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할 일은 적지만 피를 구매하는 쪽이 시간과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서 채혈도구를 1회용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큰 문제가 된다.[17][18]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리처드 티트머스 (Richard Titmuss)의 주장을 인용하여 미국에서는 혈액은행으로 인해 헌혈[19]량이 급감했다는 주장과 그것이 틀렸다는 반박을 실은 바 있다.
3. 해외의 경우
미국에서는 매주 2회 혈장 헌혈을 하면 한 달에 약 400~500달러[20]를 받는다고 한다. |
미국은 적십자사뿐만 아니라 여러 기관/업체가 헌혈을 주관하는데 아직 매혈을 인정하고 있어서 판사가 벌금을 못 내면 매혈을 하라는 판결을 내려 가끔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한다.# 헌혈카드라는 포인트카드를 만들어 주고 헌혈을 할 때마다 거기에 포인트를 지급해 주는데 일반 카드처럼 대부분의 상점에서 물건을 사는 데 사용할 수 있다. 대체로 회당 30달러씩 받을 수 있으며 매주 2회씩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미국 직장인들 입장에서야 푼돈이지만 빈민층이나 학생들에게는 꽤나 짭짤한 부수입원이다. 그러나 헌혈자들에 대한 모니터링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마약 중독자같은 사람들도 피를 뽑아 쓰다 보니 한창 에이즈가 성행했을 때 미국인들의 피가 캐나다로 수출되었다가 3만명 가량이 간염이나 에이즈에 걸리는 흑역사가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매혈은 대부분 제약 회사나 그 산하 기관이 의약품 제조에 필요한 혈장을 직접 구매하는 것이며 정작 수혈에 필요한 전혈/혈소판은 해당하지 않는다. 즉, 1회당 30불씩 주는 혈장 헌혈이 특수한 사례이고 미국에서 헌혈을 한다고 해서 모두 돈을 주는 것이 아니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미국 적십자사를 비롯한 다른 헌혈 기관은 헌혈 회수에 따라 포인트나 기념품 형태의 리워드를 주며 포인트를 모아 기프트 카드로 교환할 수 있는 정도의 보상은 있지만 매혈이라고 부를 정도로 파격적인 혜택은 아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법적으로 매혈이 금지되어 있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헌혈 시 기념품이나 현금처럼 쓸 수 있는 포인트를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보상이 나라마다 편차가 심하기 때문에 사실상 매혈이라고 봐야 할 정도로 보상이 큰 국가들도 존재한다. 개도국에서는 아직도 합법 또는 암암리에 성행한다고 하며 중국에서는 대략 1990년대 중반까지는 돈벌이용 매혈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었기 때문에 성행했다. 1980년대 이전의 남한과는 큰 차이가 없지만 중앙정부에서 서방 기업들에게 피를 파는 것을 용인하고 허난성 같은 일부 지방에서 해당 지방정부에 의해서 돈벌이용 매혈이 권장되었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었다. 지방정부 입장에서는 수수료 및 혈액원에서 받는 세금으로 세수를 확충하고 주민들은 조금의 아픔만 감수하면 쉽게 돈을 벌 수 있었으니 윈윈이었던 셈이었다. 에이즈 수혈 사건이 터지기 직전인 1990년대 중반 기준으로는 매혈을 1번 하면 50위안의 돈을 지급받았는데 1995년 기준으로 중국의 평균 임금이 5500위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제법 큰 돈이었으므로 급전 마련용이나 용돈벌이용으로 매혈이 성행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돈벌이에 치중한 나머지 혈액원에 대한 감사가 대충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했고 채혈비용 절감을 위해 주사바늘을 돌려쓰는 등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매혈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결국 수십만명이 에이즈에 감염된 혈액을 수혈받는 사건이 터졌다. 이러한 대형참사가 터지자 정부는 1996년에 매혈을 금지하고 혈액원 대다수를 폐쇄했지만[21] 그럼에도 매혈로 얻는 수익이 당대 중국 소득 기준으로 적지 않았다 보니 2000년대 후반까지도 매혈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북한에서는 현금은 아니라도 쓸만한 물자를 주기 때문에 1980년대 중반 이전의 남한처럼 서민층들의 용돈벌이 수단 가운데 하나다.
4. 창작물에서의 매혈
신체 일부를 팔아 입에 풀칠한다는 어려운 상황 중에서 직접적인 장기매매보다는 그나마 위험성[22]이 적기 때문에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등장인물의 궁핍한 생활상의 요소로 등장하기도 한다. 조정권의 시 '매혈자들'이 이를 잘 묘사하고 있다.그들은 제각기 얼어붙은 몸으로 찾아와 병원 침대에서
한 삼십 분 정도 누워 있다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선지국 집으로 몰려왔다
사골뼈 대신 공업용 쇼팅 기름을 쓴
이백원짜리 국밥을
바닥까지 긁어 먹었다.
개중에는 아편을 사듯 소주 반 병을 시켜 먹고 의자 뒤로 스르르 주저앉아 못 일어나는 이도 있었다
적십자병원 뒤 靈泉(영천)시장
말바위산이 올려다보이던 어둠침침한 밥집에서
서로 등 돌리고
서로의 밥에다 가래침을 뱉는 그 바닥.
갈 곳 없는 심연 속을 그들은 걸어 내려갔다
제각기 몸을 등잔으로 삼고 어두움 속으로.
육신에 가둬놓은 영혼의 어둠이 견딜 수 없이
몸을 누르고 눈을 봉할 때
그들은 다시 와서 피를 뽑았다.
- 조정권, <매혈자들>
한 삼십 분 정도 누워 있다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선지국 집으로 몰려왔다
사골뼈 대신 공업용 쇼팅 기름을 쓴
이백원짜리 국밥을
바닥까지 긁어 먹었다.
개중에는 아편을 사듯 소주 반 병을 시켜 먹고 의자 뒤로 스르르 주저앉아 못 일어나는 이도 있었다
적십자병원 뒤 靈泉(영천)시장
말바위산이 올려다보이던 어둠침침한 밥집에서
서로 등 돌리고
서로의 밥에다 가래침을 뱉는 그 바닥.
갈 곳 없는 심연 속을 그들은 걸어 내려갔다
제각기 몸을 등잔으로 삼고 어두움 속으로.
육신에 가둬놓은 영혼의 어둠이 견딜 수 없이
몸을 누르고 눈을 봉할 때
그들은 다시 와서 피를 뽑았다.
- 조정권, <매혈자들>
한국 단편소설인 우상의 눈물에도 등장인물인 최기표가 매혈까지 종용하여 돈을 갖다 바치게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에서도 실미도 부대원 중에서 원래는 공사판에서 일하던 인부였지만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피를 팔던 어떤 훈련병의 이야기가 나온다. 피가 묽어질 정도로 뽑아대자 환영받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실미도 요원으로 입대하게 된다.
중국에는 아예 매혈을 중심소재로 다룬 소설 허삼관 매혈기도 있는데 제목대로 허삼관이 피를 파는 이야기. 옌롄커의 <딩씨 마을의 꿈> 역시 상술한 주삿바늘 돌려쓰기의 폐해와 그로 인해 에이즈가 창궐한 마을을 다룬다.
흡혈귀물 중 흡혈귀와 인간이 공존하는 장르의 작품에서는 인간이 헌혈한 피를 흡혈귀가 사서 소비하는 경우도 있다.
5. 관련 문서
[1] 일본 측 반응의 원인은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봐야 알 수 있다. 우선 외교관, 특히 대사급 외교관이 자국민에 의해 공격당해 중상을 입게 된 것은 매우 심각한 외교 사안인데 특히 그 외교관이 미국에서 파견된 외교관이라 더 큰 문제가 된 것이다. 안 그래도 한 세대도 안 지난 19년 전에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에 의해 패전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해서 일본이 패전하면서 생긴 반미 감정 때문에 이런 일들이 생긴 게 아니냐고 미국 측에서 오해하면 일본 측 입장이 아주 곤란해질 상황이었다. 더해서 당시 일본은 미국의 도움으로 국방을 유지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즉, 일본 전역이 발칵 뒤집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상황이었고, 동시에 미국 측의 오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일본 정부에서 과하게 반응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본 특유의 가이아쓰야 더 말할 것도 없고.[2] 참고로 1975년 통계를 보면 월급 10만원은 잘나가는 직장인들이나 특수직종, 장기근속한 근로자들 정도나 받을 수 있는 일반 직장인들에게 꿈의 금액이었다.[3] 1993년 통계로는 혈액원 혈액 공급자의 38%가 현역군인, 26%가 학생이었다고 한다. 다만 서울에서는 학생들의 용돈벌이용 헌혈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학부모들이 헌혈에 대해 걱정하면서 학교에 항의전화를 걸어서였다고 한다.[4] 헌혈 국가는 약 60여개국으로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포함되어있고 나머지 40여개국은 현재까지도 매혈제도가 존재한다.[5] 헌혈을 완전히 대체하는 개념이 아니라 매혈과 헌혈이 공존하는 방향이다.[6] 용돈 느낌으로 매혈을 하려는 사람도 있다.[7] 약 3~4시간의 봉사활동시간으로 퉁쳐준다.[8] 초코파이와 작업을 빼주는 시간으로 퉁쳐준다.[9] 매년 학생들이 방학에 들어가는 12~1월, 7~8월은 전국에 혈액수급 비상이 걸린다. 헌혈의 집마다 기념품을 1+1로 주는 행사를 하거나 직접 군부대를 방문해 헌혈을 유도하는 횟수도 늘어난다.[10] 당연하지만 군부대는 전방 지역에 몰려 있다. 혈장 헌혈은 가능하지만 문제는 군부대에 방문하는 헌혈 차량으로는 혈장 헌혈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11] 인공적으로 생산이 불가능하다.[12] 아직까지는 공장생산이 불가능하여 사람에게만 채집할 수 있는데 그 중요성은 생명을 살린다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반면 다른 장기기증과 달리 단순 채집만으로는 제공자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도 않는다. 대신 한번 채취한 혈액은 안전목적상 사용되지 않으면 몇 주 내로 파기해야 하므로 지속적으로 + 일정량 이상의 안정적인 수급이 필요하다.[13] 예를 들어 매혈을 통해 매혈자에게 10만원을 지급한다고 하면 혈액제제 제작 및 유통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수혈을 받는 환자와 건강보험이 그 10만원+@를 부담해야 한다.[14] 혈액제제 값이 얼마나 싼지 국내외에서 수혈을 너무 남발한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올 정도다. 수혈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도 수술의 안정성을 위해 일단 수혈을 준비하고 보는 경우도 많다.[15] 실제로 3일 정도면 몸이 대부분 회복되지만 3일마다 헌혈하면 철 손실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현재는 2달마다 헌혈을 할 수 있도록 제한한다.[16] 상처가 미미할 뿐 헌혈도 출혈과 동일하게 피를 잃는 것이다. 몸에 당연히 일정량의 무리가 가며 헌혈한 당일은 전체 혈액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평소와 같은 양의 술을 마셔도 혈중 알콜농도가 더 급격하게 상승한다. 헌혈을 한 상태에서 평소에 만취할 정도의 양을 마셨다면 혼수 상태에 이르거나 호흡 정지가 올 수도 있다. 위의 예시는 사실상 호흡 정지 사례다.[17] 실제로 냉전 시기에 서양의 제약회사들이 의약품 생산을 위한 혈액을 얻기 위해 중국에서 매혈을 했는데 비용 절감을 위해 주삿바늘 돌려쓰기를 하다가 집단 에이즈 감염 사태로까지 번지기도 했다. 이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지기도 했다.[18]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는 병원 등의 지정된 장소에서만 피를 뽑은 다음 증서를 받고 매혈자와 수익을 분배하는 제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매혈 방식을 체계화시키는 것이다.[19] 혈액량 전체가 아니다.[20] 현재 환율로 한화 약 50~70만 원.[21] 허난성 저우커우시의 감염질환 연구자 왕슈핑의 내부고발이 낳은 결과였다. 이 고발은 에이즈와 C형 간염 같은 질병의 확산을 막는데 큰 공헌을 했지만 이후 그녀는 해고와 따돌림, 매국노라는 낙인찍기를 버티지 못하고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자신의 고발 내용을 바탕으로 연극을 만들기까지 했지만 공안에 의해 외국에 치부를 알리지 말라는 압박까지 받았다고 한다. 2019년에 작고했다.[22] 건강의 위험성과 금전적으로 떼일 위험성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