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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8 09:48:47

마우솔로스 영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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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fc02.deviantart.net/the_mausoleum_of_halicarnassus_by_pervandr-d3h093q.jpg 복원도[1]

1. 개요2. 설명3. 건설4. 파괴5. 갤러리6. 여담7. 대중 매체에서


Μαυσωλεῖον τῆς Ἁλικαρνασσοῦ (고대 그리스어)
Mausoleum at Halicarnassus
Tomb of Mausolus

1. 개요

할리카르나소스에 내 위로 크기를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어마어마한, 그 어떤 사라진 옛 그림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정교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무덤이 서 있다.
로마의 극작가 루키아노스(Lucianus, 125년 ~ 180년(?))
마우솔로스영묘. 할리카르나소스(현재 튀르키예의 보드룸)에 있던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2. 설명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은 기원전 353년에 튀르키예의 할리카르나소스(Halicarnassus)에 건설된 무덤이다. 45m 높이로 지어졌으며, 각각의 네 면에 스코파스와 같은 당대 저명했던 그리스 조각가가 제작한 부조 조각으로 장식되어져 있었다. 무덤의 상단 부분에는 한 면에 10개씩, 총 36개의 기둥이 각뿔 모양의 지붕을 받치고 있으며, 각각의 기둥 사이에는 조각상으로 장식되어져 있다. 이 거대한 무덤에는 페르시아의 사트라프 마우솔로스와 그의 아내(이자 남매)인 아르테미시아 2세가 안치되었다. 12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있었던 강진으로 인해 붕괴되었다.[2]

특이한 모양과 복잡한 장식, 그리고 거대한 크기 때문에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혔으며, 그 때문에 오늘날 마우솔레움은 무덤 건축을 뜻하는 보통 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관례적으로 '영묘'로 번역되며, 일반적으로 관을 모아 안치한 서양식 봉안당을 일컫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묘 문서 참고.

참고로 이곳의 유물들 상당수가 런던대영박물관에 있다. 유명한 유물로는 그리스인과 아마존족의 전투 장면을 새긴 프리즈와 마우솔로스 상으로 보이는 높이 3m의 조각상 등이 있다.[3]

3. 건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maussolleion_model_dsc02711-miniaturk_nevit.jpg
튀르키예 이스탄불 미니아튀르크(Miniatürk)[4]에 있는 실물 크기의 24분의 1로 축소된 복원 모형.
전설에 따르면 마우솔로스가 죽자 그의 누이 겸 아내인 아르테미시아 2세는 비탄에 잠겨 그를 화장한 재를 포도주에 넣어 마시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겠노라 맹세했으며 본인도 결국 죽은 뒤 이 무덤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건축가는 피티우스(또는 피테오스)였고 4명의 뛰어난 그리스 예술가 스코파스·브리악시스·레오카레스·티모테오스 등이 조각을 맡았다. 로마의 저술가인 대 플리니우스(23년 ~ 79년)에 따르면 이 영묘는 거의 정사각형으로서 그 둘레가 125 m에 이르렀다고 한다. 36개의 기둥이 둘러싸고 있고, 24단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꼭대기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4두 마차가 올려져 있었다고 한다.

건설을 추진한 당사자인 마우솔로스는 공식적으론 소아시아에 있는 페르시아 제국령 카리아의 사트라프였지만, 사실상 군사와 내정권을 모두 장악해서 그 지방에선 왕이나 다름없었다. 마우솔로스는 헬레니즘파였는데, 할리카르나소스로 천도한 뒤 헬레니즘식의 건축물을 많이 건축하였다. 그가 죽기 전 영묘를 건축하기 시작하였으나 완공되기 전에 죽고, 그의 아내 겸 누이였던 아르테미시아 2세가 계속 진행하였으나 영묘는 그녀가 죽은 뒤인 기원전 350년 후반쯤에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4. 파괴

파일:external/3.bp.blogspot.com/bodrum-halicarnassus-mausoleum.jpg

마우솔로스의 영묘는 11세기 ~ 14세기에 지진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이며, 1402년 로도스구호기사단이 할리카르나소스를 점령하기 위해 할리카르나소스에 왔을 때는 이미 기단부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기사단은 자신들이 점령한 할리카르나소스에 성 베드로 요새(페트로니움; 나중에 '보드룸'이라는 지명의 어원이 된다)를 세우면서 영묘의 석재를 요새의 재료로 사용하였고 1494년에 요새를 보수하는데 또 영묘의 석재를 사용했다. 대리석은 가열해 석회로 만들기도 했다. 구호기사단은 자신들이 발견한 영묘의 부조나 조각 일부는 성 베드로 요새에 보관하기도 했는데 1506년 전후 구호기사단의 지휘관 중 한 명은 그리스인과 아마존족의 전투를 보여주는 12장의 프리즈 석판을 남겨 성벽 장식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522년에도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대한 소문이 돌자 성 베드로 요새는 다시 강화되었고 영묘의 석재는 거의 다 떨어져 나갔다.

지상의 마우솔레움 유적이 소멸된 후에도 지하 부분은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었고, 이 곳을 발견한 구호기사단 단원이었던 프랑스 리옹의 클로드 기샤르는 1581년 발간한 책에서 이렇게 적었다.
"여러 방을 연결하는 복도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흰 대리석으로 장식된 무덤을 발견했다. 그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간이 없어 다음날 뚜껑을 열기로 하고 철수했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와서 보니 무덤은 열려 있고 황금 조각이 사방에 떨어져 있었다. 이것들은 우리가 철수한 후 약탈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누군가 밤에 와서 관을 열고 매장품을 도굴했을 것이다. 그 무덤 속에는 엄청난 보물들이 있었을 것이다."
기샤르는 지하를 발굴하다가 큰 발견을 했다고 생각했고 날이 너무 늦어 다음 날 다시 왔는데 그 사이에 도굴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 부부의 시신도 도둑맞았다고 생각했다. 기샤르는 주변인을 의심했는지 자신의 안위 때문에 범인이 누구인지 쓸 수 없다고 기술했다.

19세기에 영국은 성 베드로 요새와 영묘의 잔해 등을 조사 발굴하였고, 프리즈 석판들은 영국박물관에 '아마존 전사들의 전투'라는 이름으로 전시되고 있다. 이때 건물의 벽과 계단식 지붕의 일부를 장식한 부분, 지름이 약 2m인 부서진 석제 전차 조각의 바퀴,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 2세의 동상을 발견했다. 이것을 기초로 하여 많은 복원도가 그려졌으나, 건축물이 정확히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이견이 좀 있다.

1966년과 1977년 사이 덴마크 아루스 대학의 예페센 교수에 의해 영묘에 대한 발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아무래도 기샤르가 오해를 한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애초에 할리카르나소스의 영묘는 십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도굴되어 있었다. 발굴단은 기샤르가 언급한 것으로 보이는 금과 유리 파편들도 발견했다. 그것들은 얇은 금판 장식, 채색 유리, 40여 개의 금판으로 된 장미 등이었다.

당시의 풍습을 고려하면 영묘의 시체는 화장되어 재만 유골 항아리에 보관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5] 기샤르의 기록대로 지하의 석실에 석관이 있었다고 해도 그곳에 시신이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파일:카리아 터키 5.jpg파일:터키 카리아 5.jpg
영묘에서 출토된 원통 용기. 이집트 상형문자크세르크세스 1세가 새겨져 있다.
또한 마우솔로스 영묘에서는 페르시아계 유물들도 다수 출토되었는데, 당시 카리아 왕국은 살라미스 해전 등 그리스와의 전쟁에 있어 페르시아 해군의 중추를 맡아 참전하는 등 페르시아 제국의 주요 제후국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5. 갤러리

파일:마우솔로스 터키9.jpg파일:터키마우솔로스.jpg
영묘에서 발굴된 영묘의 주인공 마우솔로스의 석상.
파일:터키 마우솔로스 1.jpg파일:터키 마우솔로스 11.jpg
1857년 영국박물관에 전시될 때만 해도 이러한 모습이었으나 후일 관리 부실로 일부 파손되었다.

파일:튀르키예 카리아 석상.jpg
누이 겸 부인이던 아르테미시아 2세 석상과 함께

6. 여담

파일:Milas_Gümüşkesen_Mausoleum_in_2007_4836.jpg파일:Reconstruction_Nereid_Monument_BM.jpg

7. 대중 매체에서

시드 마이어의 문명에서는 문명 3에 처음 등장한 이래 문명 6에 이르기까지 "할리카르나수스의 영묘" 라는 이름으로 주욱 등장하고 있다.
[1] 연구자들에 의해 마우솔로스의 영묘에 대한 많은 복원안이 제시되었으며 그중 하나를 묘사한 것.[2] 마지막으로 무너진 고대 7대 불가사의로, 이 영묘의 붕괴로 인해 고대 불가사의는 단 하나, 기자의 대피라미드만 남게 되었다.[3] 또한 위 사진 속 영묘 꼭대기에 있는 말 조각상의 일부가 있는데 박물관 내 뜬금없는 위치에 있다보니 이 유물의 가치를 알아보는 관람객들은 거의 없는듯 하다.[4] 튀르키예 전역에 있는 유명 유적지들의 미니어처를 모아놓은 전시장.[5] 고대사를 보면 페니키아나 그리스 같은 해양 민족은 항아리, 이집트나 히타이트 같은 농경 민족은 관, 스키타이나 이스라엘 같은 유목 민족은 천이나 가죽에 시체를 넣는 경향을 보인다. 즉 해양 민족은 교역품을 보관하는 커다란 도자기, 농경민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 유목민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가죽을 택하는 식으로, 할리카르나소스는 민족이고 문화고 그리스풍이었으므로 유골 항아리에 망자를 집어넣는 건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