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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크로아티아 반 도마고이 Domagoj | ||
제호 | 도마고이 (Domagoj) | |
출생 | 미상 | |
사망 | 876년 (향년 불명) | |
재위 | 크로아티아 공국의 반 | |
864년 ~ 87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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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록상에서 전해지는 크로아티아 공국의 6번째 반(Ban).2. 행적
15세기와 16세기의 두 연대기로 구성된 <코로나 베네토룸(Corona Venetorum)>에 따르면, 도마고이는 "네레트반족의 지도자"(Domoghoi, prinze de Narentani)라고 한다. 864년 트르피미르 1세가 사망한 뒤 크로아티아 반을 찬탈했다. 일설에 따르면, 트르피미르 1세의 아들 즈데슬라브가 뒤를 이었지만, 트르피미르 가문 출신이 아닌 도마고이에게 전복되었다고 한다. 또다른 설에 따르면, 도마고이가 트르피미르 1세의 장남 페타르를 살해하고 크로아티아의 반이 되었다고 한다. 865년, 베네치아 도제 오르소 파르티치파치오가 크로아티아 해안을 침공했다. 이후 도마고이는 아드리아해에서 베네치아 선박의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기 위해 인질을 제공하는 협약을 맺는 대가로 베네치아군이 물러나게 했다.866년 사라센 해적이 달마티아 해안을 공격했다. 당시 그들은 바리와 타란토를 포함해 이탈리아 해안가 도시들을 보유했다. 사라센은 코토르, 키샨, 부드바를 파괴한 뒤, 라구사를 포위했지만 15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동로마 해군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이후 도마고이는 871년 2월 가신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코 2세의 바리 토후국 정벌전에 참여했다. 바리 토후국이 멸망한 뒤, 베네치아 정부는 도마고이를 전복해 크로아티아 공국에 베네치아에 우호적인 지도자를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음모는 발각되었고, 도마고이는 음모에 가담한 자들을 모조리 죽였으며 음모를 폭로한 공모자 역시 처단했다.
874년, 교황 요한 8세는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파견된 교황 특사를 태운 선박이 크로아티아 해적에게 공격당한 것에 대해 따지는 편지를 도마고이에게 보냈다. 요한 8세는 이 서신에서 아드리아해에서 활개치는 해적을 억제해달라고 요청했으며, 그를 "영광스러운 공작 도마고이(Domagoi duci glorioso)"라고 언급하면서도 해적 토벌에 만전을 가하지 않는다면 도마고이가 결백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876년,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한 뒤 카를로만이 왕위에 올랐다. 도마고이는 이때를 틈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기로 마음먹고, 이스트리아, 우마그, 노비그라드, 시파르, 로빈 등 동프랑크 왕국에 속한 4개 도시를 습격해 파괴했으며, 피란 만에서 베네치아 선박을 습격했다. 이후 크로아티아군은 그라도 시를 공격했지만 베네치아 해군에게 격퇴되었다. 그 직후 사망했고, 성명 미상의 아들[1]이 뒤이어 반이 되었지만 878년 즈데슬라브에게 전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