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라자르 파르페치 (아르메니아어: Ղազար Փարպեցի) |
출생 | 441년 ~ 443년 |
사망 | 미상 |
직위 | 아르메니아 수도자, 역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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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5~6세기 아르메니아의 수도자이자 역사가.2. 행적
441~443년경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라자르 본인이 사산 왕조의 지배로부터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투쟁한 바한 마미코니안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그는 아라가코튼 지역의 파르피 마을 출신이라고 한다. 그는 바한 마미코니안의 친척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찍이 바한, 아르타쉬, 바르드 등 마미코니안 가문의 자제들과 함께 이베리아 왕국 출신의 학자 브데쉬스 아슈샤에게 교육받았으며, 이때 바한과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이후 465년부터 470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유학가서 신학을 교육받고 수도자가 되었다.후대의 아르메니아 역사가 마누크 아베히안에 따르면, 그는 484년부터 486년까지 시니크에서 은둔하면서 성직 활동을 수행하다가 바한 마미코니안의 초대를 받아 바하르샤파트로 이동한 뒤 그곳에 자리잡은 수도원의 수도원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신학을 숙달한 그는 아르메니아의 전통 신학을 고수하는 수도자들과 여러 차례 마찰을 벌였고, 결국 이단으로 고발당해 490년 수도원에서 쫓겨났다. 이때 그는 바한에게 서신을 보내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수도원으로 끝내 복귀하지 못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의 영역인 아마다로 가서 몇년 간 지내다가 바한의 요청으로 아르메니아로 돌아온 뒤 바한의 권유를 받아들여 아르메니아 역사를 집필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아르메니아의 라즈레브라는 마을 남쪽 파르피 협곡에 있는 아르메니아 교회 폐허 인근에 묻혔다고 한다.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3. 아르메니아인의 역사
라자르 파르페치의 저서 <아르메니아인의 역사>는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에 집필되었다. 총 3권으로 구성된 이 저서의 첫번째 책은 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가 387년 아르메니아를 분할한 때부터 시작해 428년 사산 왕조가 아르메니아 군주제를 폐지하고 총독을 세우고 439년 아르메니아어 문자를 창시한 아르메니아 총대주교 사하크가 사망할 때까지를 다뤘다. 두번째 책은 450년에 발발한 바르단 마미코니안의 아르메니아 독립전쟁을 다뤘으며, 3번째 책은 바르단의 조카 바한 마미코니안이 일으킨 아르메니아 독립 전쟁을 서술했다.라자르는 아가탄겔로스, 비잔티움의 파우스투스, 그리고 코륜의 역사서를 주요 출처로 삼았다. 또한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를 참고한 것으로 보이며, 아르샤위르 캄사라칸과 아들 나르세스, 그리고 바르단과 바한의 독립전쟁에 모두 참여한 시리아 상인 슈지크 등 여러 인사들의 증언을 인용했다. 그의 저서는 사산 왕조에 맞서 싸우는 마미코니안 가문을 "믿음의 수호자"이자 "고귀한 전사"이며,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인격자들로 추켜세우는 등 마미코니안 가문에 대한 미화가 강하며, 기독교 수도자로서 반 조로아스터교, 반 페르시아 정서를 고수했기에 사산 왕조에 대한 편견이 많이 들어갔다는 비판을 받지만, 아르메니아 역대 총대주교와 사산 왕조의 역대 샤한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들의 정확한 순서를 밝히는 등 신뢰성이 높다는 평을 받는다.
그의 저서는 아르메니아 역사의 주요 사료일 뿐만 아니라 기록이 희소한 사산 왕조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된다. 그는 사산 왕조 군주의 재위 기간에 따라 주요 사건에 날짜를 지정했으며, 저서 전반에 걸쳐 페르시아 측정 단위를 사용해 거리를 측정했다. 또한 페르시아 관료 체계와 사법 체계, 그리고 귀족들의 특권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특히 사산 왕조 샤한샤 페로즈 1세의 치세는 전적으로 그의 저서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아르메니아인의 역사>에는 수감자 처우와 아르메니아어로 mshakut'iwn이라고 하는 형벌의 독특한 형태를 포함하여 아르메니아와 시리아에 대한 이란의 종교 및 행정 정책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고, 이란에 대한 풍부한 지리적 정보를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