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다니엘 가브리엘 파렌하이트(Daniel Gabriel Fahrenheit, 1686년 5월 24일(그레고리력)[1] ~ 1736년 9월 16일)는 독일계 네덜란드 공화국의 물리학자[2]이다.2. 생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단치히에 거주하던 한자 동맹의 무역상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7세기는 한자 동맹이 이미 많이 쇠퇴한 시기지만 그의 어머니 콘코디아 슈만(Concordia Schumann) 역시 단치히의 유명한 사업가 가문의 딸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15세일 때 부모가 독버섯인 알광대버섯[3]을 먹고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고, 네덜란드 공화국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여 무역상으로서의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4] 하지만 그는 무역업보다는 자연과학에 더 관심이 많았기에 실험과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1717년부터는 베를린, 할레,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코펜하겐 등을 여행하며 올레 뢰머,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등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이후 1717년에 헤이그로 이주하여 유리 가공업자로 정착하였으며, 당시 기준으로 꽤 성능이 좋은 기압계, 고도계, 온도계를 개발하였고 특히 그가 만든 수은 온도계는 당시 널리 쓰이던 기존 수은 온도계보다 성능이 탁월하다고 평판이 좋았다. 1718년 이후부터는 암스테르담에서 화학 교사로 활동하였다. 1724년엔 영국을 방문하였는데 이 해에 영국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뽑혀 당회의 학술지 '철학적 거래(Philosophical Transactions)'을 통하여 화씨온도의 이론을 확립하였다.여담으로 퀸의 프런트맨 프레디 머큐리의 별명 중 하나가 Mr. Fahrenheit이다. 그의 곡 Don't Stop Me Now에도 나와 있다.
참고로 조금 뜬금없지만, 서양 수학사에서는 0이라는 숫자에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벗겨낸 인물로 취급된다[5]. 수학자도 아닌데 왜 이런 취급이냐면, 수은 온도계에 0 아래에 마이너스 온도를 적어넣은 것이 원인이다.
[1] 당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당시 대부분 율리우스력을 썼으나, 파렌하이트의 고향 단치히는 그레고리력을 사용하였다.[2] 독일어가 연상되는 이름이라 독일 출신 물리학자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현대 관점에서 보면 출생은 폴란드의 그단스크이며, 과학계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여생(15세 이후)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보냈으므로 폴란드계 네덜란드인으로 보는 게 맞는다. 참고로 그단스크는 당시 독일식 이름인 단치히(Danzig)로 불렸고 공용어 중 하나가 독일어라고 할 정도로 독일인이 꽤 많았다.[3] 해당 문서에서도 알 수 있지만 독버섯 치고 굉장히 수수하게 생겨서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인명을 앗아간 맹독버섯이다.[4] 연구에 의하면 파렌하이트 혈족의 기원은 힐데스하임이고, 다니엘 가브리엘의 할아버지는 1650년에 쾨니히스베르크의 크나이포프(Kneiphof)에서 단치히로 이주하여 무역상으로 자리잡았으므로 기본적으로 독일어를 모국어로 쓰는 집안이라 추측할 수 있다. 단, 그단스크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치히 시절엔 한자 동맹이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네덜란드와 가장 많은 교역이 이루어졌었으므로 기본적으로 파렌하이트 가문은 네덜란드어를 접하기 쉬운 환경이었음 역시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 네덜란드어는 계통학적으로 독일어와 가까운 편이며 당시 쓰이던 네덜란드어의 철자법은 독일어와 매우 유사했다.[5] 이 철학적 개념이 바로 음수가 서양사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원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