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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0 04:29:05

제임스 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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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울프
James Wolfe
파일:800px-James_Wolfe.jpg
출생 1727년 1월 2일
잉글랜드 켄트주 웨스터햄
사망 1759년 9월 13일 (향년 32세)
누벨프랑스 퀘벡주 아브라함 평원
복무 영국 육군 (1740 ~ 1759년)
최종 계급 소장
주요 참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자코바이트의 난
프렌치-인디언 전쟁

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유럽에서의 활약2.3. 몽캄과의 대결과 최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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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육군 장군.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의 판도를 영국의 승리로 이끌어낸 명장이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울프는 1727년 1월 2일 켄트주의 웨스트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에드워드 울프는 아일랜드계 군인이었고 외삼촌 에드워드 톰프슨은 저명한 정치인이었다. 1741년, 울프는 아버지 에드워드 울프의 카르타헤나 원정에 동참했지만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1741년 11월, 울프는 아버지가 지휘하는 해병 연대에 배속되었고 1742년 4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한창일 때 플랑드르로 가서 라인 강 방면 제12 연대에 배속되었다. 그 후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군 경력을 시작한다.

2.2. 유럽에서의 활약

1743년 6월 27일, 울프는 데팅겐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선보여 중위로 진급했다. 또한 1744년에 제4 배럴 보병 연대에 소속된 1개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고, 1745년에는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일으킨 자코바이트 반란 진압 작전에 투입되었다. 1746년 1월 17일, 울프는 폴커크 전투에서 분전했으나 아군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그리고 4월 16일 컬로덴 전투에서 호울리 장군의 참모를 맡아 자코바이트 반란을 결정적으로 진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전투가 끝난 후 울프는 자신의 제4보병 연대와 함께 스코틀랜드에 주둔했다. 반란이 진압된 후, 울프는 제12 보병 연대와 함께 플랑드르로 돌아와 1747년 7월 2일 라우펠트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맞서 싸우던 중 부상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748년, 울프는 영국으로 돌아와 스코틀랜드에 주둔한 부대에 복무했고 1749년에는 스털링에 주둔하고 있는 제20보병연대의 소령으로, 1750년 3월 20일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하자 울프는 또 다시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1757년 9월 울프는 영국군의 로슈포르 원정에 참모로 참전했지만 이 원정은 실패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대(大) 윌리엄 피트는 울프의 군사적 역량을 고평가하고 그를 북미 대륙에 파병하기로 결정한다.

2.3. 몽캄과의 대결과 최후

1758년 1월 23일, 울프는 제프리 애머스트와 에드워드 보스카웬 장군 휘하의 원정대 준장으로 임명되어 루이스버그 요새 공략전에 투입되었다. 울프는 루이스버그 전투 중 가장 위험한 구역을 맡아 적과 격전을 벌이던 중 부상을 입었으나 끝까지 전투를 지휘했고, 루이스버그 요새는 7월 27일에 항복했다. 울프는 부상을 치유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고 1759년 퀘벡 원정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항해를 개시해 6월 말에 퀘벡 근처에 상륙해 본격적으로 퀘벡 공략전에 착수했다. 그러나 퀘벡 수비를 맡은 루이 조제프 드 몽캄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고 7월 31일 보포르 전투에서 뼈아픈 패배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던 9월 12일, 제임스 울프는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 장군의 휘하 부대에서 탈영한 두 명의 프랑스 병사들로부터 프랑스 보급선이 다음 썰물 때 세인트로렌스 강을 따라 내려가 퀘벡 시에 물자를 공급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울프는 이를 호기로 여기고 자신이 먼저 세인트로렌스 강을 따라 내려가서 프랑스 보급함을 가장한 채 랑세-오-포울롱에 상륙한 뒤 방심한 적을 습격하기로 결심했다. 그날 밤, 울프의 소함대는 강을 따라 랑세-오-포울롱으로 나아가 4,400명의 병사들을 상륙시켰고, 영국군은 수비대의 저항을 가볍게 물리친 뒤 9월 13일 아침에 52m에 달하는 가파른 절벽을 기어 올라가 아브라함 평원에 자리를 잡았다.

이 소식을 접한 몽캄이 황급히 군대를 수습해 영국군을 아브라함 평원에서 몰아내려 들자, 울프는 전투 대형을 갖춘 뒤 결연한 자세로 적과 맞서 분전했다. 그러던 중 영국군 우익이 적의 맹공으로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는 걸 파악한 울프는 친히 그쪽으로 달려가 병사들을 격려했다. 이때 한 발의 총탄이 날아와 그의 손목을 산산조각 냈고, 뒤이어 또 한 발의 총탄이 사타구니에 박혔다. 그래도 울프는 고통을 참고 병사들을 지휘했으나 세번째 탄환이 폐를 관통하자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에 주위 병사들이 그를 안고 후방으로 이송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을 눕혀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장교들은 그를 눕혀준 뒤 의사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울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대답했다.
"필요 없다. 이제 다 끝났다."

잠시 후 한 병사가 급히 달려와 외쳤다.
"그들이 도망칩니다! 그들이 도망치는 걸 보십시오!"

이에 울프가 물었다.
"누가 도망치느냐?"

병사가 대답했다.
"적입니다, 장군! 그들은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습니다!"

그러자 울프는 전령에게 버턴 중위에게 가서 제48 보병대를 세인트 찰스로 행군시켜 프랑스군이 다리로 도망치는 걸 막으라고 지시한 뒤 잠시 후 숨을 거두었다. 향년 32세. 그가 죽은 지 몇시간 후에 적장 몽캄 장군도 영국군의 총격을 받아 전사했다. 닷새 후 퀘벡 시는 항복했고, 영국은 프랜치-인디언 전쟁에서의 승기를 확고히 했다.

3.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