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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2-28 17:23:39

납속

1. 개요2. 역사와 배경3. 납속의 종류와 대가
3.1. 납속수직(納粟授職)3.2. 납속면천(納粟免賤)3.3. 납속면역(納粟免役)3.4. 납속속죄(納粟贖罪)
4. 절차와 운영5. 실제 사례
5.1. 단성 김수봉5.2. 삼척 이귀재
6. 평가와 영향7. 여담

1. 개요



조선시대에 국가가 재정 보충이나 기근 구제 등을 목적으로, 백성에게 곡식이나 돈을 받고 그 대가로 관직(공명첩), 신분 상승(면천), 역(役)의 면제, 죄의 사면 등을 허가해 주던 제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곡식(粟)을 바친다(納)'는 뜻이다. 흔히 돈을 받고 벼슬을 파는 매관매직의 일종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포괄적인 개념이다. 벼슬을 내리는 것은 납속수직(納粟授職)이라 하여 납속의 여러 기능 중 하나일 뿐이며, 이외에도 천민양인으로 해방시켜 주는 납속면천(納粟免賤), 군역을 면제해 주는 납속면역(納粟免役), 죄를 씻어주는 납속속죄(納粟贖罪) 등이 모두 이 제도 안에 포함된다.

국가 입장에서는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피폐해진 재정을 복구하고, 반복되는 대기근(을병대기근 등) 속에서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기 위한 사실상의 '특별세' 성격이 강했다. 반면, 백성들 입장에서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합법적으로 신분을 상승시키거나 가혹한 군역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공식적인 사다리' 역할을 했다.

즉, 공명첩이 신분 상승을 위한 구체적인 '수단(증서)'이라면, 납속은 그 공명첩을 발행하고 유통하게 만든 국가 차원의 '정책'이자 '법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2. 역사와 배경

국가에 재물을 바치고 그 대가를 받는 개념 자체는 고려시대부터 존재했으나,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이는 매우 제한적인 예외 조치였다. 세조 대에 흉년을 구제하기 위해 '납속수직'을 시행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당시 사대부들은 이를 매관매직이라 비판하며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해지고 군량미가 바닥나자, 조정은 생존을 위해 납속사목(納粟事目)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는 "얼마의 곡식을 내면 어떤 혜택(관직, 면천 등)을 준다"는 구체적인 가격표를 정부가 공시한 것으로, 납속이 국가의 공식적인 제도로 안착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란이 끝난 후에도 납속은 사라지지 않았다. 병자호란의 피해 복구와 17세기를 강타한 경신대기근, 을병대기근 등 전무후무한 자연재해 속에서, 국가는 굶주린 백성을 먹여 살릴 진휼곡(賑恤穀) 확보가 절실했다.

결국 정부는 납속을 상시적인 재정 보충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실제 벼슬은 주지 않는 명예직 위주였으나, 나중에는 실제 관직명(실직)을 허용하거나, 노비를 평민으로, 평민을 양반으로 올려주는 신분 상승의 기능을 대폭 강화했다. 실제로 17세기 말 을병대기근 당시 수많은 노비들이 이 기회를 틈타 곡식을 바치고 면천하여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으로 등장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신분제 해체의 신호탄이 되었다.

3. 납속의 종류와 대가

납속은 바치는 곡식의 양과 그 대가로 무엇을 받느냐에 따라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조정은 시기마다 납속사목(納粟事目)이라는 일종의 '가격표'를 공시하여 이를 운영했다.

3.1. 납속수직(納粟授職)

가장 흔하고 널리 알려진 방식인 납속수직(納粟授職)은 일정량의 곡식을 바치면 그 대가로 관직(공명첩)을 내리는 형태였다. 주로 부유한 양인이나 신분 상승을 노리는 서얼, 향리, 그리고 이미 면천된 노비들이 대상이었다. 원칙적으로는 실권이 없는 명예직(산관)을 주는 것이 관례였으나, 임진왜란 직후나 대기근 때처럼 재정이 급박할 때는 실제 벼슬(실직)을 허용하기도 했다. 삼척의 이귀재 가문은 대대로 이 납속수직을 통해 '통정대부(정3품)', '절충장군(정3품)', '가선대부(종2품)' 등 고위 품계를 지속적으로 구매하여 가문의 격을 높였다. 자세한 내용은 공명첩 문서를 참조할 수 있다.

3.2. 납속면천(納粟免賤)

납속면천(納粟免賤)천민(노비)이 곡식을 바치고 양인으로 신분이 상승하는 형태로, 조선 후기 신분 구조를 가장 근본적으로 뒤흔든 제도이다. 재물을 모은 사노비와 공노비가 주인의 허락(사노비)이나 관청의 허가(공노비) 하에 곡식을 내면 면천첩을 발급받아 노비 대장에서 이름이 삭제되고 양인으로 호적을 옮길 수 있었다. 경상도 단성의 노비 김수봉을병대기근 당시 납속사목에 따라 곡식을 바치고 통정대부 품계와 함께 면천되었다.[1] 이는 그가 훗날 김해 김씨 성을 얻고 가문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3.3. 납속면역(納粟免役)

납속면역(納粟免役)은 평민(양인)이 져야 할 국역, 특히 군역을 면제받는 형태다. 늙거나 병든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명목 등으로 곡식을 내고 군대 복무나 군포 납부를 면제받는 식이었다. 또는 납속을 통해 양반 신분(모칭 유학)을 획득하여 자연스럽게 군역에서 빠져나가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는 훗날 군역의 부담이 남은 가난한 평민들에게 집중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3.4. 납속속죄(納粟贖罪)

죄를 지은 사람이 곡식을 내고 형벌을 면제받거나 감형받는 납속속죄(納粟贖罪)도 있었다. 보통 가벼운 범죄에 한해 적용되었으나, 흉년이 심할 때는 사형죄를 제외한 중죄인도 곡식을 내면 풀어주기도 했다. 또한 유배 중인 관료가 곡식을 내고 풀려나거나(방환), 삭탈관직 당한 관리가 다시 복직(서용)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4. 절차와 운영

납속은 국가가 주도하는 공식적인 행정 절차로 이루어졌다. 흉년이나 전쟁 등 재정이 필요할 때, 조정은 비변사나 진휼청 주도로 '얼마를 내면 무엇을 준다'는 구체적인 규칙(사목)을 정해 납속사목(納粟事目)을 전국에 반포했다. 이후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거나(감진어사) 지방 수령이 직접 백성들에게 납속을 독려하여 백성들이 관아에 쌀, 콩, 돈 등을 납부하게 했다.

증서 발급 방식은 품계에 따라 달랐다. 미리 중앙에서 이름이 비워진 공명첩(空名帖)을 대량으로 받아둔 경우, 수령이 현장에서 즉시 납부자의 이름을 써서 첩을 발급했다. 반면 고위 품계나 특수한 대가의 경우, 지방에서 명단을 중앙(이조, 병조 등)으로 올리면 심사를 거쳐 정식 교지(임명장)를 내려보냈다. 이렇게 증서를 받은 사람은 이를 근거로 관아에 호적 정정을 요청하여 노비는 양인으로, 평민은 유학(양반)으로 호적상의 직역을 고침으로써 신분 세탁을 법적으로 공인받았다.

5. 실제 사례

최근 발견된 조선 후기 호적 대장 연구(권내현 교수 등)를 통해, 실제 하층민들이 납속 제도를 어떻게 이용하여 운명을 바꾸었는지가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5.1. 단성 김수봉

경상도 단성현(현 산청군)의 노비였던 김수봉(金守奉)의 사례는 납속면천의 교과서적인 예시다.[2] 17세기 말 조선은 을병대기근(1695~1696)이라는 전대미문의 재난을 겪고 있었는데, 수십만 명이 굶어 죽는 상황에서 정부는 부족한 진휼곡을 확보하기 위해 납속사목을 발표하고 노비들에게도 납속을 허용했다.

주인과 따로 살며 재산을 모았던 외거노비 수봉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관아에 곡식을 바쳤다. 그는 대가로 '통정대부'라는 명예직과 함께 가장 중요한 면천(免賤)을 허락받았다. 이 납속 행위 하나로 그의 법적 지위는 '주인의 사유재산'에서 '세금을 내는 양인'으로 뒤바뀌었다. 이후 그는 김해 김씨 성을 획득했고, 그의 후손들은 이 '납속'을 시발점 삼아 훗날 양반으로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즉, 국가의 불행(기근)이 개인에게는 신분 해방의 기회(납속)가 된 셈이다.

5.2. 삼척 이귀재

강원도 삼척이귀재(李貴才) 가문은 납속수직을 대대로 활용하여 가문의 격을 높인 사례다.[3] 이귀재 가문은 한 번의 납속으로 만족하지 않고 전략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1대 이귀재가 납속으로 통정대부를 얻은 후, 2대와 3대 역시 계속해서 곡식을 내고 더 높은 품계인 절충장군, 가선대부 첩을 받아냈다.

이들이 납속을 통해 받은 교지(공명첩)는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었다. 그들은 호구 단자를 작성할 때마다 납속으로 얻은 관직을 꼬박꼬박 기재하여 관아의 공인을 받아냈다. 이 '국가 공인 기록'이 쌓이면서 처와 며느리의 호칭이 격상되었고, 결국 4대에 이르러서는 별다른 납속 없이도 양반의 직역인 유학(幼學)으로 인정받는 기반이 되었다.

6. 평가와 영향

납속 제도는 조선 후기 사회를 지탱하면서도 동시에 무너뜨린 '양날의 검'이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국가 재정이 파탄 나고 대기근으로 수십만 명이 굶어 죽는 극한 상황에서 납속은 부족한 군량미와 진휼곡을 확보해 국가 시스템을 유지하고 백성을 살리는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또한 엄격한 폐쇄적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능력(재력)만 있다면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숨통이 되어 사회의 역동성을 불어넣고 하층민에게 상승 욕구를 자극하는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 또한 컸다. 납속의 남발은 '양반'이라는 신분의 희소성을 떨어뜨려 신분제의 형해화를 초래했다. 돈으로 양반이 된 사람들은 양반 문화를 모방하며 기존 지배층과 섞여들었고,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신분 질서를 붕괴시켰다. 또한 납속을 통해 양반(유학)을 모칭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세금(군포)을 낼 평민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이는 남은 가난한 평민들에게 세금 부담이 집중되는 악순환(백골징포, 황구첨정)을 낳았고,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민란의 원인이 되었다.

7. 여담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대부분 납속을 강하게 비판했다. 돈으로 관직을 사고파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정치를 담당하는 관료들에게 납속은 포기할 수 없는 '꿀단지'였기에 제도는 지속되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부유층에게 기부금을 받고 명예직을 주거나 세금을 감면해 주는 제도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1] 엄밀히 말하면 납속수직과 면천이 결합된 형태다. 벼슬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노비 신분을 벗어난 것.[2] 권내현, 『양반을 향한 긴 여정』, 역사비평사, 2014.[3] 한성주, 「18~19세기 삼척 지역 이귀재(李貴才) 가문 호구 자료의 현황과 의미」, 『고문서연구』 제52호,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