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루이조제프 드 몽캄Louis-Joseph de Montcalm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장군. 생베란 후작. 7년 전쟁의 전역들 중 하나인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대활약한 명장이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몽캄은 1712년 2월 29일 프랑스 가르 주의 주도이자 남부 론 강 하류에 위치한 도시인 님(Nîmes)에서 명문 귀족 가문의 자제로 태어났다. 몽캄은 1718년 6살에 할아버지에게 길려지며 라틴어, 그리스어, 그리고 역사를 공부했으며 울타리를 설치하고 말을 타는 법도 배웠다. 몽캄은 수많은 서적을 탐독했고 "명예, 도덕, 용기, 그리고 진실한 기독교 신앙을 갖춘 인간"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721년, 몽캄은 9살에 군대에 입대했고 1727년에 에노 연대의 소위가 되었다.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몽캄은 라인 강 방면군에 배속되었고 켈 포위전(1733년)과 필립스부르크 포위전(1734년)에 참가했다. 1735년 몽캄은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상당한 토지를 상속받았으나 동시에 막대한 양의 빚까지 물려받아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이때 몽캄이 속한 생베란 후작 가문과 가까운 사이였던 데 라 파레 후작이 몽캄을 도와주기 위해 유력 가문의 여식과의 혼인을 주선해줬다. 이리하여 1736년 몽캄은 마드무아젤 앙젤리크 루이 탈론 뒤 불레이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몽캄에게 막대한 재산을 확보해줬다. 앙젤리크는 열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 중 두 아들과 네 딸만이 1752년까지 생존했다.
1741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몽캄은 프랑스군의 보헤미아 전역에 참여하여 자신을 후원해 준 데 라 파레 후작의 참모로 배속되었다. 이듬해 프랑스로 돌아왔고 1743년 3월 7일 오세루아 연대의 대령이 되었다. 1745년, 몽캄은 마일부아 백작 이브 마리 데마레 휘하에 들어가 이탈리아에서 복무했고, 1746년 피아첸차 요새 공방전에 참가해 자신의 연대를 이끌고 두 번에 걸친 공격을 개시했다가 적군의 군도에 다섯 번이나 상처를 입고[1] 포로가 되었다.
1747년 가석방된 몽캄은 프랑스로 돌아와 준장으로 진급했다. 몽캄은 이탈리아에 주둔한 프랑스군에 재입대하여 그해 7월 아시에트 전투에 참가했다. 또한 같은 해 프랑스군이 엑사일 전투에서 참패했을 때 적군에 맞서 용감히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1749년, 몽캄은 몽캄 기병 연대의 대령이 되었다. 그렇게 유럽에서의 전쟁에서 군 경력을 쌓아가던 몽캄은 몇년 후 캐나다로 떠났다.
2.2. 프랜치-인디언 전쟁의 명장
1755년 11월 파리를 망문한 다르장송 장관은 몽캄이 아메리카 식민지에 있는 프랑스 군대를 지휘하는 임무를 맡을 수도 있음을 알려줬다. 그리고 1756년 1월 25일, 다르장송 장관은 몽캄에게 정식으로 북미 식민지 프랑스군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음을 알렸다. 이에 몽캄은 3월 15일 브레스트로 출발했고 4월 3일 브레스트에서 프리깃함 Licorne에 탑승해 북미 식민지로 떠났다. 5월 11일 퀘벡에 도착한 몽캄은 즉시 카리용 요새, 프롱트나크 요새, 그리고 나이아가라 요새에 군대를 파견해 퀘벡의 수비를 강화했다.그 후 온타리오 호에 있는 오스위고 요새를 공략하는 작전을 구상한 몽캄은 1756년 8월 10일부터 14일까지 요새를 포위 공격해 함락시켰다. 또한 몽캄은 오스위고 요새를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하던 2개의 요새(온타리오 요새와 조지 요새)도 파괴한 뒤 8월 21일 몬트리올로 돌아갔다. 1757년 봄, 몽캄은 대부분의 병력을 카리용 요새에 집결시킨 뒤 7월 29일 조지 호수 근처에 있는 윌리엄 헨리 요새로 진격했다. 이후 몽캄은 8월 4일부터 9일까지 윌리엄 헨리 요새를 포위 공격한 끝에 요새 수비대로부터 뉴잉글랜드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조건하에 항복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전투가 끝난 뒤 일부 인디언들이 요새를 떠나는 영국군을 공격해 여러 병사들을 살해했다. 몽캄은 이 인디언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세인의 비판을 받았다.
윌리엄 헨리 요새를 함락시키고 철저하게 파괴한 몽캄은 영국군이 카리용 요새로 쳐들어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6월 25일부터 요새 앞 약 1km 지점에 거대한 토루 공사를 실시했다. 영국군은 몽캄의 예상대로 윌리언 헨리 요새 함락에 보복하고 퀘벡으로 진군할 길을 열기 위해 제임스 에버크롬비 장군 휘하 16,0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7월 8일, 몽캄은 3,6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5배에 가까운 적을 상대로 카리용 요새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에서 몽캄이 설치해둔 장애물이 큰 효과를 발휘해 영국군의 진격을 저해시켰고, 적의 진지를 포격할 생각도 하지 않고 병사들을 고지로 축차투입시키는 짓을 저지른 에버크롬비 장군의 무능한 지휘력 덕분에 프랑스군이 완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몽캄의 프랑스군 사상자는 372명인 반면 영국군은 1,944명에 달했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영국군은 요새 공략을 포기하고 도주했다. 이 카리용 요새 전투는 몽캄이 거둔 가장 큰 승리였다.
1759년 루이스버그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은 북미 프랑스 식민지의 심장부인 퀘벡을 향한 상륙 작전을 개시했다. 몽캄은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 맞서 7월부터 9월 중순까지 저항했다. 특히 7월 31일 보포르 전투에서는 보포르 해안에 상륙한 제임스 울프 장군 휘하 영국군을 요격해 443명의 사상자를 입히는 승리를 거두었다.[2] 그러나 제임스 울프 장군은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퀘벡을 공략할 방안을 물색했다. 그로부터 한달 후인 9월 중순, 양측은 퀘벡의 패권을 건 대결을 벌인다.
2.3. 최후
9월 12일, 제임스 울프는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 장군의 휘하 부대에서 탈영한 두 명의 프랑스 병사들로부터 프랑스 보급선이 다음 썰물 때 세인트로렌스 강을 따라 내려가 퀘벡 시에 물자를 공급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울프는 이를 호기로 여기고 자신이 먼저 세인트로렌스 강을 따라 내려가서 프랑스 보급함을 가장한 채 랑세-오-포울롱에 상륙한 뒤 방심한 적을 습격하기로 결심했다. 그날 밤, 울프의 소함대는 강을 따라 랑세-오-포울롱으로 나아가 4,400명의 병사들을 상륙시켰고, 영국군은 수비대의 저항을 가볍게 물리친 뒤 9월 13일 아침에 52m에 달하는 가파른 절벽을 기어 올라가 아브라함 평원에 자리를 잡았다.한편 몽캄은 영국 함대가 요새를 향해 포격을 퍼붓는 것에 대처하느라 분주했기에 영국군이 퀘벡 서쪽의 아브라함 평원에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몽캄은 급히 병사들을 수습하여 영국군을 아브라함 평원에서 몰아내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아브라함 평원 전투). 그러나 작전은 실패했고, 몽캄은 흩어지는 병사들을 수습하던 중 한 총탄이 가슴을 꿰뚫는 치명상을 입는다. 이에 병사 2명이 말에서 떨어지려는 몽캄을 부축한 후 성 루이 성문을 통과해 퀘벡 시로 들어갔다. 몽캄은 외과의사 아르누의 집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회생 불가 파정을 받고 9월 14일 아침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47세.
2.4. 미디어에서
소설과 영화 모히칸족의 최후에서 프랑스군의 장군으로 나온다.어쌔신 크리드 로그에서는 몽캄 본인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주인공 셰이 패트릭 코맥의 후견인인 조지 먼로 대령과의 윌리엄 헨리 요새에서의 전투 이야기가 다뤄지면서 그의 이름이 언급된다. 영국군이 항복했음에도 프랑스군 측의 동맹군이었던 인디언 부족 아베나키족이 계속해서 영국군을 공격하는것을 통제하지 못하여 주인공 코맥에게 프랑스 개구리라고 비난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먼로 대령은 몽캄 후작 본인은 신사적이었다고 변호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