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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28 11:56:46

농민학생연대활동

농활에서 넘어옴
1. 개요2. 내용
2.1. 식사2.2. 규율2.3. 주체2.4. 교양2.5. 총화2.6. 작업
3. 평가4. 비판
4.1. 봉사가 맞는가?4.2. 열악한 활동 여건4.3. 국산품 이용 강요

1. 개요

약칭 농활. 농번기에 대학생들이 농촌으로 가서 농사 일을 돕고 농민과 학생 사이의 연대를 다지는 행사이다. 흔히 "농촌봉사활동"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고 대학 밖의 사람들도 이런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농민학생연대활동"이다. 왜 봉사라는 말 대신 연대라는 말을 쓰냐면, 봉사라는 것은 '여유있는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에 암묵적으로 사회의 계급을 인정하는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대는 '품앗이'와 비슷한 성격으로 농촌에 가서 그들과 교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계급적 성격에서 탈피할 수 있다. 다만 최근 이런 분위기에서 벗어나 "농촌봉사활동" 성격의 농활을 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으며, 농촌학생연대활동이라는 공식명칭 대신 '농촌활동'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

그 시초는 소설 상록수에서도 나타난 브나로드 운동과 같은 일제강점기의 농촌 계몽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다만 이 시기의 운동은 인도주의에 기반한 봉사 운동에 가까웠기 때문에 현재의 농활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해방 후 6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향토개척단의 운동 등 집단적이고 체계적인 농활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농활은 농촌 문제의 본질과 해결책을 빈곤에서 보았다. 70년대 군부독재 시기에는 팀 단위의 농촌 활동이 있었다. 이는 당시 정부의 일방적 정책과 사회 구조의 모순이라는 배경에서 민중과 연합해서 사회 변혁을 꾀하고자 했던 학생들이 이끌었던 운동이었다. 이 시기의 농활은 팀 단위로 진행되어서 분산적이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은 농활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시기였다. 80년대 대중적인 관심을 받을 수 있는 대중 운동으로서의 농활의 필요성이 요구되었다. 이 시기에 농활은 팀 농활에서 총학생회 등의 기구가 관리하는 과 단위 농활로 변한다. 87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가 출범하여 전국적 단위의 농활이 시행되고, 이후 전대협의 후신인 한총련과 전국농민회총연맹의 연대 사업으로 농활이 추진되어 대학생의 연례 활동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시기에 농활에 참여한 대학생 수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연간 1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총련 주도의 농활은 농민 의식화 교육에 치중하여 농민들에게서 거부당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에는 학생이 농촌으로 가는 것만이 아니라 농민들이 학교로 와서 축제 때 일손을 거들거나 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연대 활동을 이루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대학 사회의 탈 정치화와 운동권의 퇴조로 인해 학생운동에 대한 학생들의 호응과 관심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대학 사회의 분위기 아래에서 농활의 성격도 변하게 되었다. 이 시기 이후 농활은 농촌 계몽, 농촌-학생 연대의 의미보다는 농촌 봉사 활동으로서의 농활로 변모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한편 농활이 본래의 목적보다는 학생회 강화 등 다른 목적을 위해 변질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도 이 시기이다.

2. 내용

농활은 각종 행사 중 운동권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행사 중 하나이다. 2000년대 이후 내용적인 측면은 많이 변화했지만 형식은 여전하다. 보통 과 대표를 '마을대장', 학생회에서 농활을 담당하는 이를 '작업반장'이라고 호칭한다. 일반적으로 숙박은 마을 회관을 빌리게 되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주변 폐교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2.1. 식사

식사는 원칙대로는 세 끼 모두 장을 봐 와서 직접 준비해서 회관에서 학생들끼리 먹는 것이 원칙이다. 원래 이 원칙이 생긴 이유는 군사정권 시절 진행된 농활에서 공안 당국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시절엔 뭔가 받으면 주는 사람이 서운할 정도로 강박적으로 거부할 정도였다. 당국의 감시망은 삼엄했고 물질적 급부를 제공하는 농민이 심지어 진짜 순수한 농민인지 장담할 수 없는 시절이었기 때문. 꼬투리 잡히면 어떻게 불리하게 작용할지 모르던 시절이었다. 또 덥석덥석 받다보면 대가를 받는 것처럼 오해를 살 수 있다. 군사정권 이후 농활에선 이 목적이 더 부각됐다.경우에 따라 주민들께서 반찬을 조금 주시거나 다 같이 모여서 마을 잔치 식으로 주민분들과 다 같이 먹기도 한다. 대신 주는 건 되도록이면 남기지 않는 것이 좋다. 새참 같은 건 그냥 적당히 받아 먹어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데, 주는 걸 안 먹으면 그건 그거대로 실례이기 때문이다.

보통 농활대 내에서 당번을 돌아가면서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원칙이고, 여기서 평소에는 확인하기 어려운 친한 학우의 요리실력을 엿볼 수 있다. 손맛을 힘껏 발휘해 만든 제대로 된 한 상이 나올 수도 있고, 음식의 형체를 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식탁에 올라올 수도 있다. 일부 농활은 아예 근무지원부서마냥 농업 관련 활동에서 열외되어 식사 등을 준비하는 일만 전담하는 이들을 뽑기도 하는데, 밥 잘하는 이가 여기에 있다면 농활 내내 밥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메뉴는 아무래도 봉사 활동의 일환으로 와서 비싸고 화려한 걸 먹는 건 눈치 보이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소박한 가정식이 된다. 고기보다는 채식 위주인 것도 특징으로, 피자치킨을 식사 시간에 시켜먹는 등은 자제하는 편이지만, 요새는 농촌 사람들도 이런 거에 크게 개의치 않는 경우도 많아 밤에 뒷풀이용 야식 정도로 먹는 건 뭐라 하지 않는다. 농촌이 고령화되었다지만 일단 젊은 귀농층도 꽤 있고, 노인들도 의식이 많이 바뀌어 되려 자기들도 이런 것들을 즐겨 먹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읍내에 친인척 등이 하는 배달 음식점이 있다면, 시켜 먹는 걸 장려하거나 주선하기도 한다. 한솥도시락 같은 곳에서 시켜 먹는 것도, 뒷정리만 잘 한다면 요즘엔 문제될 게 없으므로, 아예 자체 취사를 관두고 이쪽으로 선회하는 경우도 있다.

2.2. 규율

보통 대자보에다 이번 농활에서 서로가 지키기로 하는 규율을 적어 벽에다 붙여놓는다. 규율은 매 농활마다 달라지지만 결코 빼놓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규율들 또한 있다. 변화하는 규율의 예로는 8~90년대에 '양키말을 사용하지 말자'는 규율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비속어와 은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규율로 대체되어가는 추세를 들 수 있다. 2010년대 이후에 와서는 그냥 뼈대만 남아 안전 수칙이나 기본 예절정도만 남게 되었다. 만약 규율을 어기게 될 경우 밤에 있는 '총화'에서 신나게 까이게 되기도 한다.

2.3. 주체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 사실상 맞다.[1] 보통 주체의 경우 해당 일을 잘 맡아서 할 수 있는 사람을 고르는데, 농활에서 일반적으로 생활에 필요한 각종 일을 주체에게 맡기지만, 주체만 그 일을 하지는 않는다. 주체도 매번 농활 때마다 바뀌게 되는데, 봄 농활 때는 없는 '벌레주체' 같은 것이 여름 농활 때는 생겨나기도 한다. 보통 많이 생기는 것으로는 신발주체(신발정리), 청소주체(마을회관 청소), 모자, 장갑주체(각각 관리) 등이다.

2.4. 교양

작업이 끝난 후에 간단히 공부나 토론을 하는 자리이다. 당연히 주요 주제는 농활을 온 만큼 농촌 현안이고 그 외에 주최 측의 성향에 따라 정치적인 소재가 나오기도 한다. 농촌 현안에 대해 하는 경우에는 가끔씩 농민회 소속 등 농촌 주민분을 모셔 와 다 함께 말씀을 듣기도 한다. 그 외에도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는 민중가요를 배우기도 하고, 민중가요 및 문화선동의 맥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역할도 한다. 이 때문에 '농촌봉사활동'으로 농활을 온 경우에는 정치적으로 매이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교양을 빼기도 한다. 교양을 뺀 농활에선 이 시간은 개인 휴식 및 뒷풀이 시간으로 활용된다.

2.5. 총화

농활의 꽃. 그날 하루 있었던 일을 다 같이 얘기하며 규율이나 주체, 작업적인 측면에서 어떤 점이 잘 되었고 잘 안 되었는지를 이야기 하는 자리이다. 구 공산 국가에서 공동작업을 마치고 작업 총화를 했던 것에서 짐작 할 수 있듯이 총화 역시 운동권의 흔적이다.

보통 전날 뒷풀이 때 술을 진탕 먹고 꽐라가 되는 등 규율을 어겼을 때 어긴 당사자나 잘못한 일이 있는 사람들이 먼저 나서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선배들의 폭풍 같은 질타가 이어진다. 총화는 마을 분위기에 따라 시간이 매우 달라지며, 인원 수에도 영향을 받는다. 짧으면 30분이 조금 넘을 수도 있지만 길어지게 되면 5시간이 될 수도 있다. 일정 짜는 사람들이 유연하게 대처하면 작업조 단위로 총화를 하게 해서 시간을 단축하기도 한다.

2.6. 작업

농활의 핵심 활동 중 하나는 역시 직접 현장에서 하는 농사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방문하는 지역의 특색에 맞춰 다르긴 하지만, 가장 쉬운 풀뽑기도 농사일에 익숙하지 않은 대학생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 봄 농활 때는 모내기, 거름주기, 종묘심기 등을 진행하며, 본 농활이라 할 수 있는 여름 농활에는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된다. 어떤 농사일이라고 힘들지 않겠냐마는 키가 크고 잎이 무성한 작물 작업(고추, 담배 등)은 뜨거운 날씨로 인해 더욱 쉽지 않으며, 가끔 축사로 가서 가축의 분뇨를 치우는 경우도 있는데 담당 작업자에게는 애도를 표한다.

모든 작물, 특히 열매작물의 경우 흠집이 생길 경우 상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조심히 다루어야 하고, 어떤 농민분들은 이런 작업에는 학생들을 일부러 시키지 않기도 한다. 농활을 다녀와서는 밥상에 올라오는 모든 작물에 대해 정말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게 될 것이다.

작업은 보통 농활대의 농주체, 작업반장과 마을의 농주체가 상의해서 정하게 되며, 홀몸 어르신이나 고령의 어르신이 계신 곳에 농활대를 우선적으로 배치하기도 한다. 농촌의 논과 밭에는 벌레들이 많고, 작업을 하다 잎에 쓸리거나, 풀독이 오르는 경우도 있으며 여름에는 햇볕에 쉽게 타기 때문에 덥더라도 작업복은 꼭 긴옷으로 준비해 가도록 한다.

농활의 난이도를 결정하는 요인 중 하나이다. 농주체나 작업반장이 자신을 담배 작업, 축사우리 청소 등에만 배치한다면 평소에 잘못한 게 없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자.

3. 평가

오늘날에는 학생들 사이의 경쟁만능주의, 개인주의, 청년실업같은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농활에 참여하는 대학생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어서 사실상 쇠퇴하였다.[2] 이런 상황에서 2003년에는 성균관대학교가 농활을 '운동권의 유물'로 규정하면서 농활을 거부하였고, 2004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농민에 의해 발생한 성추행이나 성폭력 문제로 인해 농활을 철수하는 등, 아예 총학생회 차원에서 농활을 거부하는 흐름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농활을 벗어나 자신의 전공을 살린 활동을 하거나, 중소기업을 체험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등의 대안이 제시되고 있다. 비록 농활의 의도는 좋지만 과거 한총련의 영향으로 인해 사실상의 후신인 대진연을 좋지 않게 보는 농활 단위들도 많으며, 최근에는 많은 농활 단위들이 자기 마을에서는 최대한 정치색을 지우려고 노력하는 추세다.

또한 농활의 경우 학생들 스스로 자치를 학습하기도 하는데, 일종의 아나키즘적인 성격을 지닌다. 규율이나 작업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하기도 하고, 농활에 와있는 기간 동안은 최대한 공동체와 함께하려 노력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학과 특색에 따라 다르지만, 농활에 맛들이게 되면 헤어나올 수 없다. 보통 첫 농활 때는 어찌저찌 끌려가는 경우가 많지만, 9박 10일에 달하는 여름농활 기간에 농활 체질의 사람은 농활에 참맛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다. 갔다오면 농작물의 가격이 드는 노동량에 비해 말도 안 되게 싸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3]

또한 대학생활에서 오랜 기간동안 공동생활을 하는 경험하는 몇 안 되는 행사이기 때문에 농활을 함께 다녀온 구성원끼리는 매우 친해지는 경우도 많고, 농활 커플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농활 때 밤일하다 들키는 커플 꼭 나온다. 혹은 도시에서 벗어난 한적한 농촌에서 여유를 느끼거나, 늦은 밤 도시 밤하늘에서 보이지 않는 별을 바라보며 옆의 있는 사람과 진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낭만이 있기도 하다. 반대로 이러한 공동생활 하는것 자체를 싫어한다면 농활에 참여할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편이 훨씬 낫다.

학교마다 다르지만, 운동권의 흔적이 거의 사라지면서 그냥 봉사활동으로써의 농활만 남은 학교/학과의 경우에는 그냥 농촌에 가서 봉사하고 술 먹고 온다. 이 경우엔 MT 저리가라 할 정도로 만 퍼먹는 경우도 있다. 물론 사설 농활은 봉사점수 인정이 안되니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학생들이 바라보는 농활의 시각이 이 정도라면 농민들의 농활에 대한 인식은 정말 좋거나 혹은 극도로 나쁘거나 둘 중 하나다. 보통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은 한창 바쁜 농번기에 학생들이 와서 힘든 일도 도맡아 하고 말벗도 되어주기에 마을에 활기가 돈다고 좋아하신다. 나름 지역에서 유명한 학교의 경우에는 학생들이 잘못하면 학교가 욕을 먹는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자중하고 열심히 일해서 농민들도 좋아한다.

반면에 보통 마을에서 농사짓는 젊은 농부 혹은 비싼 작물을 재배하는 농민들은 농활이라고 하면 일단 색안경을 끼고 볼 정도로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예전과 달리 대학생들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관계로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없어서 실수를 연발하는 것이 첫째 문제다. 비싼 과일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생기면 상품가치가 반토막이 나는데 학생들이 옮기다가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예전에나 대학생들이라니 배운 사람들이라 막일 못할 수도 있지 하며 넘겨 줬지, 요즘 농부들은 나이가 많아도 대학 나온 사람들도 많고, 젊은 귀농 농부라면 도리어 농활 온 대학생들보다 학벌이나 전 직장이 더 좋은 사람들도 수두룩하니 절대 좋게 안 봐준다. 또한 일부 몰지각한 학생들은 밤중에 다른 밭에 가서 과일을 서리하거나 일이 힘들다면서 투덜대고, 심지어는 열심히 일하는 농부들 옆에서 SNS에 올릴 사진을 찍는 등 개념없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농활 규모가 좀 된다면, 이걸 사전에 막기 위해 사진만 전담할 봉사자를 뽑아 두고, 활동 후 사진사가 사진에 나온 사람들에게 사진을 돌릴 테니 대신 중간에 SNS 사진질 하지 말라 등의 주의를 주기도 한다.

농활 때는 같이 간 학우들 혹은 농민 분들과 술을 많이 먹는 경우가 흔한데, 너무 늦은 시간까지 시끄럽게 놀면 마을 주민께 폐가 되므로 늦은 시간에는 밖으로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4. 비판

농활의 성격을 정확히 모르고 덥석 참가했다가 충격과 공포를 느낄 수 있으니 새내기들의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그나마 오늘날 전반적으로 농활이 쇠퇴하고, 농활을 거부하는 학생회가 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식이 전환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4.1. 봉사가 맞는가?

봉사가 맞다. 봉사활동 성격의 농활이 늘어가는 이유. 다만 본인이 원해서 하는 사설 봉사활동이기에 1365에서 봉사점수 인정은 되지 않는다. [4]
애초에 노동력의 무상제공은 봉사 또는 착취 둘 중 하나뿐이며, 참가자들이 노예로써 착취를 당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봉사로 볼 수밖에 없다. 개요에서 지적한 '품앗이'가 성립하려면, 본인의 노동력 제공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를 기대할 수 있어야 하나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품앗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교류와 연대가 목적이라면, 굳이 노동력의 무상 제공 말고도 다른 가능한 방안들은 무수히 많다.

4.2. 열악한 활동 여건

위 내용 문단에도 간락히 서술되어 있지만, 그 인원을 수용할 만한 숙박 시설이 없는 곳에서 임시방편으로 마을 회관 등을 빌려 지내다 보니 이런 저런 불편이 발생한다.

잠자리가 불편한 건 둘째 치고 일주일에서 열흘 가까운 기간 동안 각자 필요한 만큼 충분히 씻을 수가 없다. 씻는데 걸리는 시간은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는 데다, 시설 좋은 마을회관이라 해도 그 인원을 수용할 만큼의 세면장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은 곳도 많다. 마을회관이 이 정도라면, 폐교에서는 어느 정도인지는 상상에 맡긴다.

개별적으로 목욕탕이라도 가서 씻으면 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목욕탕 가려면 버스 타고 읍내에 나가야 한다. 애초에 목욕탕을 가기 위해 개인적인 시간을 낼 수도 없다. 차량을 갖추고 오는 농활 팀은 단체로 목욕탕 다녀오는 시간을 수시로 내기도 하고, 좀 신경을 쓴 경우는 마을 주민들의 지원 혹은 자체적으로 간이 샤워 시설 등을 설치해 그럭저럭 씻을 수 있는 여건을 갖추기도 한다. 농활 일이 늦게 끝나면 읍내 목욕탕들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는 일이 왕왕 있기에, 포기하고 시골에서 씻을 방법을 모색하거나 총무가 사전에 읍내 목욕탕과 연락을 해 영업 시간을 연장해 달라고 해 해결하기도 한다. 요즘엔 농민들도 옛날처럼 며칠에 한 번 씻고 그러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도리어 농활 온 사람들이 지저분하게 안 씻고 있으면 싫어하므로 씻는 것은 과거에 비해 철저히 보장해 주는 편이다.

가뜩이나 잠자리가 불편한데, 충분한 수면 시간이 보장되지도 않는다. 낮에 농사짓느라 저녁 때가 되면 녹초가 되어있으나, 마을분들과 교류도 술도 마시며 해야 하고, 교양활동과 총화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 새벽까지 이어지기도 하는데, 다음날 해뜨면 얼른 아침먹고 또 일하러 가야 하므로, 결국 수면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개인이 원하면 일찍 잠들 수 있게 방을 구분하거나 해 주는 곳도 최근엔 늘고 있는데, 대학 MT 등도 음주 강요가 확연히 줄고 있으니 당연한 추세다.

문제는 이게 처음 하루 이틀이라면 견딜만 하지만, 일주일, 10일쯤 되면, 내가 왜 내 돈 내고 이짓을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4.3. 국산품 이용 강요

일부 농민들이 먹을거리에 있어서는 과도할 정도로 국산품을 강요한다. 밀가루 같은 걸 장 봐와서 사와 전 부치고 있는 식사 당번 옆에 서서 포장지의 원산지 표기 보고는 중국산이네 뭐네 하며 시비 거는 농민들이 은근히 많다. 특히 90년대의 신토불이 운동 시절이나 한미 FTA 논란이 일던 시절에는 꽤 심했다.

당장 그 농민들만해도 중국에서 생산된 의류를 걸치는 등 본인은 외국산 공산품을 버젓이 쓰면서 유독 농산물만 국산을 써야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대개 나이 어린 대학생들이 참고 넘어가지만, 지나치거나 하면 중간에 관두고 단독으로 귀가해 버리거나 싸우는 등의 일이 생기기도 한다. 마을 주민들과 협의하여 현지 생산품을 미리 혹은 도착 후 구매하여 이런 마찰을 최소화하는 경우도 있다. 주민들이야 자기들 논밭에서 키우는 걸 자원봉사자들이 사 준다니 환영하면 하지 싫어하는 일은 없다.

요즘엔 이런 것으로 터치하는 경우가 많이 줄었다. 농민들도 자기들 역시 100% 국산만 먹고 입지 못한다는 걸 자각은 하기 때문에, 학생들한테만 크게 뭐라 하는 건 그 농민의 성격이 이상한 게 아닌 이상 드물다.


[1] NLPDR계에서만 쓰는 용어는 아니다. 운동권에서는 정파를 가리지 않고 잘만 쓰며 비권에서도 간혹 쓴다. 최근에는 그냥 '담당'이라는 뜻으로만 인식된다. 사실 농활 전용 용어도 아니고, 운동권 단체에서 흔히 쓴다.[2] 물론 반대로 취업을 위한 봉사활동 스펙을 쌓기 위해서 일부러 참가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봉사활동의 경우 1365 자원봉사포털에서 봉사점수 인정이 가능한 곳에서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3] 드는 노동량이 많은 이유는 기업형 농업이나 거대농장형으로 넘어간 서구와 달리 한국의 농업이 여전히 소규모 개인 자영농 수준의 장비와 노동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며 싼 가격은 이를 정부보조금으로 떼우기 때문이다.[4] 2010년 이후 농활 봉사시간을 인정해주는 학교들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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