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Nicolas Leblanc프랑스의 화학자이자 외과의. 염화나트륨 즉, 소금을 원료로 하여 탄산나트륨을 제조하는 르블랑 법을 고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르블랑의 아버지는 용광로에서 하위 관리직을 맡고 있었으나 1751년에 사망했다. 이로 인해 르블랑은 가족과 가까운 사이였던 의사와 같이 살았고, 의학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1759년, 자신을 돌봐주던 의사도 사망하자 그는 프랑스 파리의 외과 대학[1]에 입학하여 의술을 배우기 시작했다.외과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개업을 하고 결혼도 했으나, 병원 운영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서 1780년에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2세의 개인 주치의가 되었다.
한편, 1775년 프랑스 과학학회에서는 소금으로 탄산나트륨을 제조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이에게 상금을 주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 당시 유럽은 급속한 공업화를 거치며 원료로서 탄산나트륨이 많이 필요했다. 특히 유리생산에 필수적이었다.
1791년 르블랑은 연구를 통해 소금에서 탄산나트륨을 제조하는 르블랑법을 고안하는 데 성공했다. 1단계에서는 소금과 황산을 섞어서 800~900도까지 가열해서, 염화수소를 분리시켜 황산나트륨만이 남는다. 그 다음 2단계에서는 1단계에서 생성된 황산나트륨을 잘게 부수고 목탄과 석회석을 넣어 섞은 후 다시 용광로에서 가열해서 탄산나트륨을 생성하는 식이었다.
르블랑은 과학학회에서 상을 받았으며 오를레앙 공의 도움으로 1년간 320톤의 탄산나트륨을 생산하는 공장까지 차렸다. 그러나 1793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후원자였던 오를레앙 공은 처형되고 공장은 몰수당했다. 거기다가 혁명정부에서는 상금 지급까지 거부했다. 1802년에 나폴레옹이 공장을 돌려주었지만 그 때는 르블랑이 공장을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실의에 빠진 그는 1806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오히려 르블랑법의 진가를 알아본 나라는 영국이었다. 윌리엄 조시란 영국인은 르블랑법의 연구를 위해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후, 1807년에 영국에서 최초의 탄산나트륨 제조 공장을 건립했다. 르블랑법은 한동안 탄산나트륨 제조를 독점했으나 생산과정에서 형성되는 염화수소 때문에 기구 부식이 심해서 비용이 많이 들고 환경오염 문제까지 있어서 1861년 벨기에의 화학자 솔베이가 고안한 솔베이법의 도입 이후 점차 밀려나게 되었다.
[1] 원래 외과의는 내과의에 비해 천대를 받았어서 칼을 다룰 줄 아는 이발사가 외과의를 겸업(일명 이발외과의사)한 것이 시초였으나, 르블랑이 태어날 무렵인 1740년대에는 이발사의 외과의 겸업이 금지되고 일부 의과대학에 외과 과정도 개설되고 외과 아카데미도 창립되어 외과의 인식과 외과의의 지위가 많이 상승한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