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3년 ~ 1605년 또는 1542년 ~ 1612년
1. 개요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2. 생애
마에다 가(前田家)의 양자로 마에다 토시이에의 조카.만화와 파칭코의 인기로 마에다 케이지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람의 이름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케이지이고, 그 밖에도 토시마스[1], 케이지로, 토시오키 등의 이름이 있다. 토시마스라는 이름은 양부와 친부에게서 각각 한 글자씩 딴 이름인데 본인은 케이지나 케이지로 쪽을 더 선호했던 듯하여 친필로 자신의 이름을 적은 서적이 남아있을 때는 대부분 케이지가 아니면 케이지로이다.
당시 일본 기준으로서는 상당한 거구에, 일본 제일의 창술가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만화 꽃의 케이지에는 그의 키가 6척 5촌(197cm)에 달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현존하는 사료에는 그의 체구에 관한 서술이 없다. 남아있는 갑옷 또한 다른 무장들의 것에 비해 대단히 크진 않다고. 어쨌거나 당시 일본인의 평균 신장(155cm[2])을 월등히 웃도는 키이긴 했던 것 같다.
단, 삼촌 토시이에를 골탕[3]먹였다던가 하는 것은 사실인 듯. 그의 애마 마츠카제 역시 마에다 토시이에의 말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화려한 복장과 괴팍한 복장을 즐겼으며 기마술 창술 무예에 능통하나 권력에 관심이 없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낭인 생활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부친은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인 타키가와 카즈마스의 사촌인 타키가와 마쓰우지 혹은 마쓰시게 설이 유력하며, 어느쪽이건 타키가와씨에서 마에다 씨로 양자가 보내진건 거의 정설인 모양. 그 후로는 마에다의 적통으로서 마에다 가의 후계자가 될 터였던 케이지였으나 그러나 노부나가는 병약하여 군무를 치를 수 없는 케이지의 양부인 마에다 토시히사를 끌어내리고 대신하여 동생인 토시이에에게 마에다의 가독을 잇게 하였기 때문에 두 눈 멀쩡히 뜨고 자기 몫을 빼앗기게 되었다. 뭐 굳이 따지고보면 엄연히 남의 핏줄이니만큼 양자로 들어왔다 해서 마에다 가문을 자기 몫이라고 하기엔 좀 어퍠가 있는게 사실이다. 상식적으로 가문 내에서 받아들인 양자도 아니고 다른 팔팔한 가문원이 남아있는 상태라면 "굳이 양자한테?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가 되는게 인지상정이기 때문. 아카호로슈 필두였던 마에다 토시이에가 어디 가서 꿀리는 이름도 아니고.
그런데 토시이에와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는지 토시이에도 케이지가 장성하자 5천석을 주며 사관시켰다. 5천석이면 호대우이기 때문에 친인척간의 관계는 양호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토시이에는 자기가 쫓아낸 형한테도 2천석을 떼어줘서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했다.
마에다 토시이에 휘하의 장수 시절의 케이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워낙에 적어서 알 수 없으나 후에 스카웃 제의가 들어온 것을 보면 장수로서 상당히 이름을 날렸다고 추정된다. 그 후로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4]로 마에다 가를 나와서 쿄(지금의 교토)간다.
교토에서는 가부키모노로 화려한 옷을 입고, 노래하고 춤 추고 시 짓고, 후루타 오리베 등의 문화인과도 교류했다. 그리고 이 시기 교토에 체류하던 나오에 카네츠구와도 어울리게 된다.[5] 카네츠구도 절에서 승려에게 시가를 배울만큼 문학을 좋아했다.
그렇게 낭인으로 지내다 나오에 카네츠구의 권유로 우에스기 가문에 사관하였다.[6]
우에스기 집안에 처음 들어갔을 때, 자신의 기인에 '다이후헨모노'(大ふへん物 : 후헨을 히라가나로 씀)라고 썼는데, 일본어 발음 상 다이후헨모노는 즉, 대무변자. 싸움을 무지 잘한다는 뜻으로 비춰진다. 그래서 우에스기의 가신들이 '다른 집안에서라면 몰라도 무문의 명문인 우에스기에서 대무변자를 칭하다니 건방지다'라고 나무라자, 케이지가 가볍게 웃어넘기면서 시골무사라서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이냐며 깔보면서 '다이후헨모노'는 '대불편자'라는 뜻으로, 내가 가난해서 생활이 불편해서 그리 썼다고 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우에스기 가문은 아이즈 영지에서 동군의 다테/모가미 연합군을 맞아 싸웠는데, 마에다 케이지가 '우리가 지면 머리를 빡빡 밀겠다.'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세키가하라 현지에서 서군이 대패하여 우에스기 군도 철수하게 되었으므로 이후 머리를 빡빡밀고 중이 되어 '횻토사이'[7]라고 칭하였다.
당시로서는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인물로, 세키가하라 패전후 우에스기 가문이 전봉될 때, 나오에 카네츠구가 '자신의 10분의 1정도의 녹봉 밖에 못주는데도 오겠는가.'라고 하자, '더 이상은 깎지마라.'라는 농담으로 응수하며 함께 전봉했다[8]
그리고 뜻밖에 문예에도 뛰어난 모습을 보였는데 당시 글을 모르던 무사가 태반[9]이던 전국시대에서도 자신의 저서, 그것도 병법서가 아닌 문예집을 남긴 보기 드문 케이스. 1601년 10월 15일 교토에서 출발하여 11월 19일 요네자와에 도착하기까지의 일정을 기록한 마에다 케이지 여행 중 일기는 간략하게나마 당시의 풍속을 서술하고 있다. 또한 간간히 마에다 케이지의 자작 단시 및 단가가 수록되어 있어, 전국시대의 문예사료로 높게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과장될지언정 실제 사료에서도 보여주는 무예와 문예, 그리고 자유분방한 점 등에서 그의 캐릭터가 전국시대 내에서도 상당히 독특하고 매력적인 것은 분명하다.
과거에 사실은 조선인이라는 루머가 퍼진 적이 있는데 이는 마에다 케이지를 다룬 만화인 꽃의 케이지를 국내에 들여왔던 해적판 출판사에서 이 만화를 일본을 배경으로 한 조선인의 이야기로 왜곡해 버린 데서 기인한 루머고 역사적으로는 전혀 근거 없는 소리다.
이 꽃의 케이지에서는 최종 병기 살육 머신의 성능으로 나왔다. 다분히 일본적인 사무라이 타입으로 진정한 무사를 추구하는 구 일본 만화의 영향을 그대로 받은 것 같다. 게다가 하는 짓은 유머는 있지만 주변 인물들을 엿먹이는데 특화된 인물로 자신의 삼촌 뻘인 마에다 토시이에가 보는 앞에서 상투를 비스듬히 매고 나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절을 하는데….
상투 방향으로는 분명히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는데 얼굴을 슬쩍 외면하는 자세를 보이는 등 주변 인물들이 경악할 짓을 하질 않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앞에서 원숭이 춤을 선보이고 그걸 또 용서받는 여러가지 의미로 최종병기로 나온다. 그것은 약과로 다테 마사무네에게 싸닥션까지 시전했다. 그러고도 무사했다.
대표적인 명대사는 당시 야생마였던 그의 애마(마츠카제-松風-란 이름으로 나중에 불리운다.)를 처음 보고 했던 "너 정말 멋지구나. 너처럼 멋진 녀석 본 적이 없어." 이 장면은 흔치는 않지만 곳곳에서 패러디되곤 한다.
참고로 어느 매체에서건 축제 때 가마에서 돈을 뿌리는 장면은 꼭 등장한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준 포상금을 축제 때 뿌린 일화에서 유래하였다고.[10]
사실 이 양반은 워낙에 불분명한 점이 많은 지라 대부분의 정보는 여기 저기서 단편적으로 남아있던 것을 짜집기한 것이라 진위성은 매우 낮은 편이다. 실제로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11] 어쨌거나 그가 늙어서 은퇴했을 무렵에는 이미 전국시대는 끝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고 큰 전투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에 방 안에서 자리에 누워 죽은 것만은 확실하다. 사인은 노쇠내지는 병이라고 생각된다.
대중매체에서는 언제까지나 젊지만 사실 우에스기에 사관했을 때는 벌서 환갑의 나이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랑 동갑이고, 마에다 가를 뛰쳐나왔을 때는 처자식까지 딸린 몸이었다.
마에다 토시이에에 의하면 '언제나 남을 깔보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고 하며 실제로도 이걸 증명하는 일화는 다수 남아있다. 한 편으로는 다정한 측면도 있었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일화로서 조선인 몸종을 세 명 데리고 다녔는데 이들을 몹시 아껴서 한 명이 병이 들자 요양할 수 있도록 서신을 들러보내고 이별을 아쉬워하는 노래까지 지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매우 장난을 좋아했던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수행하며 에도로 갔을 때 목욕탕에 들어가면서 훈도시에 와키자시를 차고 들어갔는데 이를 본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와키자시를 차고 들어갔다. 곧 케이지로는 욕탕에서 나온 후에 그 칼로 자신의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사실 케이지로가 차고 들어간 것은 칼이 아니라 대나무로 된 때주걱이었으며 당연히 진짜 칼을 차고 들어간 사람들의 칼자루는 젖고 쇠에 습기가 차고 말았다고 한다.
3. 대중문화 속 마에다 케이지
3.1. 꽃의 케이지
서브 컬쳐계의 케이지의 이미지는 대부분 이 만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꽃의 케이지 참고.3.2. 전국무쌍 시리즈
마에다 케이지(전국무쌍) 참고.3.3. 전국 바사라 시리즈
마에다 케이지(전국 바사라) 참고.3.4. 슈팅 게임 바사라2
토시이에 스테이지의 3번째 중간 보스. 게임중 가장 먼저 삼지창을 든 로봇 형태 적을 몰고 나온다.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탄을 2겹으로 뿌린 뒤, 플레이어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다가 플레이어와 마지막으로 마주친 곳을 창으로 냅다 찌른다. 피하기는 어렵지 않으니 잘 보고 피하면 된다.
3.5.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노부나가의 야망 신생 |
무력만큼은 가히 삼국지 시리즈의 장비나 여포 수준. 병사를 이끈 장수가 아니라 혼자 날뛰던 걸 반영해서인지 통솔과 지력도 낮다.[12] 위에 언급되어 있듯 케이지 본인은 글을 알고 문예에도 재능이 있는 등 멧돼지가 아니었던 건 분명하나, 게임상에서의 지력은 각종 모략이나 전투에서의 전술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어쩔 수 없긴 하다. 게다가 코에이 정책의 희생자이기도 한데 코에이의 장수 능력치 설정 정책은 철저하게 문무겸비를 배제하는 방향이기 때문에 한쪽이 월등하면 다른 한쪽은 어지간하면 허약하게 만든다. 실제로도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와 삼국지 시리즈의 그 몇천 명이나 되는 무수히 많은 장수들 중에서 무력과 정치가 같이 80을 넘는 장수는 등애, 도쿠가와 이에야스, 징기스칸 단 셋 뿐이다. 대신 교양이 존재하는 무장풍운록, 천하창세 등의 시리즈에서는 그 점을 고려해 70대 이상의 높은 교양수치를 자랑한다.
소속은 대개 마에다 토시이에를 따라다니되,[13] 세키가하라 전투 근처 시나리오에서는 로닌이거나 우에스기 카게카츠 소속으로 나온다. 그 때문에 초반 시나리오에서는 오다 가에 드문 기병계통 무장으로 쓰이게 된다.
통솔 개념이 있는 시리즈에서는 통솔이 낮게 나오지만, 없는 시리즈에서는 무용만 높게 나와 상대적으로 쓰기 좋아진다. 마치 무술가와 같은 포지션. 교양이란 능력치가 있는 천하창세에서는 무력 · 교양이 다 높아 전투뿐만 아니라 외교에서도 활약할 수 있었다.
열풍전에서는 기마적성 S에 아이템 보정을 받아서 무력 100이지만 정치는 꼴랑 2다. 특이하게 전용 이벤트가 몇개 있는데 다이묘에게 장난을 거는 이벤트다.
발동 조건은 다이묘가 우에스기나 나오에가 아니며 바둑이벤트는 다이묘에게 바둑을 두자고 해서 처음에는 일부러 져주고, 그 다음에 제대로 두면서 다이묘에게 이기는 건 불충이다라고 이야기 하고 다이묘가 봐주는 건 없다 하니까 바로 바둑을 이겨 버린다.
욕조 이벤트는 다이묘에게 목욕 물을 받아 놓았다고 하는데 막상 들어가면 찬물인 이벤트다.
두 이벤트 모두 다이묘가 바둑을 같이 두거나 목욕물에 들어간다고 하면 발동되면서 마에다는 이벤트 후 낭인(삼국지로 말하면 재야)이 되어 버린다. 마에다를 낭인으로 만들고 싶지 않으면, 이벤트를 걸어올 때 승낙하면 안된다. 문제는 거절해도 은근히 계속 이벤트를 몇번이고 걸어온다.
이벤트를 거절하면 들켰는가? 라고 대사를 친다.혁신에서는 무력 110으로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에 이어 2위이다.
천도에서는 96으로 대폭 너프당해 20위권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렇다고 다른 능력치들이 오른 것도 아니다. 그래도 기마적성이 S에 특기가 질주이라서 부장용으로 쓸만하다.
창조에서는 최강의 전투 특성인 가부키모노를 탑재하고 있다. 가부키모노 특성은 전투력 상승 그 자체로만 보자면 군신도 씹어먹을 수 있는 강력한 특기로서 상대의 능력치가 대등하더라도 두배 병력은 가볍게 씹어먹을 수 있는 사기 특성이다. 일단 발동하게 되면 조작이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발동되지 않은 상태를 보는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본인의 능력치가 저 사기 특성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생각보다 부실하기 때문에 좀 더 나은 효과를 보려면 성장에 좋은 특성인 '여록'을 보유하고 있으니 전투에 지속적으로 써먹으면서 성장시켜 주는 것이 좋다. 전법은 개인 강화 및 주변의 적 전부를 도발시켜 끌어오는 효과로 케이지가 애용했다고 전해 내려오는 창의 이름을 갖다 붙인 '개주창'. 실질적으로는 가토나 코지마의 그것보다 상위호환인 셈이다. 개주창 사용 후 적들이 케이지에게 붙는 와중에 가부키모노라도 터지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노부나가의 야망 ds 2에서는 전투 98''을 찍는다! 게다가 전투는 시마즈 요시히로, 다케다 신겐도 (둘다 전투97) 뛰어넘는다! 그래서 전투에 자주 데리고 나가면 금방 전투 100이 되므로 우에스기 켄신과 막상막하로 맞장뜰 수 있다. 근데 문제는 정치가 꼴랑 1'''인지라 정치 낮은 장수에게 잘 걸리는 계략에 손 쉽게 걸린다.
예를 들어 몇 턴간 못 움직이는 혼란이 있고, 게다가 '발동 시 무조건 정치가 낮은 적군 1부대를 퇴각시키는' 전술(만약 성주의 정치가 적군 장수보다 낮으면 실패. 대신 사기를 내림)이 있는데 마에다 케이지는 정치 1이라서 발동 즉시 무조건 퇴각해버린다. 그래서 전투 빼곤 시마즈 요시히로를 못 뛰어넘는다.[14][15]
대지에서는 꽃의 케이지를 반영해서인지 일러스트가 묘하게 켄시로와 비슷하게 생겼다.
삼국지 12에서도 등장하는데... 역시 우에스기 세력에 있다. 노부나가의 야망에 비해서 통솔력이 74으로 상승되었다. 그러나 전법이 맹공이지만 지력이 36이라서 기교연구 셔틀이거나 백도어용으로 쓸만하다.
태합입지전에도 등장하는데, 보통 신분일 때는 가부키모노의 복장을 하고 있고 상위 신분이 되면 일러스트가 변하나 눈화장은 지우지 않는다.
5에서의 능력치는 62/88/2/51/95로 싸움귀신 느낌. 통솔이 62면 아주 낮은 수준은 아니고 삼촌 따라 칭호 창명인(부가무력+6)을 달고 나오기 때문에 실질 무력은 94. 전투관련 기능도 좋아서 전투에선 굴리자면 충분히 굴릴 수 있는데 군학이 0이라 막상 전투적성이 좋아서 이런 저런 특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특기수 제한이 걸려서 몇개 쓸수가 없고 분투같은 버프를 걸어줘도 지속시간이 짧으니 두턴 지나면 바로 풀려버린다.직접 플레이 하는 경우라면 군학을 배우면 그만이겠지만. 정무2에서 보듯이 내정쪽은 기술도 전무해서 부하로 놓고 굴릴땐 내정은 없는셈 쳐야한다. 거의 멍청이 수준이다. 특별한 이벤트는 없지만 1598년 태평의 장 플레이시 이름을 바꾸는 이벤트가 있다. 기회는 한 번 뿐이며 선택에 따라 위에 나온대로 코쿠조인 횻토사이로 개명하여 플레이 가능.
3.6. 전국 컬렉션
장신의 어리숙한 편의점 직원으로 등장. 밤에는 마츠카제라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악당들을 소탕하는 일을 하고 있다. 키가 컸던 것, 애마인 마츠카제 등을 반영하였다. 자세한 것은 전국 컬렉션/등장인물 참고.3.7. 귀무자 시리즈
1편과 무뢰전에서 등장. 1편에서는 유메마루라는 이름의 꼬마로 등장한다. 무뢰전에서 성장한 모습으로 마에다 케이지로라는 이름으로 나오지만, 무뢰전이 흥행에 실패한지라 마에다 케이지의 등장사실 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다.3.8. 냥코 대전쟁
문서 참고.[1] 요네자와에서 우에스기가에 의탁하여 지낼때 썼던 이름으로, 이 시절 '토시마스'라고 새긴 표주박이 지금도 남아있다.[2] 출처[3] 대표적으로 목욕탕 사건을 들 수 있다. 고리타분한 토시이에와 맞지 않던 그는 떠나기 전에 토시이에를 골탕먹이기로 결심하고 다회를 연다며 토시이에를 초대하였다. '이제야 이 아이가 마음을 고쳐먹은 모양이다'라며 기꺼이 응하며 추운 겨울에 조카의 집에 온 토시이에는 조카인 케이지로로부터 '날씨가 추울 테니 따뜻한 물로 목욕하도록 하세요'라며 욕실로 초대했다. 그러나 목욕탕은 찬물로 가득 차있고 주변에 뜨거운 물이 담긴 그릇을 여러개 배치하여 뜨거운 김이 욕실에 가득 찬 상태였다. 이 사실을 몰랐던 토시이에는 물로 풍덩 뛰어들었고 이윽고 토시이에는 "이놈, 케이지로!"하고 소리쳤으나 이를 무시한 케이지로는 애마인 마츠카제를 타고 그 집을 떠났다고 한다.[4] 일설에 따르면 토시이에와의 불화가 원인이었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정말로 불화가 원인이었다면 자신의 가족을 마에다 가에 남겨두고 뛰쳐나왔을리도 없기에 알 수 없는 일이다.[5] 둘은 1597년 난카 겐코우라는 승려의 소개로 묘우신사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6]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교토에서 여러 영주들을 모아 연회를 열었을 때 마에다가 원숭이 가면을 쓰고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나란히 앉아 있는 영주들 근처로 가서 원숭이 흉내를 내는 등 분위기를 돋궜는데 유일하게 우에스기 카게카츠 앞에선 그 위풍과 의연함 때문에 감히 춤을 출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후에 그 당시를 회상하며 '천하가 넓다고 해도 내가 진정으로 섬길 사람은 아이즈의 카게카츠 님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7] 말장난이다. 일본어로 忽之라고 쓰는데 이 횻토사이란 말 자체가 飄가 되어 '떠돌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자신의 본성을 숨길 생각이 요만큼도 없다는 뜻이다.[8] 이게 단순한 위트나 유머라고 보기에는 실제 상황은 제법 무거웠다. 우에스기 가문으로 전봉할 당시 케이지의 녹봉은 2천석이었다. 지방 영주가 파견한 마을의 관리만도 못한 봉록이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케이지 본인이 위에 서술했듯이 마에다 가문에서 5천석의 호대우를 받고 사관한 적이 있었고 다른 영주들 역시 그보다는 더 높은 녹봉으로 고용하려 했기에 우에스기의 이러한 제안은 무사들에게 있어서는 무례하기까지 한 사관제안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우에스기 가문으로선 세키가하라 패전 이후 그 거대한 아이즈번 120만 석에서 북쪽 끝에 쬐깐하게 붙어있는 요네자와 30만 석으로 강등당한 마당에 우에스기 가문의 원칙상 자기 가신들을 내치지 못해 줄일걸 전부 다 줄이는 상황에서 카네츠구가 케이지를 불러들이자니 더 이상 녹봉을 주겠다고 장담도 못할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 이러한 제안을 케이지는 저런 농담이나 하며 군소리없이 받아들인 것이다.[9]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차 자신의 이름자나 겨우 쓸 정도였다 말할 정도이니 당시 학문의 경시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수 있다. 당시 지식인들은 승려와 병법가들로 케이지의 경우 이러한 이들과 상당한 친분이 있어 이러한 점에서도 러브콜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10] 이와 비슷한 일화가 가모 우지사토의 가신 오카 사나이에게도 전해진다.[11] 몇 가지 설은 있는데 정확하게 증명된 바는 없다.[12] 참고로 노부나가의 야망 DS2에서는 혼다 타다카츠와 함께 정치가 꼴랑 1이라는 충격과 공포의 내정능력을 자랑한다.[13] 천하창세에서는 시나리오 5에서는 타키가와 카즈마스소속으로 나온다.[14] 시마즈 요시히로는 정치 71인지라 웬만하면 저 전술에 잘 안 퇴각한다.[15] 참고로 요 퇴각 전술로 인한 피해를 줄이려면 먼저 부대 편성에서 정치 듣보잡인(40~50대 정도) 무장 1명을 고른 뒤에 출진시키면 전술 발동 시 얘만 후퇴한다. 그럼 만사형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