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서기 1434년 5월 30일 프라하 인근 리파니 평원에서 후스파 내부의 타보르파와 양형파가 맞붙은 전투. 후스 전쟁 최후의 전투이다.2. 배경
1431년 8월 14일, 야콥 프로코프가 이끄는 후스파 군대는 도마슐리체 전투에서 제5차 후스파 십자군을 격파했다. 이후 가톨릭 측은 십자군을 동원하여 후스파를 무찌를 수 있다는 희망을 완전히 버리고 평화 협상을 재개하기로 했다. 1431년 10월 15일에 정식으로 협상이 재개되었고, 2년간의 회담 끝에 1434년 1월 바젤 공의회에서 후스파의 모든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고 압류했던 재산을 돌려주기로 했다. 보헤미아 의회는 바젤 공의회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군대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당시 후스파 군대는 1433년 여름부터 가톨릭 측 도시인 필르젠을 포위하여 공성전을 벌이고 있었다. 장기간의 공성전은 후스파 내부의 온건 세력인 양형파와 급진 세력인 타보르파의 갈등을 촉발시켰다. 양측 장성들은 서로를 헐뜯고 음해하려 들었고, 급기야 총사령관인 야콥 프로코프 마저 괴한의 습격을 받아 부상당했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의회에서 철수 명령이 내려지자, 양형파 인사들은 받아들였으나 타보르파 인사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부유한 도시인 필르젠을 함락시켜서 가톨릭에게 큰 타격을 입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419년부터 14년간 지속된 전란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었기 때문에, 보헤미아 백성들은 전쟁을 그만 끝내고 싶어했다. 양형파는 이러한 민심을 등에 업고 가톨릭 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영향력을 키웠다. 결국 1434년 5월경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의 주도권은 양형파에게 넘어갔고, 타보르파 인사들은 도시를 탈출한 뒤 필레젠을 여전히 포위하고 있는 타보르파 군대와 합세했다. 그러나 양형파가 필레젠 시민들에게 보급물자를 극비리에 지원해주자, 타보르파는 어쩔 수 없이 포위를 풀고 프라하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남하했다. 양형파와 가톨릭 연합군이 이에 맞서 군대를 일으키면서, 후스 전쟁 최후의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타보르파
- 지휘관: 야콥 프로코프
- 병력: 보병 1만 명, 기병 700명, 바겐부르크(Wagenburg) 480대
3.2. 양형파 - 가톨릭 연합군
- 지휘관: 밀레티네크의 디미시 보에크(양형파), 보헤미아 공작 올드리치 2세(가톨릭)
- 병력: 보병 1만 3천 명, 기병 1,500명, 바겐부르크 720대
4. 전투 경과
1434년 5월 말, 야콥 프로코프가 이끄는 타보르파 군대는 프라하를 향해 진군하다가 리파니 마을의 고원 지대에 진영을 세웠다. 얼마 후 양형파 - 가톨릭 연합군이 리파니 평원에 도착했다. 양측은 1km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봤으며, 중간에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섣불리 공격하면 바겐부르크에 막혀버려서 손실이 커진다는 걸 잘 알았기에, 전투를 개시하려 하지 않았다. 양측은 며칠 동안 협상을 시도했지만,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타보르파 내부에서 분쟁이 일어나면서 베디히체 스트라니케와 휘하 기병 300명이 진영을 떠나버렸다.5월 30일, 양측은 서로를 향해 대포를 쐈다. 그런데 타보르파 측에서 쏜 대포가 적진 한 가운데 떨어지면서, 연합군이 혼란에 빠진 모습을 보이며 물러서기 시작했다. 타보르파는 혼란에 빠진 적을 섬멸하기로 마음 먹고, 바겐부르크를 푼 뒤 물러서는 적을 추격했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타보르파가 추격하는 걸 목격한 디미시 보에크는 신속히 바겐부르크를 재설치하여 적을 가로막았다. 여기에 연합군 기병대가 출격하여 타보르파 보병대의 양 측면을 공격했다.
적의 갑작스런 반격에 당황한 타보르파 장병들은 서둘러 진영으로 후퇴했지만, 연합군은 끝까지 추격해 적이 방어벽을 세울 틈을 주지 않고 8대의 바겐부르크를 전복시켜 진영으로 들어갈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후 연합군은 진영으로 난입하여 타보르파를 무참히 살해했다. 야콥 프로코프는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사했고, 1,300명이 전사했다. 반면 연합군의 손실은 200명에 불과했다. 전투가 끝난 뒤, 연합군은 생포된 포로 700명을 헛간에 몰아놓고 산채로 불태워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