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에흐몬트 백작 라모랄 Lamoraal | |
이름 | 라모랄 1세 Lamoraal 1 |
작위 | 에흐몬트 백작 graaf van Egmont 하베레 공 Prins van Gavere |
출생 | 1522년 11월 18일 |
스페인령 네덜란드 라하마이데 | |
사망 | 1568년 6월 5일 (향년 55세) |
스페인령 네덜란드 브뤼셀 그랑플라스 | |
국적 | [[스페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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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귀족, 에흐몬트 백작. 펠리페 2세의 네덜란드 가톨릭화 정책에 반발했지만, 그 이유로 붙잡혀 사형당했다. 그의 죽음은 네덜란드 독립운동의 계기가 되었다.외래어 표기법/네덜란드어에 따르면 '에흐몬트'이지만, 괴테의 희곡 '에그몬트'로 유명한 까닭에 한국에서는 외래어 표기법/독일어에 따라서 '에그몬트'로 많이 표기되는 편이다.
2. 생애
1522년 스페인령 네덜란드 라하마이데성에서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황금 양모 기사단의 기사인 에흐몬트의 요하너스 4세. 라모랄은 일찍이 시동으로 카를 5세를 모셨고, 커서는 여러 전쟁에서 승리하여 황제의 총애를 받고는 1546년 황금 양모 기사단에 소속되었다. 1555년 카를 5세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네덜란드의 통치권을 이양하고 퇴위한 뒤에도 라모랄은 1541년 네덜란드의 에흐몬트 백작령을 물려받았으며, 스페인군으로서 1557년에는 생캉탱 전투, 1558년에는 그라블린 전투에 참여하여 프랑스군을 물리쳤다.그 공로는 라모랄은 1559년에는 아르투아, 플랑드르의 총독에 임명되었으며, 펠리페 2세의 섭정이었던 파르마 공작 부인 마르게리타의 자문 위원회 위원이 되었다가 1564년에 오라녀공 빌럼 1세, 호른 백작 필리프 드몽모랑시와 청원하여 신교도를 탄압하는 정책을 펴는 메헬런 대공인 앙투안 드 그랑벨을 물러나게 한다.
신교도들을 박해하는 스페인의 가톨릭 근본주의 정책에 반발하여 1565년에 국정 위원회에 물러났으며, 빌럼 1세가 참여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한 귀족 동맹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1567년 9월 9일 펠리페 2세의 명령을 받은 알바 공작에게 붙잡혀서 브뤼셀에서 1568년 6월 5일에 참수된다.
그의 죽음은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분노한 네덜란드인들의 저항에 견디지 못한 알바 공작은 결국 1573년 말에 네덜란드를 떠난다. 1579년 네덜란드 북부에 위치한 9개 주가 동맹을 결성하고 158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3. 여담
- 라모랄의 이야기에 감명받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1781년에 제 5막의 비극인 '에그몬트'를 썼으며, 괴테의 희곡에서는 독신으로 애인과 사랑을 나누는 인물로 나온다.[1] 또한 1810년에 괴테의 희곡인 에그몬트를 상연하기 위해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에그몬트의 서곡을 작곡하였다.
- 벨기에의 브뤼셀의 프티 사블롱 광장에는 에흐몬트 백작과 호른 백작인 필리프 드 몽모렌시가 함께 서 있는 동상이 있다.
[1] 실제 에흐몬트 백작 라모랄은 자식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