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01:39:19

노진(고려)

盧稹
(? ~ 1376)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1. 개요

고려 후기의 인물. 작위는 창성군(昌城君), 시호는 제효공(齊孝公)이다.

2. 생애

노진은 부친 노책 생전에 일찍이 창성군으로 책봉된다. 그러나 공민왕이 주도한 병신정변으로 부친은 길거리에서 살해당하고 형 노제는 하옥된 뒤 참수되며, 노진 본인도 체포되고 지방으로 유배된다. 노진이 개경으로 돌아온 것은 공민왕 집권 후반부로, 소환된 노진은 판밀직사사로 임명된다.

공민왕 21년(1372) 11월 판밀직사로 있을 때 의 수도 웅천부에 사신으로 파견된다. 노진은 약재를 하사한 홍무제에게 사례를 표하고 해산물과 포를 바쳤으며 중궁과 동궁에도 방물을 바친다. 『태조고황제실록』에서는 노진의 이름을 '노정(盧禎)'이라고 오기했다.

공민왕 23년(1374) 6월 폭우로 노국대장공주의 영전에도 물이 샜는데, 공민왕이 대노해서 공사 책임자를 불러온다. 동역관(董役官)이었던 평리 노진과 찬성사 한방신은 옥에 갇히고 장형을 당한다.

3달 뒤인 같은 해 9월 최만생, 홍륜 등이 공민왕을 시해하는데 노진의 아들 노선이 홍륜의 모의에 가담한다. 이인임우왕을 옹립하고 곧 역모 용의자들의 심문이 이뤄진다. 노선은 끝까지 죄를 자복하지 않았으나 다른 이들의 증언에 역모에 가담한 정상(情狀)이 드러나 처형된다. 노진과 노진의 장남 노정, 막내 노균은 노선의 죄에 연좌돼 먼 곳으로 유배된다. 그래도 노진의 가산은 적몰되지 않았는데, 우왕 2년(1376) 1월 정당문학 이무방이 파면을 무릅쓰고 시중 경복흥에게 강하게 주장한 끝에 노진은 집까지 잃는다.

같은 해 12월까지 집의 김승득 등 간관이 공민왕을 시해한 역적의 일가족도 마찬가지로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우왕에게 끈질기게 주장한다. 이들 간관의 청은 부모와 처자식, 형제는 처형하고 3~4촌은 관직을 삭탈하고 평생 서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우왕은 간관의 뜻에 동의하는 한편, 이미 역적의 아버지와 형제는 유배됐으니 죽음은 면하게 해달라는 수시중 이인임 등의 요청은 듣지 않는다. 찬성사 목인길이 에서도 남편의 죄로 부인을 죽이지는 않는다고 해 역적의 부인들만큼은 연좌를 피할 수 있었다. 노진은 결국 유배지에서 두 아들과 함께 처형된다.

공양왕 원년(1389) 11월 딸 노씨가 왕비로 세워지니 공양왕 3년(1391) 7월 시호가 추증된다.

3. 가족관계



[1] 민제(閔霽)의 넷째 사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