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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21:04:19

마카베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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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
2.1. 전쟁 이전2.2. 안티오코스 4세의 강제 그리스화2.3. 마카베오 전쟁의 발발2.4. 유다 마카베오의 대활약2.5. 전쟁 중반2.6. 전쟁 후기: 요나단의 외교전과 하스몬 왕조의 성립2.7. 전쟁 이후(모압, 암몬, 에돔 소멸 및 흡수)
3. 관련 문서

1. 개요

기원전 167년~142년까지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유대인들과 셀레우코스 왕조의 전쟁. 이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로 유대인들은 잠시 동안 독립국인 하스몬 왕조를 창설하게 된다.

성경에서는 구약 제2경전으로 역사서의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는 마카베오기 상/하권에서 유다 마카베오의 투쟁부터 시작해 이 전쟁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다. 마카베오기 상/하권은 동일한 저작물의 상/하편 관계가 아니라, 다른 저자가 각각의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본 별개의 문서이다. 제2경전이 없는 개신교에서는 '신·구약 중간기'로 분류한다. 다만 이 시기에 구약에서부터 꾸준히 등장하던 이스라엘-유다의 가까운 친척이자 적, 경쟁자였던 에돔, 모압, 암몬 등이 한 세트로 싸잡아 묶여 그 민족정체성을 완전히 잃고, 무려 천 년 넘는 세월을 뒤로 한채 유다에게 강제동화되어버린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었다. 이는 결과 부분 참조.

2. 전개

2.1. 전쟁 이전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를 받던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로스 3세의 동방 정복 이후 헬레니즘 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유대인들의 전통종교와 대사제장을 중심으로한 신정정치체제를 용인해주었지만 젊은 나이에 바빌론에서 사망하게 되고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광대한 제국은 그의 부하장수들 간의 쟁투로 갈라지게 된다.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는 매년 20탈란트의 세금을 바치는 조건으로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정치의 자치권을 용인했기에 이때까지는 그리 큰 문제는 없었다. 물론 위기가 아예 없던 건 아니었는데 대사제장 오니아스 3세가 매년 바치던 20탈란트의 세금을 바치지 않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유대의 자치권을 박탈하겠다며 위협을 했었다. 이때는 다행히도 토비아 가문의 요셉이 밀린 14년치 세금을 몽땅 내버려서[1] 유대인들은 자치권 박탈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술을 좋아하긴 했으나 군사적 능력은 별로였던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대에 이르러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고, 이 틈을 노린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결국 기원전 200년, 안티오코스 3세가 파네이온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격파하여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래도 안티오코스 3세는 유대인의 자치권을 존중해주긴 했지만 여기저기 정복전쟁을 벌이다가 결국 로마의 어그로를 잔뜩 끌어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에게 패배했고 결국 거액의 전쟁 배상금만 남긴 채 기원전 187년에 암살되었다. 이후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인 셀레우코스 4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그는 안티오코스 3세의 전쟁 배상금을 마련하려고 동분서주한 끝에 예루살렘 대성전의 금고를 탈취하겠다는 미친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총독 헬리오도루스가 이건 미친 짓이야라면서 예루살렘 대성전 금고 약탈을 중단했고[2] 결국 셀레우코스 4세를 암살한다.

로마에 머무르고 있던 안티오코스 4세는 이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헬리오도루스를 격파한 뒤 왕위에 올랐고 이때부터 유대인들에게는 악몽이 시작되었다.

2.2. 안티오코스 4세의 강제 그리스화

젊고 자신만만했던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교와 전통을 지키는 유대인들을 아니꼽게 여겼고 이는 강제적인 그리스화 정책 강행으로 이어졌다.[3] 우선 제우스 신의 현현인 스스로를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신의 현현)로 칭하고 숭배하게 했으며,[4] 예루살렘에 제우스 신전을 세우고, 돼지고기를 먹을 것이며, 사내아이들의 할례를 금지하고, 안식일 준수를 금지하는 조치를 내리며 유대인들을 억압한다.

이런 조치는 유대인 내적으로 유대교에 충실한 유대인들과 헬레니즘 문화에 유화적이던 유대인들간의 충돌을 야기했고 이는 마카베오 전쟁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런 조치를 내리고 안티오코스 4세는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한편 유대에서는 보수적이던 대사제 오니아스 3세가 죽고 그의 뒤를 이어 동생 이아손이 대사제가 되었다. 이아손은 형과는 달리 헬레니즘 문화를 아주 좋아했으며[5] 안티오코스 4세에게 앞장서서 헬레니즘화를 다짐할 정도였다. 야손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헬레니즘 도시로 바뀌어나갔다. 그는 예루살렘에 체육관(김나지움)을 세우고[6] 전통적으로 대사제와 율법에 정통한 원로들을 중심으로 한 원로 회의를 일반 그리스 도시들처럼 시민 의회로 바꾸었다. 이런 조치들은 유대교 전통에 충실한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반발을 샀다.

그러나 이아손은 불과 2년 만에 시몬, 그리스식 이름으로는 메넬라오스라는 성전 수비대장의 형에게 쿠데타로 쫓겨나고 만다. 이아손을 쫓아낸 뒤 메넬라오스는 토비야 가문의 지지를 받아 안티오코스 4세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고 대사제장의 직위에 오르게 된다. 게다가 메넬라오스는 사독 계열도 아니었으니 더 막장으로 치달은 셈이다. 메넬라오스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헬레니즘화를 더욱 밀어붙였으며 안티오코스 4세에게 바칠 뇌물을 마련하기 위해 성전의 기물을 내다 파는 일까지 벌였다.

이런 가운데 안티오코스 4세는 기원전 168년에 이집트 원정에 실패하고 돌아오게 된다[7]. 이집트에서의 패배로 재정이 궁한데다가 로마 때문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해 짜증이 폭발했는지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으로 대뜸 쳐들어 와서는 더 강경한 헬레니즘 정책을 발표했다. 유대교의 토라(율법책)을 모두 압수해 불태우고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상을 세웠으며[8][9] 성전에 돼지를 들고 가서 돼지 피를 벽에 발라 더럽히는[10][11]행위를 하고 성전의 금고와 기물을 약탈하는 사태를 일으키고 돌아갔다.[12]

한마디로 경건한 유대인들(하시딤)들에게는 유대교 말살 정책인지라 팔레스타인의 정세는 점점 험악해져갔다. 하시딤들은 안티오코스 4세의 헬레니즘 정책에 반대하지 않는 유대인들과 격한 갈등에 빠졌으며 결국 이는 마카베오 전쟁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3. 마카베오 전쟁의 발발

기원전 167년, 모디인에 안티오코스 4세의 사자가 도착했다. 왕의 사자는 그리스 신에게 제사를 바치라고 강요했는데 대사제 요하난의 아들 마타디아는 이를 거부했다. 다른 유대인이 그리스 신(제우스)에게 제사를 바치려고 나서자 마타디아는 그 자리에서 그 유대인을 쳐죽였으며 왕의 사자도 척살하기에 이르렀다.

마타디아의 이런 행동은 사실상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마타디아는 자신의 다섯 아들들과 함께 유대 광야로 나가 반란군을 조직하고 헬레니즘적 유대인들에게 맞서 싸울것을 결의했다. 여기에 하시딤들이 가세하면서 반란군의 기세가 오르게 된다.[13]

2.4. 유다 마카베오의 대활약

그러나 기원전 166년, 마타디아가 전사하고 반란군은 그의 셋째 아들인 유다가 이끌게 된다. 그는 마카베오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는데, 마카베오라는 이름은 유다가 전투를 시작할 때 늘 외쳤던 미 크모카 벨림 야훼!(어느 신이 당신과 같겠습니까 야훼여: 출애굽기 15장 11절)에서 각 단어의 앞단어를 따와서 만들어졌다.

"망치"라는 별명답게 유다 마카베오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전쟁을 주도했다. 마카베오 군대는 팔레스타인 각 도시들을 공격하여 헬레니즘파 유대인들을 색출하여 살해했다. 이는 마카베오 전쟁이 헬레니즘파 유대인들과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맞서는 내전과 독립운동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에 격분한 헬레니즘파 유대인들은 이들에 맞서서 시리아의 군대장관 리시아스에게 협력하여 마카비 군대를 토벌하려 하였으나 유다 마카비는 벧호론, 엠마오, 벧주르 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이들을 연전연파하며 기세를 올렸다.[14]

결국 기원전 164년, 마카베오 군대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대신전에 세워져있던 제우스 상을 파괴하고 대신전을 정화했으며 유대교의 전통 의례를 다시 부활시켰다. 이때 야훼를 위하여 켜는 성스러운 촛대의 성유가 하루치 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곤란한 상황이 되었는데 성유를 전례에 따라 만들려면 8일이 소요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남은 하루치의 성유가 8일 동안 타오르는 기적이 일어났고 이 기적으로부터 유대교의 최대 절기인 하누카(수전절, 修殿節)이 유래되었다.[15]

2.5. 전쟁 중반

같은 해에 안티오코스 4세가 페르시아에서 갑자기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안티오코스 5세가 즉위했다. 안티오코스 5세는 어린 나이에 즉위한지라 리시아스에게 의존했고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안티오코스 4세의 강경한 유대교 정책에서 완화된 정책을 취했다. 우선 원성을 사고 반란의 주원인을 제공했던 대사제장 메넬라오스는 경질되고 사독 계열이자 헬레니즘파인 알키모스를 대사제장으로 임명했으며 유대교의 전통 의례도 다시 허용했다.

하지만 유다 마카비는 이런 유화정책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았으며 대사제장 알키모스가 헬레니즘에 유화적인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져 알키모스 타도를 선언했다. 이렇게 되자 리시아스가 다시 마카비 군대 토벌을 위해 나섰고 한때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에 있던 리시아스의 정적인 필리포스가 시리아로 쳐들어오자 급히 철군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안티오코스 5세와 리시아스가 안티오코스 5세의 사촌이자 셀레우코스 4세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에게 암살되었고 왕위는 데메트리오스에게 넘어가 그는 데메트리오스 1세가 되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알키모스를 지지하며 페니키아의 행정장관 바키데스를 파견했다. 알키모스와 바키데스는 평화적으로 유다 마카비와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으나, 유다 마카비가 게릴라전을 지속적으로 펼쳤고 결국 데메트리오스 1세는 반란군을 완전히 격파하기 위해 니카노르 장군을 보내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니카노르는 그야말로 파상공세를 펼쳤으나 벧호론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다시금 마카비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니카노르의 전사 이후 얼마 간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기원전 160년에 베레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유다 마카비가 전사하여 마카비군의 기세는 떨어지고 최대의 위기를 맞기에 이른다.

2.6. 전쟁 후기: 요나단의 외교전과 하스몬 왕조의 성립

유다 마카베오의 전사 이후 바키데스는 마카베오 군대를 완전히 토벌하여 반란을 종식시키려 하였으나 유다의 뒤를 이은 막내동생 요나단은 반란군을 유대 광야로 퇴각시켜서 반란의 불씨를 이어나갔다.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진 유다 마카베오와는 달리 요나단은 뛰어난 외교감각으로 유대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요르단 강 동편의 나바테아 왕국과 동맹을 맺었고 심지어는 멀리 로마까지 사신을 보내 동맹 관계를 구축했다.

또한 요나단은 데메트리오스 1세에게 맞서는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와 친분을 만들고 그에게 충성하여 종래에 대사제가 되는 것을 노렸다. 결국 알렉산드로스 발라스가 데메트리오스 1세를 물리치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권을 거머쥐고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딸과 혼인을 하기에 이르렀다. 발라스는 자신에게 충성한 요나단을 결혼식에 초청하여 왕의 친구로 부르며 헬레니즘파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에게 보라색 옷을 입히고 시가 행진을 하게 했는데 이는 사실상 요나단을 유대의 왕으로 인정한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요나단에게 유대의 통치자라는 직함을 내리기에 이른다.

기원전 152년, 요나단은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해 스스로 대사제의 예복을 입고 초막절 전례를 주관하여 유대왕과 대사제를 겸하여 권력이 강해졌다. 그러나 요나단은 사독 계열이 아니었던데다가 왕과 대사제장을 겸한 것 때문에 나중에 이는 유대교의 종파별 분열을 불러오게 되었다.[16]

요나단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변동에 따라 적절한 외교술로 유대의 독립을 얻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왕조는 정치가 불안했고 이는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빠질 우려가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발라스가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패배하여 왕권을 빼앗기자 요나단은 바로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붙어서 사마리아 지역의 통치권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 2세 휘하의 장군 디오도토스 트리폰은 반란을 일으켰고 요나단을 제거하여 팔레스타인을 차지하려 했다. 기원전 143년, 벧산에서 요나단과 맞붙은 끝에 그를 붙잡기에 이른다. 요나단은 결국 옥중에서 트리폰에게 처형되었다.

이후 마카베오군의 지휘권은 유다와 요나단의 형 시몬이 승계하게 된다. 시몬 또한 지도력을 발휘해 유대인의 독립을 얻어내기 위해 애썼는데 트리폰에 맞서서 데메트리오스 2세와 동맹을 맺었고 데메트리오스 2세는 세금면제의 특전을 주었다. 결국 기원전 142년, 시몬은 유대인의 대사제, 지도자, 총사령관의 직위에 올라 사실상 유대의 독립을 쟁취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시몬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그의 자손들이 79년 간 하스몬 왕조를 이어나가게 된다.

2.7. 전쟁 이후(모압, 암몬, 에돔 소멸 및 흡수)

하스몬 왕조가 성립되긴 했으나 모든 유대인들이 하스몬 왕조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마타디아의 반란이 처음 일어날 때는 경건한 유대교 전통을 지키기 위한 데서 시작했으나 요나단시몬에 이르러서 유대의 독립을 얻어내기 위해 셀레우코스 왕조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이들의 행태는 경건한 유대인들의 방식에서 점점 헬레니즘파 유대인들의 행태로 변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요나단은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에게 고개를 숙였고 사독 계열이 아닌 그가 대사제가 되면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크게 실망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시몬까지 왕과 대사제장을 겸하면서 경건한 유대인들의 불만은 폭발하기에 이르렀고 이들은 진정한 사독 계열 대사제가 나타날 때까지 다른 대사제는 인정할 수 없다는데에 이르렀다. 이들이 이후 종말론적이고 금욕적인 에세네파로 이어지게 된다.

하스몬 왕조가 성립된 이후 하스몬 왕조의 왕들은 왕이면서 동시에 대사제직을 승계해 나갔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 행태는 헬레니즘적이었고 특히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노스 1세전 세계를 정복해서 모든 사람들을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으로 만들겠다는 턱없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병에 걸려 있었지만, 정작 그는 유대교의 분열만 가속화 시켰다. 결국 하스몬 왕조는 유대교의 분열 속에 심각한 왕위 다툼까지 이어지다가 왕위를 위해 외세인 로마 제국을 부르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멸망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하스몬 왕가의 정책은 적어도 에돔, 모압, 암몬 이 세 민족에 대해서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전 세계는 정복하는데 실패했지만 헬레니즘 왕조의 군대를 몰아내면서 에돔, 모암, 암몬 민족의 생사는 하스몬 왕조의 수중에 떨어졌고, 하스몬 왕조는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전부 다 죽여버리겠다고 문자 그대로의 협박을 가하여 이들 모두를 유대교인으로 만들었다. 이에 무려 천 년 넘는 독자적 정체성과 역사, 문화를 가졌던 에돔, 모압, 암몬인들은 전원 유대 민족으로 흡수되어 사라지고 만다. 한마디로 한두 민족도 아니고 무려 세 민족을 말살하고야 만 것. 물론 훨씬 훗날 등장하는 미치광이 히틀러마냥 물리적으로 인종 청소한 결과는 아니었다지만, 바로 이것이 유대인들이 극구 피하고자 했던 운명임을 생각해보면 후대인 입장에선 만감이 교차한다.[17]

또한 요한 히르카노스 1세가 구상했던, 타민족을 유대교로 개종시켜 유대의 확장을 꾀한다는 아이디어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결실을 보게 된다. 윗단락에 나오는 모압, 암몬, 에돔의 완전 흡수는 고대 근동에선 그 사례를 거의 찾아보기 힘든 성공이었고[18][19] 이후에도 유대교인들은 타민족 중에서 상당한 개종자를 얻게 된다. 이 유대교에서 나온 기독교가 거꾸로 유대인들 가운데서 많은 개종자를 얻게 되며 이들이 유대인 정체성을 잃고 로마인이 되고만 것도, 어찌보면 돌고도는 기구한 역사의 패턴일지 모른다.

3. 관련 문서


[1] 이전 주석에서는 1탈란트가 오늘날 기준으로 금 33㎏ 정도에 해당된다고 보았지만, 고대 근동은 은본위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1탈란트는 은화 6,000드라크마 혹은 은 3,000셰켈로 은 34.272㎏이다. 즉 유대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바친 세금은 대략 은 685.44㎏이다. 순은 1㎏의 오늘날 시세는 대략 63만 원 정도이니 유대가 바친 세금은 매년 4억 3182만 7200원 정도인데 이것이 14년 밀렸으니 세금이 대략 60억 4558만 원이나 연체된 셈이라 볼 수 있다. 이전 주석의 금(…)에 비하면 상당히 작은 금액이지만 이만큼의 돈을 융통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토비아 가문의 부를 추측해볼 수 있다.[2] 사실 헬리오도루스의 생각이 옳은 게 예루살렘 대성전의 금고 약탈 사실이 동방 전역에 퍼진 유대인들에게 알려지면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고 봤을 것이다.[3] 정확히 말한다면 제국이 무너져가는 상황에서 그리스 다신교 중심의 강력한 재통합 정책을 펼친 것이다. 문제는 이 문서가 존재하는 것에서 나왔듯 완벽히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이지만.[4] 유대인들은 미친 놈이라는 뜻의 에피마네스로 불렀다(…)[5] 이름부터가 그리스 신화의 영웅 이아손에서 따왔다.[6] 고대 그리스에서 체육관에서는 다들 나체로 운동을 해야 하는지라 유대교 전통에 충실한 사람들 입장에선 그야말로 악의 소굴이나 다름이 없는 시설이었다. 한편 나체 상태에서 할례의 흔적이 드러나는 게 부끄러워 도로 재수술(…)을 하는 친헬레니즘 유대인들도 있었다고 한다.[7] 일화에 따르면 이집트 원정 중 이집트를 섭정 중이던 로마가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를 대사로 보내 안티오코스 4세를 대면하게 했는데 그는 안티오코스 4세가 있는 곳에 원을 둘러 그린 후, "철군인가, 아니면 진군인가? 원 밖으로 나오기 전 선택하라."고 했다 한다. 진군을 택하면 로마와 선전포고를 하는 셈이니 철군할 수 밖에 없었다.[8] 유대인들은 파멸의 우상이라 불렀다. 후에 예수가 예루살렘 대성전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선 것을 보거든 종말의 때가 왔음을 알라라고 하는 말도 이 때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던걸로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칼리굴라 또한 예루살렘 대성전에 자신의 신상을 세우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다니엘서 12장 11절도 이것을 예언한 게 아니냐는 말이 있다.[9] 구약성서 마카베오기 상권에는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키슬레우의 달 15일에 예루살렘 성전 번제 제단 위에 세웠다(마카베오기 상권 1장 54절)고 쓰여있다. 구체적으로 제우스 신상이라고 쓰지 않고 황폐를 부르는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쓴 것으로 볼 때 입에 담기도 싫었던 것 같다.[10] 현대인의 관점에선 이 행동이 유치해 보일 수 있으나 고대 사회에서 종교가 가지는 위치를 감안하면 꽤 정치적인 행위였는데 돼지의 피를 신전 벽에 바르는 행위는 유대교의 근간을 파괴하는 행위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안티오코스 4세는 그 정치적 의미를 알기에 저런 행동을 했던 것이다. 저 때 유대인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 경험하고 싶다면(...), 메카에서 코란 태우기를 해보자. 유서는 미리 써두고.[11] 이런 유형의 종교 테러는 현대에도 종종 벌어진다. 주로 인도에서 많이 벌어지는데 힌두교도들이 모스크에 돼지피를 뿌리거나, 무슬림들은 힌두교 성소에 소의 피를 뿌리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멀리 보면 세포이 항쟁의 원인도 소기름과 돼지기름이었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절을 부수거나 승려를 폭행하는 행위를 벌이거나 대한민국에 와서도 광적인 개신교도들이 절에 불을 지르는 일도 일어나는 등 한국에서도 잊을만 하면 벌어지는게 종교 테러다.[12] 유대인들을 엄청나게 경멸하는 행위들이면서 능멸하는 행위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이 지극히 거룩하게 여기는 장소로서 들어가기 전 사제들은 반드시 손과 발을 전 밖에 비치된 대야에서 씻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신성한 곳이었다.[13] 마타디아의 다섯 아들의 이름은 요한 가티, 시몬 타시, 유다 마카베오, 엘르아잘 아바란, 요나단 아푸스. 보통 후계자가 장남이 되는 것을 생각하면 꽤나 이례적인 경우이다. 그만큼 유다와 요나단의 능력이나 인망이 뛰어났다는 방증.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마타시아스의 증조부에게 아사모나이오스(Asamonaios)라는 성을 붙였으며, 이에 따라 다음 세기 마카베오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왕조에 하스몬(Hasmonean)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14] 시리아인들은 코끼리 등에 나무탑을 세우고 1,000명의 무장한 병사들이 코끼리를 둘러싸고 전투에 나갔다. BC 163년 유다의 동생 엘르아잘은 코끼리를 칼로 찌른 후 쓰러지는 코끼리에 깔려 죽었다.[15] 하누카는 기슬래월 25일, 양력으로는 12월 25일에 지켜진다.[16] 여담인데 이 부분에서는 예수의 선구자라 할 수 있었다. 사실 요나단 이전에 왕과 제사장이 각자 메시아로 돌아온다는 예언은 있었지만 그걸 한 사람이 겸한다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실천된 건 이스라엘 역사에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건 후세인인 현대 한국인 입장에서 획기적인 것이고, 당대인들 중 상당수는 말도 안 되는 엉터리 같은 짓이라 생각했었다. 에세네파 자체 전승은 이를 반대했기에 메시아도 하나가 아닌 둘이 온다고 주장했었는데, 상당 부분 에세네파의 해석과 전승 또한 취한 예수가 주장한 메시아론은 에세네파가 그토록 반대한 요나단의 이론과 같았다. 요나단을 싫어해서 나온 에세네파 계열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해서도 극심한 반감을 품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17] 여기서 하나 더 말하자면, 유대인들은 에돔인들을 이민족으로 취급한 사실이 없다. 헤롯 대왕에 대해 유대인들이 어느 정도 비토 분위기가 있었던 건 그가 '에돔계'였던 것보다는 다윗 왕가의 후손이 아니고 하스몬 왕조의 후손도 아니라는 점이 더욱 이유가 크다. 게다가 아예 유대교 사상가들은 전반적으로 왕정 자체에 반감과 회의가 커서 유대 독립에 공로가 큰 하스몬 왕조의 집권자들마저 인정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와중이었으니 에돔계 유대인이었던 헤롯 대왕이 인정받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18] 이 세 민족은 사실 이스라엘, 유대, 아람 등과 혈통적, 문화적, 언어적으로 거리가 멀지 않았다. 굳이 거기를 따지면 에돔이 유대와 가장 가깝고 모압암몬이 그 다음이며 아람이 가장 멀지만 그 아람마저도 사실 문화-언어-혈통 차이는 대단히 않을 정도다. 오늘날 한국인 감각으로 보기엔 사실상 같은 민족 안 분파에 불과하다.[19] 한편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혼혈이라고 멸시했고 사마리아인보다 더 북쪽에 살던 갈릴리인들은 혼혈이라고까진 안 했어도 시골뜨기들 정도로 여겨 무시했지만 정작 암몬, 모압, 에돔 출신 유대인 대부분은 기존 유대인과 가장 많이 혼혈되었다. 적어도 혼혈도로 따지면 유대인들도 사마리아인들더러 뭐라고 할 입장은 못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