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일본의 근대 동양사학자이자 중국학자아다. 아키타현 카즈노시출신으로, 호인 코난(湖南)과 합쳐 '나이토 코난'으로도 더 잘 알려져 있다. 자(字)[1]는 헤이케이(炳卿)다.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 庫吉)와 함께 2차대전 이전을 대표하는 동양학자이며 전쟁 전의 야마타이국(邪馬台国)[2] 논쟁[3]과 중국의 당송변혁시대 논쟁으로 학계에서 교토학파[4]를 대표한 학자이다.
2. 생애
1866년(에도시대), 무쓰국(陸奥国) 케마나이촌(毛馬内村) 출신으로 난부번(南部藩) 번사(藩士)인 나이토 쵸이치(内藤調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요시다 쇼우인(吉田 松陰)에게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쇼우인의 통칭인 '도라지로'를 따와 이름을 지었다.나이토 코난은 6살에 ⌜대학⌟을 불과 4개월만에 습득하고, 7세에 중국24효와 ⌜사서⌟를 습득하였다. 13세에 ⌜일본외사⌟를 통독하고 시를 짓기 시작하였다.
1884년, 아키타사범학교(秋田師範学校)에 진학하여 4년 과정을 2년반만에 졸업하고, 10대에는 쓰즈레코소학교(綴子小学校)의 실질적인 교장이 되었다. 이학 후에도 미국인 선교사 갈스트 스미스에게 『만국사』(万国史) 등을 배웠다.
1887년(메이지 20년) 교토에 상경하여 오우치 세이란(大内 青巒)의 불교잡지 「명교신지」(明教新誌)의 편집에 종사하였고, 이어서 세이란의 「만보일람」(万報一覧)과 「대동신보」(大同新報)의 기자를 한 후에, 국수주의 성향의 세이쿄샤(政教社)에 입사, 기관지 「일본인」(日本人), 「아세아」(亜細亜, 「일본인」의 대리 잡지)의 편집을 더하였다. 이후 「미카와신문」(三河新聞)과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타이완일보」(台湾日報), 「만조보」(万朝報) 등의 편집으로 이름을 떨쳤다. 러일전쟁에서는 개전론을 주장했다.
젊은 시절에는 신문기자였는데, 중국 관련 문제에 있어서 1인자로서 활약하였다. 6번 가량 중국에 방문하였고, 나진옥(羅振玉)과 왕국유(王国維) 등 청말의 학자, 웅희령(熊希齢) 등 중화민국의 정치가 등과 교유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신문기자 신분으로 만주 군사점령 지역(민정 조사 작업)에 참여했다. 1909년, 외무성에 간도 문제 사견이라는 문서[5]를 제출한다. 이후 10년간 저널리스트로 근무한 후 1907년에 교토제국대학 문과대학 사학과[6]의 동양사학강좌 강사로 강단에 섰고, 이후로 교토제국대학의 교수가 되어[7] 카노 나오키(狩野 直喜), 쿠와바라 지츠조(桑原 隲蔵), 하네다 도루 등과 함께 동양사를 담당·지도하여 교토대학 동양사학의 황금기를 만들었다. 중국학과 동양사학에서의 권위자로서, 제국학사원회원·동방문화학원평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교토제국대학 부임 때 청조고증학의 전통과 서양의 문헌학적 방법을 종합해 중국사와 동서 교섭사에 영향을 주었다. 서역사를 연구하며 유라시아 대륙 각지의 유문을 해명하는 등 일본 서역사학 확립에 공헌을 했다. 오카자키 후미오(岡崎 文夫)는 교토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여 나이토 코난의 지도를 받았으며, 수당제국∙위진남북조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위진남북조통사(魏晉南北朝通史)⌟는 그의 명저로 꼽힌다.
1910년 교수 재임 기간이 1년이 되었기에, 카노 나오키(狩野 直喜) 총장의 추천으로 문학박사가 되었다. 같은 해 여섯 번째 중국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중국에서 다양한 학자들을 만났고 서화 명품도 감상하였다. 이듬해 중국 여행을 같이 한 교토대학 사람들과 교토대학에서 귀국보고전람회를 열어 전시와 함께 중국 미술에 대한 강연을 했다[8].
1914년 ⌜금세론⌟을 출간하는데, 그 내용에 중국사 시대 구분론, 당송변혁론, 중국 문화를 중심으로 동양 문화 개념을 광역화 등이 있다. 그리고 문화의 중심을 설정하는 '근세론[9]'을 중국사의 시대 구분론에 도입[10]하여 근세론을 고정화시키려고 시도했다.
1922년 9월 7일 도쿄∙교토∙다롄의 세 도시에서 적벽회가 동시에 열려 수백명의 문인이 참석해 당시 일본과 중국 지식인들의 커다란 관심을 끌었고, 그들의 서화 수집 열기를 고조시켰다. 교토의 적벽회에는 중국학의 대가 나이토 코난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송대에 근세(近世)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기도 했다. 당시 도쿄의 토요대에 유학 중이던 텅구(滕固)는 코난의 직속 제자인 이세 센이치로(伊勢 專一郞)의 중국 미술 관련 논저를 읽고 유사한 글을 쓴 바 있다. 일본의 학자들은[11] 일본 미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의지 같은 것들이 배경이 되어 일본의 문인화∙남화 열기를 불러일으켰다.[12]
1926년, 대학 60세 정년제에 따라 교토제국대학을 은퇴하였고 제국학사원에 선출되었다. 은퇴 후는 교토부 베하라촌(瓶原村, 현재 기즈가와시)에 은거하여 독서와 저서의 나날을 보냈다.
1934년 6월 26일 사망했다. 묘지는 교토 히가시야마구의 호넨인(法然院)이다.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을 맡기도 했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에 들어있는 고문 명단 중 일부. 기간은 1925년부터 그가 사망하는 1934년까지였다.
매국노 이완용이 있었던 조선사 편수회 회원으로 조선인들이 자국의 역사에 자긍심이 생기지 않도록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3. 학설
독특한 문화사관에 기초하여 중국사의 시대구분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당과 송 사이에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었다는 '당송변혁론'을 주장하여 그두 왕조 사이를 구분지었고, 진한시대를 상고로, 후한부터 서진 사이를 제1차 과도기로, 오호십육국시대부터 당 중기까지를 중세로, 당 후기부터 오대십국시대를 제2차 과도기로 설정하였다.이 설은 나이토 사후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 市定) 등의 차세대 교토학파가 발전시켰고, 송 이후 중세설을 제창하는 역연파(歴研派, 歴史学研究会)와의 시대구분논쟁이 전개되었다.
1921년(다이쇼 10년) 강연인 〈오닌의 난에 관하여〉에서는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일체 다른 류의 시합이라고 하기에, 조금도 나의 전문에 관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중략) 대체로 오늘 일본을 알기 위해 역사 연구하는 것에는 고대 역사를 연구할 필요는 거의 없습니다. 오닌의 난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그걸로 족합니다. 그 이전의 일은 외국의 역사와 같은 정도로 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오닌의 난 이후는 우리의 진실한 신체 골육에 직접 닿는 역사이어서, 이를 진실로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일본의 역사는 충분하다고 말해도 되는 것입니다"[13][14]
이 발언은 일본중세사를 논할 때에 자주 인용되고 있다.야마타이국 논쟁에서는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야마타이국에 규슈(九州)에 있었다고 주장한대 비해, 그는 키나이에 있었다고 주장하여 격렬한 논쟁을 이어갔다. 시라토리는 "동쪽의 시라토리 구라키치, 서쪽의 나이토 코난", "실증학파의 나이토 코난, 문헌학파의 시라토리 구라키치"라 칭하기도 하였다.
4. 여담
- 일본의 근대 철학자로, 일본의 독자적인 철학을 형성시킨 인물 중 니시다 기타로(西田 幾多郞)[15][16]가 있다. 그는 선불교적인 동양적 사상에 기초를 두고 그 위에 서양 철학을 도입해 서양의 논리로는 파악할 수 없는 근원적인 논리를 구축하여 독자적인 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러한 그의 철학은 1930-40년대에 걸쳐 교토학파를 형성하였는데, 이는 선사상과 결합해 독자적인 흐름을 형성하면서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타로의 철학은 코난과 연결되어 일본 군국주의의 철학적 기반으로 제공되었고, 역사적 생명의 구현을 일왕과 전쟁의 옹호논리로 개발해 이를 철학적으로 옹호했다는 비판이 있다.
- 나이토 코난의 중국회화 감상태도는 타키 세이치(瀧 精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세이치는 1910년 북경 방문 당시 단방(端方), 완안경현(完顔景賢)과 나진옥(羅振玉)의 저택을 방문했다. 이때 서화명품을 감상하였으며, 이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화에 대한 감식의 변화'라는 글을 썼다.
[1] 문인이나 학자가 짓는 필명.[2] 히미코(卑弥呼)라는 여왕이 지배하던 나라이며, 해당 나라의 위치에 대해 한 논쟁이다. 해당 내용은 삼국지의 '위지왜인전'에 등장한다. 일본 고대 최대 미스터리라는 풍문이 있다.[3] 규슈와 긴키 중 고난은 긴키를 지지했다.[4] 서양의 철학과 종교적 사상을 완전히 이해하여 그것을 동아시아 문화전통에 특화된 종교적∙도덕적 내면을 창조하기 위하여 이용한 교토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한 철학 운동에 붙여진 이름이다. 단, 프랑크푸르트 학파나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와 같이 전통적인 학파의 의미에서 철학 학파는 아니다.[5] 간도와 만주 관련 조사 작업 내용이다.[6] 1906년 12월에 문과대학이 신설되었으며 카노 코키치(狩野 亨吉)가 초대 문과대학 학장이 되었다. 코키치는 문과대학이 신설되기 전부터 코난을 사학과의 교수로 데려오겠다고 생각했다.[7] 당시 코난이 사범학교만 졸업했다는 이유로 문부성이 교수 임용을 반대했다. 그래서 2년동안 전임 강사로 근무한 후에야 정식 교수가 될 수 있었다.[8]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붕괴되면서 궁정 내부와 고미술품이 대거 유출될 때 상당수가 일본으로 유입되었고, 여기에는 일본에 소개되지 않았던 명∙청시기 명작들이 다량 포함된다. 명∙청대 문인화 관심이 고조될 또 하나의 환경이 형성된 것이다. 동시기 중국에서도 문인화 재평가 분위기가 있었는데, 급격한 서구화로 인한 변화가 전통회귀욕구를 불러 일으켰던 면이 있다. 물론 일본의 문인화 열기도 한몫했다. 1921년, 전통파회화사단 중국화학 연구회가 베이징에 설립됐다.[9] '근세'란 외부의 힘에 의해 사회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근세로서의 성격을 본원적으로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10] 중국사에서 '근세'라는 개념을 구분지으려 했다.[11] 1920-30년대에 맹목적으로 서구화에 대한 회의로 전통문화재평가가 시작되었고 문인화 열기는 다이쇼 시기(1912~1926), 일본에서 먼저 태동되었다. 제국주의의 팽창적 문화정책,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고자 하는 의욕, 서구의 모방에서 서구와의 대립으로 변화된 방향성 등이 배경이 되었다.[12] 텅구는 동시기 범세계적인 사조였던 감정이입설, 미술비평의 개념, 유미주의적 관점을 적용하여 소식(시인)(蘇軾)의 회화관을 해석한 것이며, 텅구의 집필의도는 소식의 회화관과 중국회화사를 '현대적이며 보편적인 미술사 이론'으로 정립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서구 독자들을 위한 글이니 서구인들에게 중국회화∙중국문화의 독자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다분히 문화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쓰여진 글이다. 여기에는 전통의 수호화 서구화의 추진이라는 근대기 동아시아 지식인의 양가적 가치관이 드러난다.[13] 内藤虎次郎 (1924). 〈應仁の亂に就て〉. 《日本文化史研究》. 弘文堂書房. 180–218쪽.[14] 内藤湖南 (1969). “応仁の乱に就て”. 《内藤湖南全集》 9.[15] 독일 관념 철학이 사상적 중심이다. 동아시아의 하이데거라고 설명하기도 한다.[16] 극우파다. 지금도 기타로의 고향 가나자와에는 대일본제국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내려오는 기념비가 있고, 일본 극우파의 한 성지로 되어 일본의 조선강점이나 중국침략과 아시아 각 지역의 유린을 신성한 사명으로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