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디 톰자노비치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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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 톰자노비치 | |
헌액 연도 | 2020년 |
<colbgcolor=#ae1d2a><colcolor=#fff> 휴스턴 로키츠 No. 45 | |
루돌프 톰자노비치 주니어 Rudolph Tomjanovich Jr. | |
출생 | 1948년 11월 24일 ([age(1948-11-24)]세) |
미시간주 햄트래믹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학교 | 미시간 대학교 |
신장 | 203cm (6' 8'') |
체중 | 103kg (228 lbs) |
포지션 | 스몰 포워드 / 파워 포워드 |
드래프트 | 1970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 샌디에이고 로키츠 지명 |
소속팀 | 샌디에이고-휴스턴 로키츠 (1970~1981) |
지도자 | 휴스턴 로키츠 코치 (1983~1992) 휴스턴 로키츠 (1992~2003)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2004~2005) |
아테네 농구 월드컵 미국 대표팀 (1998) 시드니 올림픽 미국 대표팀 (2000) | |
등번호 | 45번 - 휴스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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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농구인. 휴스턴 로켓츠의 2회 우승 및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의 2000 시드니 올림픽 우승을 이끈 감독이며, 명선수=명감독이라는 공식을 성립시킨 몇 안되는 명장이다.[1] 별명은 Rudy-T.2. 일생
2.1. 선수 시절
1948년 미시간주 햄트래믹에서 크로아티아계 미국인인 아버지 루돌프 톰자노비치 시니어와 어머니 캐서린 모디치 사이에서 태어나 햄트래믹 고등학교 재학 시절 존 브리스커[2] 등과 함께 뛰었고, 미시간 대학교 시절 데이브 스트랙(1923~2014)[3]과 조니 오어(1927~2013)[4] 감독 밑에서 농구 수업을 받고 1970년 1라운드 2번으로 샌디에이고 로키츠에 지명, 1981년 은퇴 때까지 샌디에이고-휴스턴 시절을 거치고도 꾸준히 선수로써 활동, 1974~77, 79년에 통산 5번 올스타 선출, 1981년 NBA 파이널 진출 공헌등으로 팀의 심장 노릇을 하였다.
허나 현역당시 그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 건 그의 수준급 실력이 아니라 그가 1977년 12월에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선수인 커미트 워싱턴에게 맞은 강펀치였다. 이 시기 NBA 농구는 엄청나게 터프해서 한팀의 에이스 득점원에게 거칠다 못해 폭력적인 수비가 일상화 돼서 경기중에도 팀의 에이스를 상대팀 선수의 위협으로부터 막아낼 일명 보디가드가 항시 필요했다. 찰스 오클리나 데니스 로드맨(피스톤즈 시절)같은 선수가 존재했던게 이런 것.
당시 경기 중 그의 동료인 케빈 커너트와 레이커스의 커미트 워싱턴 몸싸움 과정에 시비가 붙어 싸우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감독시절에도 그렇지만 선수시절에도 인격자로 유명한 루디는 싸움을 말리러 코트 중앙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그러나 한창 싸우고 있던 워싱턴은 그가 싸우러 오고 있다고 착각해 펀치를 날렸다. 무방비상태+달려오던 관성까지 더해 펀치를 맞은 루디는 피를 흘리며 기절했고[5] 두개골과 얼굴의 골격 부분이 분리되어서 코에서 척수액이 흘러나와 입으로 들어가는(!!!) 죽을수도 있는 부상을 입게 된다. 당시 루디의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이를 두고 "훨씬 덜 심각한 부상을 입고도 죽은 사람들도 여럿 봤다"면서 수술을 "깨진 달걀 껍질을 스카치 테이프로 붙히는 것"에 비유했다.
훗날 이 사건은 단순히 "The Punch"로 알려졌다. 시즌 초에 입은 이 부상으로 인해 그는 잔여시즌을 전부 결장했으며 다음 시즌이 되어서야 복귀를 했다. 그러나 워낙 후유증이 심해 기량이 점점 쇠퇴하다가 1981년, 33세라는 이른 나이에 선수생활을 마감한다. 1985년 LA 타임즈 기사에 따르면[6] 거의 10년이 지난 당시에도 두통에 시달렸다고.
사건 당시의 영상. (1분 47초경에 나옴.)
이 펀치로 워싱턴은 당시 NBA 역사상 가장 중징계인 60일 출장정지 및 벌금 1만 달러라는 징계를 받았으나,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동안 구단으로부터 돈 한푼 못 받는 바람에 5만 달러의 손해를 봐야 했다. 이후 NBA는 코트 위에서 일어나는 싸움에 대해 징계를 강화하게 된다. 이로 인해 워싱턴 개인도 전국적인 증오를 받았는데, 인종차별적인 멘트부터 자식들과 부인까지 욕을 먹었다. 심지어 그의 부인인 임신한 상태였는데, 산부인과 의사가 단지 워싱턴의 부인이란 이유로 봐주길 거부했다고. 이보다 더 끔찍한 건 워싱턴이 레이커스 구단의 후속 조치로 동부에 있는 앙숙 보스턴 셀틱스에 트레이드된 것이다. 그럼에도 한 시즌 뒤인 1978년에 샌디에이고 클리퍼스로 이적하면서 서부로 돌아간 후 이듬해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됐다가, 1980-81 시즌을 앞두고 등과 무릎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어 더 이상 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1982년 1월 잠정 은퇴했다. 1987년 10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로 트레이드되어 복귀 시도를 했으나 11월에 방출되어 완전히 은퇴했다. 훗날 워싱턴 본인은 해당 사건에 대해 "끔찍한 실수였다"고 후회했다.[7]
사건 당시 기사.
피해자인 탐자노비치는 워싱턴에 대해 항상 동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는데 1985년 당시 자신이 "세상에 대해서나 커밋에 대해 분노하지 않고도 (부상을) 극복할 수 있었다"I know that I got through it (the incident) without being angry at the world--or at Kermit."라고 언급한 바 있으며, 로키츠 감독으로 재직중이던 2002년에 워싱턴이 추천한 소니 왓슨이란 선수와 트라이아웃을 가졌던 당시에도 워싱턴과 만남을 갖고 그에 대해 씌워진 낙인이 "없어졌으면 굉장히 좋을 것이다. 매우 찬성한다("that would be great. I'm all for that")"고 언급한 바 있다. 관련 기사
또한 2016에 워싱턴이 징역 6년형을 받고 수감되었던 것에 대해 "(워싱턴에 대해) 안타깝게 여깁니다. 그 사건 이후 우리는 화해했어요. 그 친구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성공하고 싶어했을 뿐이고, 그의 심정을 이해합니다"고 했다. 또한 그가 재기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그렇소. 모두가 그럴 의지만 있다면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겁니다"라면서 워싱턴이 석방되면 당시 자신이 고문으로 재직하고 있던 레이커스가 그를 고용할 수 있도록 추천하겠냐는 질문에 "물론이오"라고 대답했다.
2.2. 감독 시절
2.2.1. 휴스턴 로키츠
은퇴 뒤에는 친정팀인 휴스턴 로키츠로 돌아와 2년동안 스카우트 업무에 종사하다가, 1983년에 어시스턴트 코치로 부임, 이곳에서 빌 피치 감독과 돈 체이니 감독을 보좌하면서 1986년 NBA 파이널 진출에 기여하기도 했다.
1991~92 시즌 도중에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 돈 체이니 감독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부임, 부임 첫 시즌에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였지만, 다음 시즌 루디는 팀의 에이스인 하킴 올라주원의 활용도를 더 끌어올리는 전략을 구상했다. 올라주원의 넓은 시야와 패싱능력을 더욱 극대화시켜기 위해 코트를 넓게 벌리고 3점슛이 가능한 외곽슈터중심의 라인업을 활용했는데, 하킴의 숨은 보디가드인 파워포워드 오티스 도프, 정규시즌엔 그냥 괜찮은 롤플레이어였지만[8] 플레이오프에서만큼은 미칠듯한 클러치샷으로 상대팀 팬들에게 깡소주를 먹인(...) 미스터 빅샷 로버트 오리 등이 버티는 포워드진에, 게임리딩능력은 평범했지만 3점슛은 일품이었던 주전포인트가드 케니 스미스, 비록 후보에다 루키였지만 강심장으로 큰 경기에서 대박활약을 해준 샘 카셀, 클러치 슈팅력과 집요하기까지 한 수비력에 이를 능가하는 성깔로 유명했던 슈팅가드 "매드 맥스" 버논 맥스웰 등 외곽슛이 뛰어난 벌떼 가드진으로 팀을 정비했고 팀 전력은 상승일로를 탔다.
그리고 대망의 93-94시즌, 하킴 올라주원은 리그를 씹어먹으며 MVP에 올랐고 휴스턴은 58승 24패의 7할이 넘는 성적을 거두고 포틀랜드-피닉스-유타를 차례로 격파하며 다시 파이널에 진출, 상대는 당연히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 가 아니고....[9] 그동안 번번이 조던의 벽에 막혀있다가 조던이라는 벽이 사라지자 뚫고 올라온 패트릭 유잉의 뉴욕 닉스. 하킴 VS 유잉의 파이널이 된 시리즈는, 올라주원 항목에도 나와있듯 대학교시절 NCAA 파이널에서 맞붙었단 유서깊은 라이벌리기도 했다. 시리즈는 치열하게 진행되어 7차전까지 가는 대접전이었고[10] 마침내 휴스턴은 대망의 첫 우승을 거머쥐었다.
94-95시즌엔 개막 9연승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초반 주축 선수들이 연이어 부상을 당하는 악재가 퍼져서 급한대로 NBA레벨이 아닌 무명선수들까지 단기계약을 했을정도였다. 하지만 시즌 중반 결단을 내려,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통해 포틀랜드의 프랜차이즈 스타였지만, Phi Slama Jama의 멤버로 올라주원과도 황금콤비였던 클라이드 드렉슬러를 영입했고 이를 통해 중반부터 힘을 내기 시작했다. 초반에 까먹은게 있어서 47승 35패밖에 못 거두며 정규시즌은 6위를 기록했움에도 상위시드를 연이어 업셋하면서 혈투끝에 [11] 파이널에는 진출했다. 이 때 파이널에서 만난 팀은 샤킬 오닐의 올랜도 매직이었는데 이번에는 4-0으로 개발살내며 대망의 2연패를 이뤄내게 된다. 우승트로피을 받은 후 그가 남긴 코멘트가 간지폭풍인데,
"We had nonbelievers all along the way, and I have one thing to say to those nonbelievers: Don't ever underestimate the heart of a champion!" - (챔피언에 이르는) 길을 걸어오는 동안 우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군요: 절대 챔피언의 열정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두 차례의 연속 우승 이후, 찰스 바클리, 스카티 피펜등의 대형스타를 영입하여 우승에 다시 한 번 도전해보고자 했으나, 피펜이 오기 전에는 신흥 강호인 유타 재즈에게 밀렸고, 1998-99시즌에 피펜이 가세한 뒤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코비-샼 콤비를 주축으로 한 LA 레이커스에게 광탈당하고 말았고, 팀의 심장인 올라주원이 심장병 등을 앓는 등 악재가 겹치게 되었다.
결국 휴스턴은 1999~2000시즌부터 3시즌간 플레이오프도 못 나가는 굴욕을 맛보게 되었고, 결국 루디는 2003년 3월 27일, 방광암 치료를 위해 11년만에 지휘봉을 내려놓게 되었다.
더불어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걸로 유명한 루디는 당시 루키였던 야오밍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는데, 2002/03 시즌 막판에 그가 사임하자 상심한 야오와 로켓츠는 한동안 부진하면서 승률을 까먹어 결국 플레이오프에 간발의 차이로 탈락하고 만다.
2.3.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당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는 2004 NBA 파이널 완패 이후 샤킬 오닐 등 선수들의 이적, 필 잭슨 감독의 사임 등으로 어수선했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레이커스의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결국 성적은 기대에 못 미치며 곤두박질쳤고, 지병인 심장병이 더욱 악화되면서 결국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시즌 중반에 물러나고 말았다. 결국 필 잭슨이 다시 레이커스 감독직으로 복귀했다.
2.4. 이후
은퇴 이후 레이커스에서 구단 컨설턴트로 재직한 바 있다.3. 감독 스타일
<NBA FAN BOOK 1994>와 <뚱딴지 NBA 탐방>에 의하면, 그가 주로 쓰는 전술은 표준적 오펜스와 '트랩 앤 로테이션'이다. 세트 오펜스의 경우, 1995년까진 공격 면에서 하킴의 포스트업과 케니 스미스, 버논 맥스웰의 아웃사이드 패스가 중심이었다가 1996~1999년까진 하킴 올라주원과 바클리의 포스트업 플레이를 이용해내 아웃사이드에 있는 마리오 엘리나 클라이드 드렉슬러에게 패스해 디펜스를 전후좌우로 분산시킨 뒤 노마크 선수가 슛을 한다. 수비전술 '트랩 앤 로테이션'은 가드진의 작은 키의 약점을 보완한 기술로, 로버트 오리라든가 찰스 바클리, 칼 헤레라, 케빈 윌리스 같은 포워드진들이 민첩하게 상대의 실수를 유발시켜 차단시키는 것이다.또 그는 휴스턴 로키츠에서 선수 때부터 오래 일했던 만큼 친정팀을 잘 이해했기에 연고지 시민들로부터 인기를 한몸에 받았으며, 멤버 구성을 먼저 생각하고 난 뒤에 공격과 수비작전을 짜는 타입이었다.
[1] 비슷한 케이스로 래리 버드와 레니 윌킨스가 있다. 다만 버드의 경우 감독으로서의 능력 및 성과는 훌륭했으나 선수시절 부상 때문에 생긴 고질적인 허리 문제로 3시즌만에 은퇴해야 했기에 명감독이라고 부를만한 긴 커리어를 쌓지는 못 했다. 따라서 선수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오래 활동한 레니 윌킨스가 더 톰자노비치와 비슷한데, 그는 버드만큼 레전드가 아니었을 뿐이지 선수로서 명예의 전당에 올랐으며 심지어 감독경력으로 두번째로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선수/감독으로 따로 헌액된 인물은 지금까지도 그가 유일하며, 이어 92년 드림팀이 팀 자격으로 헌액되면서 역대 유일하게 명예의 전당에 세 번 헌액된 인물이 되었다.[2] 그는 톨레도 대학교를 2년 동안 다닌 후 1969년 ABA 팀 피츠버그 파이퍼스에서 데뷔하여 1972년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영입되어 NBA 무대를 밟았으나, 1975년 EBA 팀 체리힐 루키즈에서 은퇴. 1978년 무역업을 위해 우간다로 여행갔다가 실종되었으며, 1985년 워싱턴주 킹 카운티 당국으로부터 사망 처리되었다.#[3] 카지 러셀의 스승이자 1965년 NCAA 전국대회 결승 진출을 이끈 감독. 1968년 퇴임 후 1970년부터 2년 동안 미시건대 체육차장을 거쳐 애리조나 대학교에서 1982년까지 체육부장을 역임했고, 취임 첫해 미시건대 때 그를 보좌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코치 프레드 스노덴(1936~1994)을 메이저 대학 중 처음 농구부 감독으로 선임했다.[4] 캔자스 주 예일 크로포드 카운티 태생. 어린 시절 일리노이 주 테일러빌에서 자라 테일러빌 고등학교 시절 돌프 스탠리(1905~1990) 감독의 가르침을 받으며 1944년 주 대회에서 45승 0패로 무패우승 기록을 세웠고, 일리노이 대학교로 재학했으나 얼마 안 가 해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투입되어 1945년 종전 후 벤와 칼리지로 편입되어 은사 스탠리 감독과 다시 만났다. 1949년 BAA(현 NBA) 드래프트 때 세인트루이스 바머스에 2라운드 20번으로 지명되어 1950년 워털루 호크스까지 총 2팀을 거쳤고, 은퇴 후인 1951년 더뷰크 고등학교 감독을 시초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1959년 위스콘신 대학교 코치로 NCAA 첫 경험을 했다. 1965년 매사추세츠 대학교 감독으로 발탁되어 3년을 지내다 1967년 미시건 대학교 코치로 전근, 1968년 전임 스트랙 감독으로부터 감독 자리를 승계받아 임기 12년 동안 미시건대 감독으로 재직하며 루디 T 외에 캠피 러셀, 데이브 백스터, 필 허바드 등을 배출했고, 1976년 NCAA 전국대회 때 농구부를 결승까지 몰고 간 바 있다. 1980년부터 아이오와 주립대학교로 옮겨 임기 14년 동안 NCAA 전국대회 진출 6회를 달성해내 점차 빅8 컨퍼런스의 강호로 키워냈고, 제프 호나섹, 제프 그레이어, 빅터 알렉산더, 프레드 호이버그, 로렌 메이어 등을 발굴/육성했다. 임기 내내 홈 구장인 힐튼 콜로세움에서 승률 76.7%를 기록했기에 팬들 사이에선 '힐튼 매직'이라 회자되고 있고, 2011년 아이오와 주립대 측은 홈 구장 내에 동상까지 세웠다.[5] 훗날 회상에 따르면 천장에 달려있던 점수판이 떨어져서 맞은줄 알았다고 한다.[6] 참고[7] 사실 필요 이상으로 욕을 먹은 것도 있다. 당시만 해도 NBA에서 주먹질이 오가는 건 매우 흔했고, 워싱턴은 그냥 싸우다가 누가 덤벼든다고 생각해 주먹을 날린 것 뿐이었다. 심지어 더티한 플레이도 아니었다. 톰자노비치가 운 나쁘게 너무 다쳐서 그렇지...[8] 그래도 선수생활 초창기엔 큰 키와 다재다능함으로 기대를 받는 유망주였다. 그 덕에 1992년 1라운드 11위라는 높은 순위에 지명받기도 했고.[9]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지만 조던은 이때 잠깐 야구하러 나가있었다.[10] 실제로 5차전까지 뉴욕이 3승2패로 앞서고 있었고, 6차전 막판에 존 스탁스가 역전 슛을 시도하지만 이게 올라주원의 손에 걸리고 만다. 그리고 스탁스는 최종전에서 슛 18개를 던져 2개 성공, 특히 삼점슛은 11개 모두 놓치면서 시원하게 경기를 말아먹는다. 최종 스코어는 90대84[11] 1라운드 3승2패, 2라운드 4승3패, 3라운드 4승2패로 두번이나 최종전까지 갔고 마지막 3라운드에서도 4승2패로 결코 쉽게 승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