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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판데르파르트/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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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파엘 판데르파르트의 클럽 경력을 정리한 문서.

1.1. AFC 아약스

파일:Van_Der_Vaart_Ajax.jpg

1999-00 시즌 단 한 경기뿐이지만 17살의 나이로 아약스에서 데뷔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시즌 팀에 성공적으로 자리잡으며 제 2의 요한 크라이프 등장이라는 찬사까지 받게 된다. 그러나 그 다음 시즌부터 판데르파르트는 부상에 시달리기 시작하며 삐걱거리는 와중에도 7경기 연속골을 포함해 14골을 때려박으며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또한 그 다음해에도 판데르파르트는 부상에 시달리며 21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18골을 박아넣는 무서운 모습을 과시한다. 급작스러운 성공의 대가인지 2003-04 시즌에는 과체중 및 여자친구에 빠진 나머지 축구에 소홀했다는 추문에 시달리나 어느새 다시 추스리고는 다시 한 번 아약스에 리그 우승을 안겨주며 명실상부한 아약스와 네덜란드의 스타로 떠오른다.

시즌마다 성공이 연이어진 끝에 2004-05 시즌 판데르파르트는 감독 쿠만에 의해 주장이라는 중책을 떠맡게 된다. 그러나 이 때부터 판데르파르트의 하락세가 시작되는데 이적문제로 프런트와 큰 갈등을 빚고 있던 팀 동료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국가대표 친선경기에서 판데르파르트에게 큰 부상을 입혔고, 그로 인한 하락세를 타기 시작한다.

1.2. 함부르크 SV 1기

파일:Van_Der_Vaart_Hamburger1.jpg

연이은 부상 때문에 하락세를 타고 있었기에 예전과는 달리 빅클럽에서의 적극적인 영입의사가 없었고 주전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었다. 판데르파르트도 플레이메이커로서 자신이 경기를 주도할 수 있는 팀을 찾고 있다가 마침 돈을 쓰려는 함부르크로 이적하게 됐다.

함부르크에서도 끊임없이 잔부상에 시달렸지만 최다득점자였던 시즌도 있을 정도로 꾸준히 골망을 가르는 큰 활약으로 팬들의 많은 지지를 얻었다. 함부르크에서 세 시즌을 보낸 판데르파르트는 발렌시아로의 이적설이 있었지만 레알이 아니라면 함부르크에서 이적하지 않겠다고 천명했고, 마침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게 된다.

1.3. 레알 마드리드 CF

파일:Van_Der_Vaart_Real_Madrid.jpg

5년 계약을 맺고 레알에 입단해서 첫 해에는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전 시즌에 스네이더르가 먼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여 판데르파르트와 웨슬리 스네이더는 네덜란드[1] 그리고 아약스 동료 둘이 레알에서 양발 중거리 슛으로 골을 넣는 괴상한 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입단 당시의 걱정 아닌 걱정을 뒤로 하고 큰 활약 없이 점점 잊혀지게 된다. 이적한 이듬해 플로렌티노 페레스가 회장으로 재취임하고 갈락티코스 정책을 펼치며 카카가 영입되고 출장기회가 줄어들었다. 결국 스네이더르가 인테르로 이적, 그리고 그 이듬해 다시 메수트 외질이 영입되자 판데르파르트는 토트넘으로 이적했다.

경기를 뛸때마다 수준급의 경기력을 보여주었기에 토트넘에서의 활약 또한 기대가 되었고 레알의 갈락티코스 정책이 과시적인 과소비에 가깝다는 비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판데르파르트의 경쟁자였던 카카가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줬고, 오히려 판데르파르트가 더 좋은 모습을 그나마 보여줬기에 문제가 되었다.

2008-09 시즌 라리가 4라운드에서 스포르팅 히혼과의 홈 경기에서 해트트릭과 1도움을 기록하였으며 팀은 7:1 대승을 거두었다.

2009-10 시즌 라리가 15라운드 레알 사라고사와의 홈 경기에서 선발출전하여 2골 1도움을 기록하였다.

라리가 25라운드 세비야 FC와의 홈 경기에서 1골 1도움을 하여 팀을 3:2 역전승을 하게 하였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2시즌동안 73경기 출전 12골과 11도움을 기록하였다.

1.4. 토트넘 홋스퍼 FC

파일:Van_Der_Vaart_Tottenham.jpg

토트넘은 이미 루카 모드리치라는 걸출한 중앙 미드필더가 있었으나 경기를 조립하는 선수 외에도 경기를 결정지어버릴 만한 영향력을 가진 중앙 자원을 원했고 이에 판데르파르트를 영입했다. 피터 크라우치는 3골밖에 못 넣고, 부상을 끊었다 돌아온 저메인 데포는 전시즌 18골을 넣었던 스트라이커에서 22경기에서 4골을 넣는 부진한 스트라이커로 전락했고 파블류첸코도 대동소이한 경기력을 과시하는 가운데 가레스 베일과 함께 토트넘을 먹여살리고 있다.

이에 힘입어 전반기 EPL 최고의 영입 1위를 차지했으며, 겨울 이적시장 토트넘이 거절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며 공격수 보강을 못하자 잔부상에 시달림에도 불구 공격진의 에이스로서 토트넘을 5위에 견인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2010-11 시즌 7라운드 아스톤 빌라 FC와의 홈 경기에서 측면미드필더로 출전 멀티골을 작렬하였다.

14라운드 치열한 북런던 더비인 라이벌 아스날 FC 원정 경기에서 1골 2도움을 기록, 팀을 3:2 역전승을 하게 만들었다.

19라운드 아스톤 빌라 원정 경기에서 또 다시 멀티골을 기록했다.

28라운드 아스날과의 홈 경기에서 2골을 기록, 그야말로 이번 시즌 아스날 킬러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2010/11 시즌 36경기 15골 10도움 (리그 28경기 13골 9도움, 챔피언스리그 7경기 2골 1도움)

2011-12 시즌은 완벽히 에이스로 떠오른 가레스 베일을 보좌하며 토트넘을 UEFA 챔피언스리그 진입권인 4위로 끌어올렸다.

2011-12 시즌 6라운드부터 10라운드까지 5경기 연속 득점을 기록하였으며 리그 초반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었다.(이후 베일과 케인도 5경기 연속 득점을 하였다.)

리그 29라운드 스토크 시티 FC와의 홈 경기에서 추가시간 끝날무렵 귀중한 동점골을 넣어서 승점 1점을 획득하였다.

2011-12 시즌 39경기 13골 8도움 (리그 33경기 11골 7도움 , 유로파리그 1경기 1골, FA컵 4경기 1골 1도움)

2012-13 시즌 초반 2경기 교체와 선발 한번씩 출전 이후 함부르크 SV로 이적하였다.

1.5. 함부르크 SV 2기

파일:Van_Der_Vaart_Hamburger2.jpg
2012년 시즌에는 2008년 레알 마드리드로 떠난지 4년만에 다시 친정팀 유니폼을 입게되었다. 토트넘에 잔류의사를 보이는가 했는데 주전보장을 받지 못하고 고민하다[2] 친정팀의 구애를 못이기고 복귀, 이로써 대한민국의 손흥민과 같이 한솥밥을 먹게됐다. 한국시간 2012년 9월 17일 프랑크푸르트전 손흥민의 시즌 첫 골 이자 2-3으로 추격을 하는 골에 도움을 기록하며 팀 내 최고 평점을 기록했다.

전번 시즌 팀내 득점 1위이던 아르티옴 루드네우스는 부상과 부진으로 무득점. 득점 2위 손흥민은 바이엘 레버쿠젠으로 이적하면서 2013-14 시즌은 그가 12차전까지 3골을 넣으며 팀내 최다 득점을 기록 중이지만 팀은 리그 14위까지 추락했다. 이후로는 팀과 함께 부진에 빠지면서 기대치에 미치진 못했다. 시즌 막판 승강 플레이오프를 승리하면서 겨우겨우 잔류에 성공했지만 2014-15 시즌 또한 지난 시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기량이 점점 쇠퇴하는 모습을 보였고, 판데르파르트는 시즌 종료 이후 함부르크를 떠날 의사를 보였다. 또 다시 승강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간신히 분데스리가 잔류에 성공한 이후 팀을 떠났다.

1.6.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파일:Van_Der_Vaart_Real_Betis.jpg

2015년 6월 9일 승격팀 레알 베티스가 자유계약으로 판데르파르트를 영입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정확히 5년 만에 프리메라리가로 복귀하게 되었다.

1.7. FC 미트윌란

2016년 8월 10일 덴마크 수페르리가 소속의 FC 미트윌란으로 이적하였다. 기간은 2년.

1.8. 에스비에르 fB

2018년 8월 5일 덴마크 리그 소속의 에스비에르 fB로 이적하였고, 등번호 10번을 다시 달게 되었다. 기간은 1년.

리그 개막 후 3경기에 교체 출장하면서 시즌을 시작하던 도중 팀 훈련에서 부상을 입었고, 부상이 심각했는지 2018년 11월에 이제 그만 멈추려 한다. 나는 재활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축구를 하려고 왔다. 하지만 뜻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라는 말을 남기며 현역 은퇴를 선언,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1] 당시 레알 마드리드에는 두 사람 말고도 아르연 로번, 뤼트 판니스텔로이, 로이스톤 드렌테, 클라스 얀 훈텔라르도 있어 오렌지 커넥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2009-10 페레스가 돌아오고 갈락티코스 정책이 재시작되면서 이들은 점차 팀에서 비중이 떨어지게 되고, 훈텔라르는 AC 밀란, 로번은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한다. 남아 있던 판 니스텔로이도 겨울 이적 시장에 함부르크 SV로 이적했다. 이 중에 로번은 마누엘 페예그리니가 기용할 마음이 있었으나 스네이더르와 휜텔라르가 이적하면서 로번도 자신의 입지에 대해 크게 불안함을 느껴 에이전트인 아버지에게 이적할 팀을 찾으라고 했고, 감독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뮌헨으로 이적했다.[2] 주앙 무티뉴 영입비를 마련하기 위해 판매했다는 루머가 있다. 결국 주앙 무티뉴 이적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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