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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5 01:07:27

류추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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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 劉粹剛
간체 刘粹刚
일본어 표기 劉粋剛
한국식 독음 유수강
영문 Liu Cuigang
생몰년도 1913년 2월 4일 ~ 1937년 10월 26일
출생지 중화민국 랴오닝성 창투현(昌圖縣)
중국 랴오닝성 창투현
사망지 중화민국 산시성(山西省) 가오핑현(高平縣)
現 중국 산시성 가오핑시(高平市)
묘소 중국 장쑤성 난징시 쉬안우구(玄武区)
항공열사공묘(航空烈士公墓)
복무 중화민국 공군
제1항공구축대대
(第一航空驅逐大隊)
제5항공구축대대 제24중대
(第五航空驅逐大隊第二十四隊)
최종계급 대위소령(추서)

1. 개요2. 생애3. 중일전쟁 당시의 활약상4. 최후5. 기타6. 격추수7.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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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일전쟁 당시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공군 소속 조종사로, 중일전쟁 당시 중국 공군 내 최다 격추기록을 보유한 조종사. 최종 계급은 대위, 사후 추서된 계급은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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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부터 웨이친, 가오즈항, 류추이강, 리구이단. 이미지 출처

그와 함께 에이스로 불리었던 중화민국의 조종사들인 가오즈항(高志航), 웨이친(樂以琴), 리구이단(李桂丹)과 함께 사대금강(四大金剛), 사대천왕(四大天王)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랴오닝성 창투현(昌圖縣)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심양에 있는 랴오닝 지방 최초의 공업학교인 랴오닝성립제일공과학교(遼寧省立第一工科學校)에 입학했다.

그러나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오른 뒤 군입대를 결심하여 난징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에 보병과 9기생으로 합격했고, 1932년에는 중앙항공학교(中央航空學校) 2기생으로 합격하여 항공기 조작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후 1934년 12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항공학교를 졸업하여 중국 공군 1대대에 준위 계급으로 견습사관으로서 부임하였고, 1936년에는 난창 (南昌)에 주둔한 중국 공군 제 5대대 24중대장의 자리에 올라 24중대원들의 훈련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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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추이강의 전용기 커티스 BF2C 고스호크 III 2401호기. 이미지 출처

당시 24중대에 배치되어있던 항공기미국에서 수입한 커티스 BF2C 고스호크 III(Curtiss BF2C Goshawk) 전폭기로, 류추이강의 전용기 2401호기는 실린더를 늘려 출력을 강화한 개조기로 알려져있다.

3. 중일전쟁 당시의 활약상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인 1937년 8월 3일, 공군 제 5대대에 소속된 24중대와 25중대는 난창에서 양저우로 이동명령을 받고 8월 4일 양저우에 도착하였는데, 당시에 식량이 제대로 도착하지 않아 류추이강이 직접 따빙(大餠)과 유조(油條)[1]등의 식량을 구해 왔으나 음식이 몸에 맞지 않았는지 이것을 먹은 대원들 중 몇몇이 복통설사에 시달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제2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하고, 8월 13일 일본 해군이 상하이의 중화민국 공군에 대한 공격을 가하자 중화민국도 반격을 준비하고 다음날인 14일, 비가 오는 시야가 흐린 날에 폭탄을 장착한 제 5대대 소속의 커티스 호크 III 18기가 상하이로 출격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편대는 일본군 구축함 행렬에 폭탄을 투하했으나 모두 빗나가던 와중에 류추이강의 기체가 투하한 폭탄이 구축함 한 척의 함미에 명중했다. 폭격당한 구축함은 불이 붙은 채로 대피하였고, 류추이강은 양저우로 돌아가 재보급을 받은 뒤 다시 상하이로 출격해 일본군 함선과 일본군 육전대 사령부를 폭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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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식 수상정찰기를 격추시키는 류추이강의 커티스 호크 III 2401호기를 묘사한 그림. 이미지 출처

이틀 뒤인 8월 16일, 류추이강은 첫번째 개인 격추기록으로 일본군의 95식 수상정찰기 한 기를 격추시켰다.

8월 21일 새벽, 요시다 소대의 96식 육상공격기 3기, 이루마 소대의 96식 육상공격기 3기. 합산 6기의 일본군 항공기가 양저우 기지를 기습하였으나 출격 준비중이던 중국 공군 5대대원들이 반격을 위해 출격하였다. 류추이강은 기총사격으로 96식 육공 1기를 격추시키고 아군기와 협공하여 일본군 항공기들을 전멸시켰으며, 이 전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류추이강을 비롯한 출격했던 대원들은 비장군(飛長軍)이라 불렸다고 한다.

9월 7일에는 장쑤 성저장 성 경계에 위치한 호수인 타이호(太湖) 상공에서 류추이강은 일본 해군항공모함 카가호쇼에서 발진한 함상전투기 90여기의 편대와 마주하게 되는데, 류추이강은 지상 폭격 중이던 6기의 아군기들을 엄호하기 위해 단독으로 적기 편대의 뒤에 붙어 급강하와 급상승을 반복해 96식 함상폭격기 한 기를 격추시키고 다른 몇대의 전투기들을 명중시킨 뒤 퇴각하였다는 일화가 있으나, 호쇼의 전투일지가 분실되고 카가의 일지에도 이 일화가 간략하게만 남아있어 정확하게는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

9월 22일 벌어진 난징 항공전에서는 일본군의 96식 함상폭격기 12기와 96식 함상전투기 5기에 맞서 중화민국의 커티스 호크 III 21기가 출격하였고, 류추이강이 이끄는 9기는 시로쓰오 사다오(白相定夫) 대위가 지휘하던 편대를 공격하였다. 지휘관기를 노린 류추이강의 기총사격은 일본측 자료에 따르면 3소대 3번기, 소메야 이치(染矢一) 군조의 탑승기라고 하는 96식 함상폭격기에 명중했고, 명중당한 기체는 폭발하여 서하산(栖霞山) 중턱에 그 잔해가 추락했다.

이후 9월 말경에 류추이강의 격추수는 11기, 미확인 격추수까지 합할 시 13기가 되어 중국 공군의 명실상부한 에이스가 되었고, 이에 대한 공로로 국민당 정부 중앙 항공위원회에게서 칠성성서훈장(七星星序奬章)을, 중국 공군 총사령부에서 2등선위훈장(二等宣威奬章)을 받았다고 한다.

4. 최후

10월 경부터 화북지역에서 나타난 새로운 적인 일본 육군 비행 2대대(飛行第2大隊)를 상대하기 위해 류추이강은 화베이 지방 타이위안 방면으로 파견명령을 받았고, 10월 26일 아군기 5대와 함께 난징을 출발해 한커우와 뤄양을 거쳐 타이위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타이위안에 도착하기도 전에 해가 져 주위가 어두워지자 아군기들이 흩어져 버렸고, 양쯔강 이북 지역에서 비행해 본적이 없는 류추이강은 연료가 떨어져가는 상황에서 착륙할 수 있는 비행장을 찾아 가오핑 상공까지 도달했는데, 류추이강의 기체를 연락기가 온 것으로 오인한 촌장이 착륙을 유도하기 위해 3층 누각 괴성루에 불을 밝혔고, 불빛을 본 류추이강은 괴성루의 불을 따라 비상착륙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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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성루에 충돌한 류추이강의 커티스 호크 III 2401호기. 이미지 출처

그러나 어둠 속에서 성루의 누각을 발견하지 못한 류추이강의 커티스 호크 III 2401호기는 괴성루 3층에 충돌했고, 류추이강은 그 자리에서 대위 계급, 2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 뒤 류추이강의 시신은 11월 16일 난징에 도착하여 장례가 치러졌고, 소령 계급에 추서되었으며 이후 적금산 기슭에 건립된 항공열사묘에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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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열사묘에 있는 류추이강의 무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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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추이강의 아내 수시린(許希麟)

류추이강의 사망소식을 들은 그의 아내 수시린은 그의 죽음에 비통해하며 36개의 동전을 삼켜 자살을 시도했으나 가족들에 의해 급히 병원으로 옮겨져 만류되었다고 하며, 류추이강은 난징에 배치되었을 때에도 항저우에 있는 수시린에게 꾸준히 편지를 보내는 등, 둘의 사이는 매우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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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추이강이 수시린에게 보낸 편지.

6. 격추수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참전한 1937년 8월부터 사고사하게 되는 10월까지, 2개월 동안 단독으로 약 13기 이상의 적기를 격추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이것은 중일전쟁 당시 중화민국군 항공기 조종사들의 격추기록 중 최다 격추기록이다.[3]

아래의 표는 바이두 백과 刘粋刚 문서에 기재된 표에 일본어 위키피디아劉粋剛 문서에 기재된 사례를 합친 표이다.
날짜장소기종격추 대수
1937년 8월 16일상하이95식 함상 정찰기1기
1937년 8월 17일상하이폭격기1기
1937년 8월 20일상하이전투기1기
양쯔강 하구 함상정찰기1기
1937년 8월 21일양저우96식 육상공격기1기
1937년 8월 23일우송전투기1기
1937년 9월 7일타이호96식 함상폭격기1기
1937년 9월 17일상하이전투기1기
1937년 9월 20일난징폭격기2기
1937년 9월 22일난징96식 함상폭격기 외 1기총 2기
1937년 10월 6일난징전투기1기
1937년 10월 12일난징전투기1기

7. 참고 문헌



[1] 따빙은 밀가루를 넓게 펴 구운 중국의 빵이며, 유조는 밀가루를 튀겨 만든 빵이다.[2] 기존 문서엔 류추이강 사망 당시 36세라 적혀 있었으나 실제로는 수시린이 2살 연하이다. 수시린의 원래 직업은 초등학교 교육자로 류추이강이 기차역에서 보고 첫 눈에 반해 끈질기게 구애 한 끝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류추이강이 전사 한 이후엔 경력을 살려 공군 전사자 유가족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 운영하였으며 이 후 다른 공군 파일럿과 재혼을 해 딸 하나를 두었다고 한다. 1948년 국부천대 때 대만으로 이주를 했다.[3] 다만 중화민국이 공식적으로 최다 격추기록으로 인정한 것은 류치셩의 12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