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후스 전쟁 시기인 1431년 8월 14일 보헤미아의 도마슐리체에서 후스파 군대와 십자군이 맞붙은 전투. 후스파의 완승으로 끝난 이 전투는 후스파 십자군이 종식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2. 배경
1427년 8월 4일 타호프 전투에서 제4차 후스파 십자군을 격파한 후스파는 야콥 프로코프의 지휘 하에 바이에른, 팔츠, 작센, 루사티아, 슐레지엔, 모라비아 등 주변의 여러 지역을 공격하여 살육과 약탈을 일삼고 포교 활동을 전개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와 변경백들은 성채 수비를 굳건히 할 뿐 이들을 막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고, 후스파는 성채를 우회하여 독일의 여러 마을을 휩쓸었다.하지만 후스파 역시 오래 지속되는 전쟁에 점차 지쳐갔고, 양형파에 속한 보헤미아 귀족들은 사유재산 폐지, 신분제 철폐 등 급진적인 주장을 내세우는 타보르파의 영향력이 갈수록 강해지는 상황에 위협을 느꼈다. 그들은 전쟁을 조속히 끝내야 한다고 여기고, 가톨릭 측에게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마침 후스파에게 강경했던 교황 마르티노 5세가 1431년 2월 사망하였고, 뒤를 이은 에우제니오 4세는 1431년 3월 3일에 열린 바젤 공의회에서 후스파와의 평화 협상을 논의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평화 협상은 결렬되었다. 후스파가 동방 정교회 및 모든 기독교 계열의 대표자들도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가톨릭 측은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협상을 거부했다. 마침 독일 각지에서 후스파의 약탈 행위에 분노한 독일인 사이에서 십자군을 재차 일으켜 이단을 심판해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쳤다. 이에 에우제니오 4세는 제5차 후스파 십자군을 선포하고, 보헤미아 인근의 바이에른 도시인 바이덴에 십자군을 집결시키고, 추기경인 줄리아노 체사리니를 파견해 십자군에 참여하게 했다.
지기스문트는 자기의 영지였으나 현재는 후스파 때문에 잃어버린 보헤미아를 되찾고 싶었기에 십자군을 지지했지만, 제1, 2차 후스파 십자군을 직접 이끌었다가 완패를 맛보았던 뼈아픈 기억 때문에 원정군을 친히 이끄는 건 거부했다. 그 대신, 제4차 십자군을 이끌었다가 실패했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가 다시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후스파의 전술을 본떠 9,000대에 달하는 바겐부르크(Wagenburg)를 준비했다.
1431년 8월 1일, 십자군이 국경을 넘어 타호프 마을을 포위했다. 그러나 그들은 타호프 성채를 함락시키지 못하자 도마슐리체로 이동하여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프라하를 공격하려 했다. 후스파는 이에 대응하여 전 병력을 소집한 뒤, 야콥 프로코프의 지휘 하에 8월 12일 출전하여 도마슐리체로 진격했다. 8월 14일 양군이 조우하면서,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후스파
- 지휘관: 야콥 프로코프
- 병력: 19세기 체코 역사학자 프란티셰크 팔라츠키(František Palacký, 1798.6.14~1876.5.26)가 저술한 '고대 체코 연대기'에 따르면, 전사 4만 명에 3,000대의 바겐부르크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실제로 동원된 병력은 2만 가량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3.2. 후스파 십자군
- 지휘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
- 병력: 고대 체코 연대기에 따르면, 13만 대군에 9,000대의 바겐부르크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실제로 동원된 병력은 3만을 크게 넘지 않는 수준일 것으로 추정한다.
4. 전투 경과
8월 12일에 출진한 후스파 군대가 이틀 만에 전장에 도착하자, 그렇게 빨리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십자군은 경악했다. 그들은 바겐부르크를 이동하여 바리케이드를 치려 했지만, 대다수는 전투 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 그러는 사이 후스파 군대는 적진을 포위해 들어가며 "Ktož jsú boží bojovníci(하느님의 전사는 누구인가)"라고 외쳤다.후스파 군대가 진영을 포위하려 들자, 다수의 십자군 장병들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바이에른을 향해 도주했다. 지휘관들은 이를 막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자 결국 뒤따라 달아났다. 교황의 지시를 받들어 십자군에 가담했던 추기경 줄리아노 체사리니 역시 평범한 군인으로 위장하여 달아났고, 그의 추기경 모자는 후스파에게 노획되어 십자군과 가톨릭을 상대로 승리한 기념물로써 전시되었다.
다만 보헤미아 출신 반후스파 장병들은 현장에 남아서 전투 마차를 세워서 후스파에게 대항했다. 후스파 장병들은 몇 시간 동안 힘겨운 전투를 치른 끝에 전투 마차를 깨뜨리는 데 성공했다. 보헤미아 장병들은 즉시 철수했고, 후스파는 탈진해서 그들을 추격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도마슐리체 전투는 후스파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5. 결과
십자군은 도마슐리체 전투에서 1,500명 정도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전체 병력에 비하면 그리 큰 손실은 아니었지만, 대다수 장병들이 군대에 복귀하길 거부하고 도망쳐 버렸기 때문에 원정을 재개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가톨릭 측은 십자군을 동원하여 후스파를 무찌를 수 있다는 희망을 완전히 버리고 평화 협상을 재개하기로 했다. 1431년 10월 15일에 정식으로 협상이 재개되어 2년여 간 진행되었다.1434년 1월, 바젤 공의회는 후스파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고 압류했던 재산을 돌려주기로 하였고, 보헤미아 의회는 바젤 공의회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타보르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항전할 뜻을 분명히 했다. 이에 양형파와 타보르파 간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후스 전쟁 최후의 전투인 리파니 전투가 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