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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창

파일:프랑스 오픈 로고.svg
역대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우승자
1988년
파일:스웨덴 국기.svg 마츠 빌란데르
1989년
파일:미국 국기.svg 마이클 창
1990년
파일:에콰도르 국기.svg 안드레스 고메스
파일:7CBC4542-2686-4306-86FA-34C91988B848.jpg
마이클 더페이 창
(Michael Te-Pei Chang)[1]
생년월일 1972년 2월 22일 ([age(1972-02-22)]세)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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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출신지 미국 뉴저지 주 호보컨
프로데뷔 1988년
신장 175cm (5 ft 9 in)
사용 손 오른손 (투핸드 백핸드)
ATP 싱글 랭킹 최고 2위
ATP 더블 랭킹 최고 199위
개인전 통산 성적 662승 312패(68.0%)
개인전 타이틀 획득 34회
통산 상금 획득 $19,145,632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커리어3. 선수 경력4. 은퇴 이후5. 참고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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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前 테니스 선수. 대만계 미국인 테니스 선수로서 1988년에 프로에 데뷔하여 2003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국적은 미국이었지만 순수 동아시아인 혈통이었기에 1990년대에 10대를 보낸 아시아 테니스 선수들에게는 우상 겸 롤모델 같은 존재였으며, 아시아계 선수로는 최초로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2]을 달성한 선수다.

2. 커리어


그랜드슬램 대회 : 우승 1회 / 준우승 3회
연도 호주 프랑스 윔블던 US
1987 불참 불참 불참 2라운드
1988 불참 3라운드 2라운드 4라운드
1989 불참 우승[3] 4라운드 4라운드
1990 불참 8강 4라운드 3라운드
1991 불참 8강 1라운드 4라운드
1992 3라운드 3라운드 1라운드 4강
1993 2라운드 2라운드 3라운드 8강
1994 불참 3라운드 8강 4라운드
1995 4강 준우승 2라운드 8강
1996 준우승 3라운드 1라운드 준우승
1997 4강 4라운드 1라운드 4강
1998 2라운드 3라운드 2라운드 2라운드
1999 2라운드 1라운드 불참 2라운드
2000 1라운드 3라운드 2라운드 2라운드
2001 1라운드 2라운드 2라운드 1라운드
2002 1라운드 1라운드 2라운드 2라운드
2003 불참 1라운드 불참 1라운드

기타 대회

3. 선수 경력

175cm의 작은 신체 조건에서 알 수 있듯 마이클 창은 고전적인 카운터펀처로 계속 방어, 방어, 방어를 반복하면서 상대의 멘탈을 흔든 뒤 카운터로 끝내는 끈질긴 진흙탕 승부에 강한 스타일이었다. 아래 언급된 명경기가 레전드로 손꼽히는 것도 이런 이유.

미국의 유명한 테니스 선수 육성 기관인 닉 볼리티에리 테니스 아카데미[6] 출신으로 안드레 애거시의 자서전에 따르면 애거시가 주니어 테니스 선수로 볼리티에리 아카데미에서 훈련받을 때 비슷한 나이대의 짐 쿠리어와 마이클 창도 주니어 테니스 선수로 볼리티에리 아카데미에서 훈련받고 있었다고 한다. 애거시의 자서전에 따르면 창은 당시 또래 선수들보다 키도 작고 말도 없는 모습이었다고.[7] 하지만 창은 주니어 선수 시절부터 수많은 최연소 기록을 세우면서 이름을 알린 유망주였는데 만 15세 6개월의 나이로 당시 세계 랭킹 순위가 겨우 920위에 불과한 상태에서 출전한 첫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이었던 1987년 US 오픈 남자 단식 본선 1회전에서 승리하면서 US 오픈 남자 단식 본선 경기 최연소 승리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1987년 US 오픈 남자 단식 한달 후엔 ATP 투어 남자 단식에서도 4강에 진출하였고 1988년 US 오픈 남자 단식에선 만 16세 6개월의 나이로 16강 진출을 기록하더니 1988년 US 오픈 남자 단식 2주 후엔 만 16세 7개월의 나이로 ATP 투어 남자 단식 첫 결승 진출 겸 우승까지 달성하였다.

하지만 마이클 창이 일약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1989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우승 때였다. 당시 만 17세 3개월의 나이로 1989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한 창은 16강전에서 우승 후보이던 세계 랭킹 1위 이반 렌들(체코)을 상대로 3-2(4-6, 4-6, 6-3, 6-3, 6-3)의 역전승을 거두고 결승전에서도 세계 랭킹 3위인 스테판 에드베리(스웨덴)를 3-2(6-1, 3-6, 4-6, 6-4, 6-2)로 물리치면서 만 17세 3개월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 겸 역대 최연소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우승 기록을 수립했다. 이 기록은 현재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 우승이 더욱 후세에 회자된 것은 당시 세계 랭킹 1위이던 우승 후보 이반 렌들과의 16강전이 워낙 극적인 승부였기 때문이다. 1세트와 2세트를 먼저 내주며 탈락할 것처럼 보였던 마이클 창은 3세트와 4세트를 끈질기게 따냈고 마지막 5세트에서 기습적으로 변칙적인 언더 서브(영어로는 the underarm/underhand serve)를 넣으면서 우승 후보 렌들의 페이스를 흐트러지게 만들었다. 마이클 창이 기습적으로 사용한 변칙적인 언더 서브에 포인트를 잃은 렌들은 경기에 대한 집중력을 잃고 흐트러진 페이스를 회복하지 못하면서 그대로 창에게 마지막 5세트를 내주며 마이클 창은 극적으로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8강전에 진출하게 되고 결국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우승까지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완전히 무명이던 창이 우승한 것이어서 더욱 센세이션이 컸던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당시 1989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에 출전할 때의 창은 만 17세 3개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세계 랭킹 19위에 올라있었고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에서도 15번 시드를 받을 정도였다. 완전 무명 선수까지는 아니었다는 이야기. 하지만 세계 랭킹이 이미 20위 안에 들어가서 시드를 받았다고 한들 만 17세 3개월의 나이인 애송이였던 것도 사실이고 그런 애송이가 세계 랭킹 10위 안에 들어가는 이미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을 여러번 달성한 쟁쟁한 선배 선수들을 연파하고 우승한 것도 사실이었으므로 엄청난 이변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마이클 창의 전성기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인데 재미있는 점은, 창의 유일한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인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우승은 전성기 이전인 1989년에 달성했다는 점이다. 사실 마이클 창이 첫 ATP 투어 남자 단식 우승을 달성한 1988년부터 전성기 직전인 1991년까지는 비록 1989년에 첫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인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우승을 달성하고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8강 진출 2회, 1990년 마스터스 캐나다 마스터스 남자 단식 우승, 1991년 마스터스 파리 오픈 남자 단식 4강 진출, ATP 투어 남자 단식 우승 3회, 준우승 3회를 기록하기는 했으나 전성기만큼 꾸준하게 성적을 올리지는 못하는 기복이 심하던 시기였다.

전성기에 접어들어서 훨씬 꾸준하게 좋은 성적을 올렸는데 전성기의 절정기는 1995년 9월 중순부터 1996년 9월 중순까지로 이 시기에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에서 준우승 2회, 1995년 마스터스 컵 남자 단식 준우승, 1996년 마스터스 인디언 웰스 오픈 남자 단식 우승, 1996년 마스터스 신시내티 오픈 남자 단식 준우승, ATP 투어 남자 단식에서 우승 4회, 준우승 1회를 기록하여 1996년 9월에는 세계 랭킹 최고 순위인 2위까지 기록하였다.

하지만 마이클 창의 전성기는 공교롭게도 같은 미국 국적의 선수로서 양강으로 1990년대를 지배한 피트 샘프러스앤드리 애거시, 그리고 3인자 짐 쿠리어의 전성기와 겹쳤기 때문에 그 빛이 가려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미국의 라이벌 선수들을 제외하더라도 유럽의 토마스 무스터보리스 베커 같은 강자들도 존재하였기에 마이클 창은 전성기인 1992년부터 1997년 사이에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에서 4강 이상 진출을 7회, 그 중에서 3번은 결승까지 진출하였음에도 우승과 세계 랭킹 1위 달성에 실패하였다.[8]1997년 US 오픈 4강 진출을 마지막으로 이후 6년간 참가한 슬램 대회들에서 3라운드 이하로 탈락하였고, 그대로 2003년에 은퇴하였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창의 유일한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은 프로에 데뷔한 애송이 시절인 1989년의 프랑스 오픈이었다. 그래도 창은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준우승 3회, 4강 진출 4회, 8강 진출 5회, 1995년 마스터스 컵 남자 단식 준우승, 테니스 마스터스[9]시리즈 남자 단식은 우승 7회, 준우승 2회, 4강 진출 7회, ATP 투어 남자 단식에선 우승 26회, 준우승 16회를 기록하였다. 이는 굳이 '아시아계'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더라도 테니스 선수로서 엄청난 업적이다. 마이클 창은 아시아계 선수도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증명하였다.

4. 은퇴 이후

2008년에 마이클 창은 겹경사를 맞았는데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여기다 같은 테니스 선수인 앰버 리우그 가수 말고[10]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현재 아내인 리우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두고 있다.

파일:external/static.metropolisjapan.com/1081-cl-nishikori-chang-2.jpg
자신의 후계자인 니시코리 케이와 함께 찍은 사진.

2012년에 대한민국의 레슬링 선수인 심권호와 식사를 하였다.

2014년부터 일본의 테니스 선수인 니시코리 케이의 코치가 되었는데, 마이클 창이 코치를 맡은 후 니시코리의 성적이 한층 상승세를 탄 것을 보면 창의 코칭이 분명 좋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에너자이저 광고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마스코트인 백만돌이와 테니스를 하다 지쳐서 쓰러지자, 지금 뭐하는 거냐면서 다가오는 백만돌이에게 마이클 창이 넌 지치지도 않냐면서 묻자 백만돌이가 자신은 아직도 팔팔하다는 걸 보여주자 창이 그대로 뻗어버리는 내용으로 힘세고 오래가는 건전지라는 걸 강조한 광고였다.

5. 참고 링크



[1] 중국어로는 張德培. 한국식으로 한자를 읽으면 이름이 장덕배이다.[2] 아시아 국가 최초로 그랜드슬램 대회서 우승을 기록한 선수는 리나로, 2011년 프랑스 오픈 / 2014년 호주 오픈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린적이 있다.[3] 역대 최연소 그랜드 슬램 우승[4] 현재는 ATP 파이널스로 명칭 변경.[5] 현재는 ATP 투어 마스터스 1000 시리즈로 명칭 변경.[6] 1978년 설립됐으며 세계 1위 선수만 10여명을 키워냈다. 기본기를 굉장히 중시하는 훈련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7] 80년대 중반 즈음에 거의 백인만 있던 곳에 창은 아마 유일한 동양계였을 테고 여기에 신체조건도 또래 선수들보다 작았으니 외향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웠을 것이다.[8] 실제로 마이클 창은 상술한 선수들 중 짐 쿠리어(12승 12패)를 제외한 모두에게 열세였고(vs 샘프러스 8승 12패, vs 애거시 7승 15, vs 무스터 3승 6패, vs 베커 1승 5패), 결승전에 진출한 95년 프랑스오픈과 96년 호주 & US 오픈 역시 각각 무스터, 베커, 샘프러스에게 패했다.[9] 현재의 ATP 투어 마스터스 1000 시리즈 대회의 2000~2004년 사이의 명칭.[10] 여담으로 엠버도 대만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