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1-23 12:48:28

대구 FC/역사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대구 FC
파일:대구 FC 엠블럼.svg
대구 FC 관련 문서
{{{#!wiki style="margin:0 -10px -5px"
{{{#000,#19191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 #121230; margin:-6px -1px -11px"
<colbgcolor=#88c1ea> 구단 기본 문서 <colbgcolor=#0072bc> 연고지 대구광역시
구단 대구 FC | 대구 FC B | 대구 FC U-18
주요 인물 현재 대표이사·단장 조광래 | 감독 박창현 | 주장 세징야 | 선수단
역대 역대 감독 | 역대 주장 | 10주년 베스트 XI | 프랜차이즈 선수
구단 시설 홈구장 A팀 대구iM뱅크파크 | B팀 대구스타디움
클럽하우스 현재 스카이 포레스트 | 이전 대구육상진흥센터
연습구장 A팀 스카이 포레스트 | B팀 대구강변축구장
역사 구단 역사 창단 | 도약 | 역대 시즌
기록 역대 성적 | ACL 기록 | 역대 유니폼 | 역대 등번호 | 역대 캐치프레이즈 | 기타 기록
코리아컵
파일:대한민국 FA컵 트로피.svg
2018
현재 시즌 2025 | B팀 2025
문화 팬덤 서포터즈 그라지예 | 파일:엔젤클럽 로고.svg 엔젤클럽 | 응원가 | 응원단
팬커뮤니티 대구스토
마스코트 리카 | 빅토
라이벌전 파일:포항 스틸러스 로고.svg 경북 더비 | 파일:광주 FC 엠블럼.svg 달빛 더비
논란 사건·사고
기타 세드가 | 대대강광 | 영남일보 국제 축구대회
}}}}}}}}}}}} ||


1. 개요2. 창단3. 암흑기4. 도약

1. 개요

대구 FC의 역사를 소개하는 문서이다.

2. 창단

2002년 월드컵의 축구 붐에 힘입어 대한민국 최초로 시도민구단의 개념을 도입하면서 창단했다. 역대 K리그 최초로 시민 구단으로 창단했으며 2003년부터 K리그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사실 창단 자체는 대구시민들의 축구단 열망이라기보다는, 월드컵이 끝난 이후 텅 비어버린 대구월드컵경기장을 활용하기 위해 대구광역시에서 적극적으로 밀어 붙인 것이 더 컸다. 당시 시장은 문희갑. 창단은 조해녕 시절에 진행했으나 아래 기사가 지방 선거 전, 즉 대구시장 교체 전이라 문희갑이 만들려고 한 게 맞다.
대구시경기장의 효과적인 활용을 위해 체육진흥기금과 시민 공모, 지역기업의출자를 통한 프로축구팀 창단시의회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주경기장 시설은 월드컵이 끝나면 애물단지로 전락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월드컵특집:경기장 사후활용 어떻게>②대구.대전

대구광역시는 국내 최대인 대구월드컵구장의 사후활용과 시민 일체감 조성을 시민 구단 창단의 당위성으로 꼽고 있다.
시립 축구단 창단 놓고 대구 '시끌'
시의회에서 반대했는데도 결국 창단을 확정지었고 K리그 최초로 시민주 공모를 통하여 창단한 시민 구단이라는 기록을 갖게 됐다. 이후 인천광역시가 또 다른 시민 구단인 인천 유나이티드를 창단했고 대전 시티즌[1]이 시민 구단으로 전환하는 등, 대구 FC는 국내 축구계에 시민 구단 창단이라는 일종의 새 바람을 몰고 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지역명 + FC라는 이름 형식은 대구 FC가 최초다. 처음엔 '대구 이글스'라는 이름으로 정했으나 시민들이 타 구단에서 이미 쓰는 이름이고 동물 이름을 구단명에 넣는것은 촌스럽다며 완강히 반대했으며 한국프로야구한화 이글스 팬들까지 "한화 이글스가 있는 마당에 왜 하필이면 대구 이글스냐"며 탐탁잖은 반응을 보였다. 결국 이글스를 제거한 대구 FC로 정해 최초로 지역명으로만 명칭이 구성된 구단이 됐다.[2] 최초의 'FC' 구단은 아닌데 이미 1996년에 구단명인 '코끼리'를 뗀 부천 SK FC가 있었기 때문.

2001년 8월 6일 창립회의를 시작으로 2002년 10월 9일 (주)대구시민프로축구단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첫 창립 총회를 열면서 창단하게 된다. 이후 2002년 11월 15일부터 12월 24일간 1차 시민주 공모를 실시해 127억 원의 자금을 확보하였으며, 2002년 12월 26일 한국프로축구연맹에 의해 창단이 승인되었다.

2003년 3월 19일 창단식을 거행하였다. FM에서 보면 창단년도가 2003년으로 되어있는데 창단식을 기준으로 잡은 듯하다. 대구 FC에서는 창단을 추진한 2002년을 창단 연도로 보고 있다. 초대 감독으로 1980년대와 1990년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던 박종환 감독을 선임하고 K리그 2003 시즌에 처음으로 참가하였다.

클럽 엠블럼은 창단 이전에 엠블럼 공모전을 통해 공모를 받았지만 결국 구단에서 자체적으로 디자인한 엠블럼을 사용하면서 왜 공모전을 연 것이냐며 비아냥을 샀다. 구단이 사용을 결정한 엠블럼은 당시 공모전 1위로 선정된 독수리 머리 형상의 엠블럼에서 독수리 머리 대신 태양을 형상화한 이상한 문양으로 대체했고 전체적인 방패 문양과 폰트만 차용하는 등 기행을 보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엠블럼은 2012 시즌 초반까지 사용했고 2012 시즌 중반부터는 대구 FC 서포터즈 소모임 중 하나인 도미네이터의 한 멤버가 디자인한 엠블럼을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본래 클럽 주 색상은 한국 진출을 노리던 카파와의 협약으로 대구 FC 블루라는 고유의 색상을 적용한 유니폼을 도입할 계획이었으나, 유니폼 재질 및 원단 수입 문제로 인하여 2002년 당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유니폼과 유사한 색상의 유니폼으로 변경되었다. 2011년 삼성 라이온즈 단장 출신의 김재하 사장이 선임되고 그때 부터 팬들과 소통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간 결과, 2012년 도미네이터 서포터즈와 협의를 통해 창단 10주년 기념 유니폼이 하늘색 색상으로 선보이게 되었다. 하늘색 색상의 유니폼이 팬들 사이에서 대호평을 받으면서 다음 시즌부터 주 색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보통 클럽의 주 색상을 바꾸는 행위는 팬들의 반발을 사곤 하지만, 대구의 경우에는 애당초 파란색을 팀 컬러로 정한 것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하늘색이 당시 K리그에서 사용하는 팀이 없는 유니크한 색상이었기에 큰 반발은 없었다.

3. 암흑기

공격적인 전술로 창단 이후 재미있는 축구를 보여주다가 변병주 감독의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에이전트로부터 뒷돈을 받아 챙겨먹은 사건과, K리그 전체를 흔들었던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으로 주축선수들의 이탈 및 관중 이탈로 암흑기가 시작이 되었다.

결국 2013 시즌, K리그 13위로 시즌을 마감한 대구는 2부리그로 강등을 당하고 만다.

2부 리그의 현실은 생각보다 암울했다. 2014년에는 강등의 후폭풍과 2부 리그에서조차 기대 이하의 성적이 시너지를 이루어 리그 7위, 평균 관중 966명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거뒀다. 2015 시즌에는 승격을 노리며 좋은 성적을 거두고 우승에 가까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시즌 막판 아쉬운 성적을 거두며 1위인 상주 상무와 득점 1점 차로 정규 시즌 2위로 마무리했고 플레이오프 결과 3위로 마무리하면서 역시 2부 리그 탈출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4. 도약

조광래 단장의 취임 이전과 이후로 대구 FC의 역사가 나뉜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2014년 조광래 단장 취임 이후 팀 분위기가 많이 개선되었다. 유망주 중심의 선수단 개편 이후 2016년 K리그 챌린지에서 승격하고, 2018년 FA컵 우승, 심지어 2019년에는 축구전용경기장 신축까지 완료되면서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이러한 변화를 기반으로 2019년 대구 FC의 평균 관중은 전 해의 3배를 기록하며 1만명을 뛰어넘고 객단가도 치솟는 등 인기 구단들 사이에 낄 수 있을 수준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2019시즌을 보면 티켓 수익 22억원, 객단가 1만원 이상, 2019시즌 홈경기 9회 매진이다.

이후 2021시즌에는 K리그 3위, FA컵 준우승, ACL 16강이라는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실력과 인기 모두 급상승한 모습을 보였다.

2022시즌 가마 감독을 영입하여 팀의 장점이자 큰 단점으로 꼽히던 일관된 역습 스타일의 전술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켜 강등권까지 내려갔지만 결국 최원권 감독대행의 막판 연승으로 기적적으로 K리그 8위에 머물며 잔류하였다.


[1] 대전의 경우, 1997년 창단 당시 기업 구단으로 창단했지만 2006년 시민 구단으로 전환했고 2020년 다시 기업 구단으로 전환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2] 이와 비슷하게 광주 FC도 처음에는 '광주 레이어스'라는 이름을 쓰기로 했다가 논란이 일어나자 '레이어스'를 빼고 그냥 '광주 FC'로 했던 사례가 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2367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2367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