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00:48:30

김필주

파일:김필주.jpg

1. 개요2. 생애3. 외부 링크

1. 개요

북한 농업의 발전에 기여한 한국계 미국인 농학자.

2. 생애

1937년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태어났고 분단 직후 월남했다. 월남 직후 6·25 전쟁이 터져 또다시 삶의 터전을 잃고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다. 경기여자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과(56학번)를 졸업했다.

1960년 대학 졸업 후 1962년까지 농촌진흥청에서 농촌지도원으로 일했다. 이때 직장 동료로 만난 주영돈 박사[1]와 결혼했고 1963년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했다. 미시시피 주립대학교에서 종자학 석사, 코넬 대학교에서 작물생리학, 종자학 복수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노스렙킹 종자 연구부장으로 10년, 파이어니어 기술보급부장으로 8년간 근무하면서 세계 곳곳에 옥수수 종자 생산기술을 보급했다. 56개국을 순방, 36개국에서 주재근무를 하면서 개발도상국과 사회주의 국가들도 거리낌없이 왕래했다. 1987년 유엔 북한대표부의 초청을 받았고, 1988년에는 옥수수 종자 품종개량 지원을 요청받았다. 결국 남편 주영돈 박사와 함께 합법적 절차를 거쳐 1989년 3월 최초로 방북한 후 100여 차례 방북하면서 북한 농업의 발전에 힘쓰게 된다.

1995~96년 연이은 홍수가 북한을 강타하자 종자와 비료, 농약, 농기계를 가져가 농업지원을 시작했고 1997년 326개 농장에 미국에서 가져온 봄보리 종자를 심어 북한 농업 역사상 최초로 이모작에 성공했다. 한편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북한 농업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종자 보급이나 기술 지원을 통해 지속 가능한 농업을 도입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농장개발 및 운영을 위해 2003년 북한의 ‘운파산 무역발전회사’와 합작하여 ‘령윤합작투자회사’를 설립했다. 그녀는 이념을 초월하여 인도적인 차원에서 북한에 농업 지식, 기술, 물품을 보급하고 종자 개량으로 생산능률을 향상시켰으며 유기질 비료로 토양을 개선하기도 하였다.

2004년에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황해도에 위치한 4개 농장(총 2970㎡, 약 900만 평)을 임대해 목화를 비롯한 각종 농산물 재배와 선진 농업기술 전수 사업을 시작했다.[2][3] 농장개발 사업을 하면서 살림집에 비가 새는 것을 보고 주거시설 개선사업을 더하면서 본격적인 지역개발 사업의 형태가 갖춰졌다. 그 결과 2005년부터 2008년까지 400여 채의 농촌주택과 탁아소, 유치원, 진료소, 마을회관 등 각종 편의시설을 건립했다. 단순한 물품 지원이 아니라 용수공급, 도로조성, 식수사업 등 그야말로 마을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이 사업을 다른 지역으로 더욱 확대시킬 계획도 갖고 있었으나 2010년 5.24 조치로 중단됐다.

2010년 평양과학기술대학 설립에 참여했고 부총장 및 농업생명과학기술대학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북한 대학생들에게 유기농법과 종자학 등 선진 농업기술을 가르쳤다. 이후 이명박근혜 정권의 대북 강경책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고 개성공단이 폐쇄되는 와중에도 북한에 남아 지속 가능한 협동농장을 만드는 노력을 이어갔다. 그러나 2017년 오토 웜비어 피살 사건 이후 트럼프 행정부 역시 북한 여행 금지령을 내려 더 이상의 방북은 불가능했다.

그 외에도 식량안보 개선을 위한 NGO 단체인 ‘지구촌 농업협력 및 식량나누기 운동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맡은 후 개발도상국에서 다양한 식량구호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DMZ 학술연구부문 평화상’을 수상했고,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세계를 뒤흔드는 여성 15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4]

2014년 3월 8일자 로동신문은 "뜨거운 열정으로 조국의 농업과학 발전에 이바지한 김필주 동포에게 명예박사학위가 수여되었다"고 보도했다. 모교인 서울대학교도 2023년 3월 사회봉사상을 수여했다.

2024년 8월 1일, 향년 87세로 사망했다.

3. 외부 링크



[1]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축산과 54학번.[2] 원래는 2002년에 협동농장 한 곳을 맡겨달라고 제안한 것이었는데 4곳이나 임대해주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에서 수입하는 솜 가격이 톤당 1,060달러에서 2,500달러까지 상승했기 때문이었다.[3] 이 사업 추진이 가능했던 것은 2002년 7.1 경제개선조치의 영향도 있었다. 이 조치를 통해 부분적인 시장경제 허용과 협동농장 운영의 자율권 부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4] 한국계로는 미셸 리 전 워싱턴 DC 교육감과 함께 유이하게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