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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9 20:30:15

내가 히틀러라니!/비판 및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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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
2.1. 나치 미화 논란
2.1.1. 흥미 본위의 대체역사물 자체의 문제?
2.2. 가정에 대한 현실성2.3. 결말 관련 논란

1. 개요

내가 히틀러라니!의 비판 및 논란에 대해 정리한 문서.

2. 내용

2.1. 나치 미화 논란

히틀러, 나치라는 민감한 소재로 인해 독자댓글란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작가가 디시인사이드 기갑 갤러리에 남겼다(원문).

히틀러와 나치를 소재로 삼는 것 그 자체는 작가의 말대로 문제가 없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부분은, 히틀러의 몸에 빙의된 주인공의 행동 때문이다. 자신이 히틀러에게 빙의된 이후 행동 방침을 '나치를 쳐죽이고 정의를 구현하는' 방향이 아닌, 적기가 휘날리는 베를린이나 원폭이 투발되는 베를린을 막아서 히틀러에 빙의된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기 때문이다.[1] 따라서 주인공은 개인의 신변 안전을 최우선으로 본인의 역사적/군사적 배경지식을 총동원하였고, 그 결과 진행된 독일의 전쟁 및 국정 수행 방침은 나치 독일의 만행을 막기보다는 미국과의 전쟁 회피 및 이미 엎질러진 물인 소련 및 영국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로 잡히게 된다.[2]

작중 주인공의 캐릭터 자체도 비판의 여지를 피할 수는 없다. 주인공은 스스로가 나치 동조자가 아니며, 히틀러를 미친놈이라 규정하지만, 어쨌든 히틀러에 빙의되었으니 안락하게 살다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주변 여자들에 손을 대는데다가 거기다 빙의가 되면서 히틀러에 감정이입이라도 되는지, 1권서부터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연합국 정상들을 '빨갱이 물이 든 루즈벨트', '마누라가 일곱인 뚱땡이' 등으로 표현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물론 주인공 입장에선 아무리 배경을 알고 있다 해도 자긴 아무 잘못도 없고, 살려고 노력하는데도 자기를 전범재판에 세워 죽이려고 발악하는 걸로 보이니 빡칠만 하다 총통 각하가 갑자기 이상한 말장난을 치신다 아우슈비츠에는 유대인 대신 정치범이 수감되며, 학살기능만 제거한 채로 계속해서 운영된다. 누차 말하지만 주인공의 행동 전략은 '정의구현'이 아닌 '히틀러에 빙의된 자신의 안락한 미래'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문제와 한계점을 내포하고 있는 나치 체제 자체를 손 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주인공의 히틀러가 살아남아 자신의 신변이 보장되는 체제는 곧 울펜슈타인 시리즈제3 제국처럼 나치 독일이 승전하여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의미하는 것.

이러한 문제는 유대인 관련 에피소드에서 절정에 이른다. 반제 회의의 결과물을 뒤틀어 유대인 절멸 계획만은 중단시켰지만 여전히 유대인을 대상으로 잔혹한 탄압이 계속되고 있으며, 절멸 정책 대신 '팔레스타인으로의 대외 추방'을 결정하고 실시하며 그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간 뒤 아랍인에게 공격당하거나 영국, 프랑스가 설치한 임시수용소에서 병이나 굶주림으로 또 숱하게 죽어나간다. 해상에서는 입국을 막으려는 영국 해군과 어떻게든 돌아가지 않으려는 유대인 난민들 사이에 사격전이 벌어져 다수 사상자가 발생하기까지 했다. 한 마디로 홀로코스트아르메니아인 대학살로 만든 것이다. 다만 작중에서 기술된 사망자 숫자는 아랍인에게, 영국군에게, 수용소에서 죽은 숫자를 합쳐서 5만 명을 좀 넘는 정도로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인원에 비하면 극소수이긴 하다. 그 외에 격화된 아랍인과의 충돌로 인한 사망자는 명확히 기술하지 않았다.

주인공 만행의 극치로 이 과정에서 유대인 4,000명이 탑승한 화물선을 영국군이 돌려보내자 주인공은 망설임 없이 승무원들만을 내리게 한 다음 화물선을 시범케이스로 격침시켜 4,000명을 배와 함께 수장한다. 이 행동의 목적은 돌아오면/돌려보내면 죽인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함인데, 역설적으로 주인공의 본심은 원래의 히틀러가 반유대주의를 천명하며 권좌에 올랐기 때문에 여기서 취소했다간 도리어 역풍을 맞아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수 있고, 유대인들을 계속 독일 안에 두다간 언젠가는 다시 학살을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내가 유대인을 죽인 학살자가 되기는 싫으니 팔레스타인으로 보내서 어떻게든 살인을 떠넘기고 나는 끔찍한 일을 하지 않겠다는 책임 회피다. 정작 4천 명을 한 방에 날리면서도 "그래도 진짜 히틀러보다는 덜 죽인 거 아니냐"는 말을 하고 있으니, 할 말이 없는 셈이다.

그러면서도 히틀러로 오래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나 발버둥쳤건만 정작 진짜 히틀러보다 겨우 193일밖에 더 살지 못했다. 진짜 히틀러가 저질렀을 학살을 상당 부분 막아냈기에 유럽에서의 사망자 수는 실제 역사에서보다 상당히 적을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보다 덜 죽였다고 해서 유대인들을 지중해에 수장시키고 런던을 불바다로 만든 주인공이 죄가 없다고 할 수 있는지는 한 번 고민해보자.[3]

또한 작품의 지나친 반일, 혐일 묘사도 비판을 받고 있는데 2차대전이란 주제에서 아무리 시대상 반일감정이 없을 수 없다곤 하나 주인공은 작중 시시때때로 일본인을 쪽빠리 원숭이라고 욕하고 일본에 대해 경멸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일본인을 몰락 작전으로 4500만명 이상이나 사망시켜 결과적으로 2차대전의 총 사망자 수로 보자면 실제 역사보다 더 많게 만드는 등 과도한 반일,혐일감정 묘사가 거북하게 작품의 맥락을 끊기까지 한다는 평이 있기도 하다. 이 반일감정의 정점은 (주인공이 빙의한) 나치 독일히틀러가 일본 제국과 일본인을 사악하다고 욕하는 장면에서 극치를 이루는데[4] 허나 이 부분은 반대로 히틀러가 미국 공격에 개념없이 동참한 것을 돌려 까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으로 고립주의가 박살났는데 그걸 좋아라 하고 동참하면 더 답없는 나치 미화물 자체이지 않는가? 또한 결국은 한국이 잘 되는 수많은 대체역사물의 변주란 비평도 존재한다.

더 나아가서 최대 물주 노릇이 가능한 미국이 반공 친미적 한국인이 권력을 잡게 할 수 있는 지원 가능한 분기가 분명 있음에도 작품의 주인공은 신분제의 우위를 가진 이우를 선택한 시점에서 이미 디스토피아는 시작된 셈이다.

작가 역시 이러한 주인공의 태도나 나치가 승리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으며, 작가의 개인 가치관이 곧 주인공의 가치관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지나친 비약이다. 자신의 블로그에 달린 댓글 등을 통해서도 주인공의 결말에 대해 '나치 따위와 연관을 맺고 끝이 행복하면 벌받습니다' 라고 촌평을 하기도 한다. 작품의 집필 의도 자체가 나치 체제 및 독일의 미화에 있기보다는, 군사 매니아적 입장에서 나치가 승리한 IF를 묘사하는 방향에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원래 역사에선 진즉에 전역한 평범한 군필 젊은이였던 주인공은 안락한 일생과 생존을 보장받으려다 어설프게[5] 나치의 도움을 받아 독립한 역사가 변화된 이후의 세계 속 한국에서 세뇌 교육의 영향으로 공기처럼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국민 모두가 민주주의에 냉소적인 살벌한 파시즘적 세상에서 그 자신도 잔여 복무기한이 생겨 전쟁터에서 굴러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자기 자신도 일종의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2.1.1. 흥미 본위의 대체역사물 자체의 문제?

이는 어느 정도는 흥미 본위로 근대사(혹은 그 이전까지도)에서의 거시적인 흐름을 비트는 대체역사물 자체의[6], 필연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게 상대적이며, 더욱이 같은 의견을 공유하더라도 이를 얼마나 더 중요하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는 사람, 지역마다 다르다. 예를들어 한국에서는 단순히 흥미와 재미로 이야기하는 트루롬 드립도 터키나 그리스인들에게는 불쾌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한국인들 상당수가 나치를 악으로 생각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이에 대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또 나치를 묘사함에 있어 얼마나 허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선 역시 나라나 민족마다 다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나치가 실제 역사보다 덜 타락해서 잘 되는 대체역사도 누군가에겐 나치가 나쁘긴 해도 먼 나라의 일이기도 하고 단순히 흥미 본위의 if로 다루는 게 용인되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것은 서구권의 대체역사 프로젝트인 일 베티사드의 논란과도 통하는데, 해당 작에서 일본은 군국주의적 성향이 약해져서 한국을 류큐와 함께 연방제 형식으로 병합하고 조선 왕조도 남겨두는데, 군국주의 중국이 1920년에 일본 제국의 식민지 조선을 침공해서 실 역사의 일본처럼 악독하게 식민지배를 시작하고, 생체실험등의 전쟁범죄를 저지른다. 이에 일본이 조선의 독립군을 지원하고 이후 중국이 몰락하며 한국이 독립한다. 이후 일본이 한국에 군대를 보내 새 임시정부를 세우고 한국의 정치세력과 합의 하왕정을 복원하고 천황이 조선 왕을 겸하는 형태로 다시 식민지 조선과 병합하게 된다. 해당 작에서의 일본은 가혹한 식민통치를 벌인 중국에 비해 몹시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결국 이것도 달리보면 서구권에서도 일제가 악하다는 인식은 있긴 하지만, 자신과는 멀리 느껴지는 동아시아 역사에 대해 단순히 흥미 본위로 비틀고, 선악 구도를 바꾸다보니, 당사자인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몹시도 민감하면서도 불쾌한 묘사로 보이게 된다. 물론 당연히 일제 식민지배의 당사자인 한국인 입장에서 이를 비판하는 것 역시도 잘못되었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보면 비단 해당 문서의 작품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해당 지역의 작가나 소비자층 입장에서는 '자기네 역사와 별 관련없는' 멀어보이는 역사에 대해 대체역사 소재로서 흥미 본위로 비트는 대체역사물에 대해, 다른 누군가에겐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문제를 가볍게 다루게 되는 것에 대해 논란이 생길 소지는 다분해지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2.2. 가정에 대한 현실성

사실 평가와 논란을 잠시 제쳐두고서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의문스러운 점들이 있다. 제일 문제는 히틀러만 바뀐다고 전황이 확 바뀔 거라는 가정 자체가 무리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소설의 전개 자체가 불가능하니 넘어가자.

2.3. 결말 관련 논란

2차 대전이 독일의 판정승으로 끝난 후 주인공이 폭탄테러로 비명횡사하고 수십 년 후의 한국에서 깨어나는 결말에 많은 독자들이 불만을 터트렸다. 나치 독일이 승리하고 꿈도 희망도 없는 암울한 세계가 펼쳐지는 것을 기대한 독자들은 어거지스러운 왕정복고로 독일이 민주화되었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 정작 독일과 비교되게 한국은 그대로 독재가 유지되어 꿈도 희망도 없는 것으로 묘사되어 더욱 그러했다. 둘다 독재도 아니고, 둘다 민주화도 아니고, 한국만 민주화가 되는 것도 아닌, 제일 가능성이 낮은 결말을 채택해버린 것.

이에 대해 작가는 <내가 히틀러라니!>는 웹소설만이 아닌 종이책으로도 출판할 것을 염두에 둔 소설이기에 검열을 신경 써서 그런 결말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링크 주인공이 나치 독일의 지도자로 오래도록 잘 먹고 잘 살거나 나치 독일이 승승장구하는 내용이었으면 절대로 출판될 수 없었을 것이며 작가도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나치즘이 지속되는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1] 다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나치의 대빵인 히틀러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단지 밀덕일 뿐이었던 평범한 소시민인 주인공에게는 히틀러가 여태 해왔던 악행을 그나마 덜한 수준으로 제동을 거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갑자기 자국을 향해 사보타주 정책을 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만악의 근원인 히틀러(자기 자신)를 없애자니 생존이 최우선 과제인 사람이 자결을 생각할 리가 없으니까.[2] 위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자신(히틀러)가 너무 갑자기 정책+행동방침을 선회해버리면 오히려 강경파 나치들에게 암살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가지고 있었다.[3] 작중에서 주인공이 전쟁에 패배한다면 원래대로였으면 학살당했을 수백만 명을 살려낸 것은 아무도 모른 채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학살자가 되어 사형을 당할 텐데 그건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나온다.[4] 다만 이 장면은 서방 연합국에게 독일을 공격하지 말고 대일 연합전선을 결성하자고 촉구하는 선전의 일부로서, 저 문구는 노골적인 프로파간다용 멘트이다.[5] 조국인 대한민국을 위해 도왔다지만 자신이 현재 어느 나라의 수장인지, 그 나라의 도움이 과연 어떤 성격을 가지게 될 지 등의 파급효과를 조금이라도 생각해봤다면. 거기에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었다면, 미국의 참전을 돌리기 위해 한인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투자와 친미적 성향을 지닌 한인 지도부 구성 및 그들을 이용한 한국인으로 구성된 야전군 구성까지 광범위하게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나름 국외정보까지 뻗으려는 존 에드거 후버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가능성은 높았다. 즉, 미국의 잠재성을 말로만 인정한 독빠의 한계인 셈이다. 한마디로 스탈린만도 못한 시각.[6] 당신들의 조국처럼 특정 단체나 무언가에 비판적인 관점을 갖고 어느 정도 그런 비판을 목적으로 디스토피아물로 묘사하는 작품이 아닌 이상.[7] 단 외전에서 밝혀진 바로는 이 함대는 자유 프랑스에도 제대로 엿을 먹인다.[8] 실제 역사에서는 다를랑 원수가 비시 프랑스 최고함대 사령관 장 드 라보르드 대장에게 툴롱 항의 프랑스 함대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가 쌍욕을 들었다. 다를랑이 연합군에 붙은 것도 있으나 장 드 라보르드가 반다를랑 성향이라.[9] 독일 군부가 국가 안의 국가라 불릴 만큼 막강한 권한을 누릴수 있었던 이유가 프로이센에서 독일 제국으로 이어지는 통수권 체제 덕분이었기 때문. 군부의 보수파 내에서는 문민통제를 벗어난 자율성과 권한의 극대화를 보장해 준 군주정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다만 군부의 권한만 보장해준다면야 그것이 카이저든 대통령이든 총통이든 크게 상관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10] '반공'의 반대말이 '민주주의'라는 의미가 아니다. 반공 교육에 국가주의, 전체주의, 군국주의적 요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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