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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1 06:23:08

김철호(권투)


1961년 화성시 출생. 1978년 프로 데뷔. 주니어 밴텀급 신인왕 출신이다. 당시 그를 키워낸 트레이너가 나중에 유명우지인진도 키웠다.

1980년 한국 수퍼 플라이급 챔피언이 되고 1981년 베네수엘라에서 당시 챔피언이던 라파엘 오로노와 경기를 가졌는데, 9회 KO로 WBC 수퍼 플라이급 챔피언에 등극했다.[1] 한국 챔피언이 된 후 사실상 곧바로 세계 챔피언에 도전한 상황으로 프로모션 과정에서 여러 가지 운이 따랐다고 한다.

이렇게 경력이 일천한데다 원정 경기여서 처음부터 승산이 높지 않았고, 설 명절 즈음이었기 때문에 정초부터 패하는 경기를 보여줄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복싱 인기가 엄청나던 그 시절의 세계 타이틀전인데도 생방송으로 중계되지도 않았다. 당시 박찬희, 김태식 등 모든 한국 권투 선수들이 타이틀 방어에 실패, 한국 챔피언이 아무도 없던 상황이었다.

이렇게 깜짝 챔피언이 된 이후, 와타나베 지로[2] 등을 꺾으며 높은 KO비율로 4차 방어전까지 승승장구했지만, 5차 방어전에서 라울 발데스에게 졸전 끝에 무승부를 허용하며 (무승부도 일단 타이틀 방어는 성공이지만)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결국 1982년 6차 방어전으로 장충체육관에서 오로노와의 재경기가 있었는데 6회 38초만에 ko패. 최다 타이틀 방어 기록을 눈 앞에 앞두고 실패했다. 1961년생으로 챔피언 등극 당시 만 19세[3], 오로노와의 2차전에서 패할 때에도 겨우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여서 체중 유지의 어려움도 있었고 홍수환 등 계속 트레이너가 바뀌면서 지도 방법이 바뀌는 어려움도 있었다. 처음 챔피언이 될 때 당시 오로노가 수술을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부위를 맞고 졌다는 얘기도 있다. 이후 1년여만에 가진 재기전에서도 판정패한 뒤 은퇴했다.

은퇴 이후에는 지도자로 생활하여 문성길 등을 길러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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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경기내용은 김철호가 많이 밀렸는데 9회에 김철호의 복부공격에 라파엘 오로노가 통증을 느끼고 주저앉았고, 여기서 일어나지 못하면서 그대로 KO가 선언되었다.[2] 한국 선수들과 몇 차례 타이틀매치를 가져 인지도가 있는데, 김철호에게 패한 이듬해 다시 도전에 나서 결국 타이틀을 획득한 후 11차방어에 성공하는 등 롱런했다.[3] 당시 한국 최연소 기록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