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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3:05

김재박/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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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한국실업야구 시절4. KBO 리그 커리어5. 연도별 주요 성적
5.1. 타자 성적5.2. 투수 성적

[clearfix]

1. 개요

KBO 리그 초창기 5툴 플레이어이자 만능 스포츠인답게, 거의 모든 포지션에서 다 뛰었으나 주 포지션은 유격수.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대륙간컵이라고도 불림) 대회에서의 활약 이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그에게 영입 제의를 한 적이 있고, 특히 요미우리 자이언츠, 롯데 오리온즈, 한신 타이거즈, 한큐 브레이브스,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일본프로야구팀들이 김재박 본인과 한국 야구계 고위인사들을 따라다니며 몇년동안 영입 노력을 기울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병역문제와 국가대표 주전 유격수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한국 야구계 분위기가 장애물이 된 데다가 1981년에 한국프로야구 창설이 발표되었기에 김재박의 외국행은 실현되지 못했다. 특히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대 일본전 8회말에 시전한 일명 개구리 번트는 야구인들이라면 누구나 봤을 명장면으로 김재박의 야구센스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1분 40초부터 보자.

유격수 백넘버는 7번이라는 공식을 만든 장본인이다.

KBO 리그 최초의 올타임 레전드 유격수이며, 역사상 최고의 유격수 중 하나이기도 하다. 김진영 - 박정일 - 하일 - 김재박 - 류중일 - 이종범 - 박진만 - 강정호 - 김하성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유격수 계보의 대표 선수로 호타준족 5툴 플레이어는 김재박이 시초라 알려진다.

그들 중에서도 김재박은 특히 올드 야구 전문가들에게 하일과 함께 최고로 평가되는데, 하일은 타격 실력이 썩 좋지 않았으므로 아예 김재박을 올타임 최고로 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1]

사실상 파머스 리그로 불린 당시 KBO 리그에서 유격수로 독보적 평가를 받았으며, "다른 선수들이 고교야구 수준의 수비를 하고 있을 때 혼자 프로야구 유격수처럼 플레이했다"는 기록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나 한국실업야구 특성상 시즌이 끝난 후엔 한국화장품 선전과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으로써도 활동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더욱 대단한 것들이다.

2. 아마추어 시절

1954년 5월 23일, 대구광역시 중구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2]

대구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1965년부터 야구를 시작했지만, 중 - 고교 시절 김재박의 커리어는 생각보다 좋은 편은 아니었다. 당시 키도 작았던 데다 어깨도 좋은 편이 아니었고 이러한 체격조건 때문에 번번히 입학을 거절당했다. 대광고등학교에 진학했던 것도 원했던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하길 희망했지만, 실력이 없다는 이유로 무산되면서 오갈데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갓 창단한 신생팀이었던 대광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던 것은 때마침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던 데다, 대광고등학교는 신생팀으로 선수가 부족해 자리가 났기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

고등학교 시절에는 2루수로 활약했고, 선수층이 얇았던 팀 사정상 투수로도 뛰었다.[3]

1972년에 처음으로 결승에 진출했으나, 결승전에서 뼈아픈 실책을 기록하며 1:0 패배에 일조하기도 했다. 하필 상대팀이 다른 팀도 아닌 본인이 가려다가 무산된 경북고였다.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하고 졸업했고, 한양대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여기에서조차도 실력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받아주지 않았고, 때마침 다행히 영남대학교에서 받아주어서 영남대로 진학하게 되었다. 이 당시 영남대도 야구부를 막 창단했을 때였다. 사실상 귀향하게 된 셈.

1학년 때에는 왜소한 체격을 극복하려 서킷이나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1년 6개월 동안 몸을 단련했다고 한다. 그리고 2학년부터 출전해 대학 리그 수위타자가 되었고, 대학 연합팀에 선발되어 일본 원정을 가게 되었다. 이 때의 활약으로 대표팀에도 차출되어 대만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4] 3학년이 되어서 대학 리그 우승과 MVP 획득의 위업을 이루고 제 11회 아시안 게임에 차출되었으며, 마지막 4학년 시절에도 영남대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3. 한국실업야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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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후 한국실업야구한국화장품 야구단에 입단했다. 한국화장품도 이 해에 창단해 창단 멤버로 활약했다고 한다. 데뷔시즌이던 1977년 엄청난 포스를 보여주며 팀을 전기리그 통합 결승전까지 이끌어 올렸으며 결승전에서도 환상의 플레이를 보이며 우승을 이끌기도.[5] 데뷔시즌이던 1977년 한해동안 그가 이뤄낸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77년 실업야구 통합 성적
타이틀 이름 소속팀 성적
타격 김재박 한국화장품 .439[6]
홈런 김재박 한국화장품 13개
유승안 한일은행
타점 김재박 한국화장품 37타점
도루 24개
출루율
방어율우수투수 이선희 육군 1.91[7]
승률우수투수
최다승리상 유남호 롯데 13승 4패
최우수선수상 김재박 한국화장품
타격삼관왕상 김재박 한국화장품
신인왕 김재박 한국화장품
황기선 상업은행

무려 타율, 홈런, 타점, 도루, 출루율[8] 1위에 등극하며 최종 8관왕을 기록한 것이다.[9][10]

실업야구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1977년에는 이선희, 최동원, 이해창, 김봉연 등과 함께 니카라과에서 열린 대륙간컵에서 활약하며 대한민국 야구대표팀 최초의 국제대회 우승컵을 들어올리는데 일조한다. 이 대회에서 김재박은 54타수 23안타 타율 0.426으로 타격왕을 차지하고, 최다안타왕, 도루왕도 차지해서 3관왕이 된다. 또한 81년 대륙간컵에서도 대회 베스트9에 선정되는 등 국제대회에서도 자신의 진가를 어김없이 드러냈다.

4. KBO 리그 커리어

4.1. MBC 청룡 시절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 수상자 (1983~1986, 1989)

김재박은 실업야구 시절 이선희, 최동원 등과 함께 강한 임팩트를 남겼던 선수였다. 이 때문에 1982년 MBC 청룡OB 베어스박철순을 넘기면서까지 그를 1차 지명했는데 한국프로야구 출범 당시 1차 지명은 원칙적으로 구단의 해당 연고지역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모든 선수를 지명할 수 있었다. 서울특별시 지역은 연고팀이 MBC였지만 OB 역시 5년 후 서울로 연고를 이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마침 대전 팜도 썩 좋지 않았기 때문에 MBC와 OB가 2:1 비율로 서울권 선수를 지명하는 방식에 합의했다. 박철순은 이 해 OB 베어스의 지명으로 프로무대에 데뷔했고, MBC 청룡은 박철순을 포기한 대가로 김재박과 함께 이해창을 얻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김재박은 고등학교만 제외하고 초등학교[11], 중학교[12], 대학교를 모두 대구·경북지역에서 다닌 대구 토박이다. 그런 그가 고등학교만 서울에서 다녔던 것은 당시 영남야구의 자원이 하도 좋아서 자신이 도저히 그 안에서 경쟁할 수 없었던 까닭이라고 한다.[13][14] 실제로 이 시대 경북고와 대구상고의 황금세대는 삼성 라이온즈 출범 멤버로 흡수되어 강력한 선수진을 구성하게 된다.

프로야구 출범 당시 김재박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선발[15] 되어 있었기 때문에 1982년 시즌 대부분을 뛸 수는 없었다. 하지만 1982년 시즌을 아주 못 뛴 건 아니다.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끝나고 나서 바로 청룡에 입단하였다. 그해 잔여경기 3경기에 출전하여 13타수 무안타의 성적을 남겼다. 그래서 다른 국가대표 멤버들과는 달리 김재박은 프로야구 원년 멤버로 인정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3년 정식으로 프로무대에 등장한 김재박은 실업야구 시절에 비해 노쇠한 상태였다. 실업야구 시절이 그의 전성기였고 김재박의 프로야구 통산 성적은 생각만큼 그리 대단하진 않다. 김재박이 프로에 데뷔했을 때 만 28세-29세였기 때문.[16] 그래도 그 이름값이 아깝지 않은 플레이로 유격수의 중요성을 대한민국 야구팬들의 뇌리에 깊이 새기게 된다.
파일:attachment/김재박/f0018015_4e0c05adb7edb.gif
위의 영상처럼 3-유 깊은 곳에서 1루까지 직구로 꽂을 정도의 강견이었으며[17] 빠른 발과 뛰어난 수비센스 거기에 타자 타격유형에 따른 예측 수비로 당대의 다른 유격수와는 다른 차원의 수비를 선 보였다.[18] 과장을 더 하자면 수비의 류중일과 타격의 이종범을 합쳐놓은 수준의 완성체였다. 다만 프로 데뷔 시점이 당대에는 이미 선수나이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기에 오랜기간 스탯을 쌓을 수 없다는 것이 한계였다.

화려한 명성에 걸맞게 자존심도 셌기 때문에 당시 MBC 청룡의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했고[19]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감독이었던 김동엽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1985년에는 팀 투수 부족으로 투수로 등판해 0.2이닝을 막고 바로 다음 타석에서 끝내기를 쳐 KBO 최초로 투수가 끝내기를 친 선수가 되었다.

4.2. LG 트윈스 시절

이후 문화방송럭키금성그룹에 구단을 매각하고 팀명이 LG 트윈스로 바뀔 때까지도 선수 생활을 계속했다. 1990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포함돼 현역 말년에 우승반지 1개를 얻어가게 된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기량이 쇠퇴했음에도 여전히 주전 유격수 기용과 연봉 문제에서 김재박이 양보하지 않았다. 김재박 입장에서는 약 100개 정도 남은 프로 통산 개인 1000안타 달성에 대한 미련이 있었기에 어떻게든 LG에서 1000안타 기록을 세우고 싶어했다.[20] 때문에 LG 입장에서는 다소 눈엣가시처럼 김재박을 취급했다. 아울러 청룡 시대를 접고 LG 시대를 본격적으로 여는 과정에서 선수단 세대교체가 필요했기에 이광은이나 김재박 같은 베테랑의 정리 필요성도 있었다. 결국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그를 태평양 돌핀스트레이드하게 되는데 트레이드에 대한 대가가 전혀 없는 무상 트레이드였다.[21]

당시 무상 트레이드에 대한 매우 유명한 일화가 있다. 원래 LG 구단의 계획은 김재박을 태평양으로 현금 트레이드하는 것이었다. 다만 김재박은 구단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슈퍼스타였던 만큼 구단 최고위층의 트레이드 허가가 필요했다. 결국 LG 구단이 김재박 현금 트레이드 추진안에 대한 기안서를 그룹 최고위층에 올려보냈는데 구단주이자 당시 럭키금성그룹 부회장이던 구본무 부회장이 기안서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고 한다. 그리고 구단 사장과 단장을 불러 한마디를 전하는데 "슈퍼스타인 김재박을 돈 받고 파는 것은 LG라는 팀에 어울리지 않고 김재박 선수에 대한 예의도 아닙니다. 돈을 받지 말고 김재박을 그냥 풀어주시오."라고 지시했다. 당시의 사회 문화를 볼 때 상당한 대인배적 행보라고 볼 수 있는 사례.[22]

15년 후 한 야구 전문기자는 이 트레이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태평양으로 간 선수 김재박은 별 볼일 없는 노장이었다. 그러나 감독 김재박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물론 김재박이 LG에서 볼 꼴 못 볼 꼴 다 보기 직전이라 이런 말이 나왔다.

4.3. 태평양 돌핀스 시절

이후 구단의 무상 트레이드를 통해 이웃 동네 팀인 태평양으로 이적했으나 30대 후반이 된[23] 김재박은 노쇠화로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 못하였고 주로 플레잉 코치로[24] 활동했다. 그리고 1992 시즌이 끝난 뒤 은퇴했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5.1. 타자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1982 MBC 3 13 .000 0 0 0 0 0 0 0 0 .000 .000
1983 97 373 .290 108 22
(2위)
2 5 46 53
(4위)
34
(2위)
42
(4위)
.399 .376
1984 91 343 .300 103
(4위)
11 5
(5위)
7 37 53
(6위)
26
(4위)
36 .423 .375
1985 100 377 .313 118
(4위)
15 3 3 36 54 50
(1위)
39 .393 .385
1986 102 386 .264 102 18 4 4 43 67
(1위)
38
(3위)
36 .363 .336
1987 101 399 .283 113 23
(2위)
5 1 24 53 33
(2위)
39 .373 .354
1988 99 409 .267 109 18 1 2 26 49 25
(3위)
28 .330 .313
1989 101 357 .286 102 8 2 3 27 64
(3위)
39
(2위)
53 .345 .380
(8위)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1990 LG 109 381 .239 91 9 2 2 45 49 14 36 .289 .306
1991 82 247 .263 65 13 2 0 18 34 15 28 .332 .343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1992 태평양 82 276 .221 61 11 0 1 19 36 10 27 .272 .299
KBO 통산
(11시즌)
966 3561 .273 972 148 26 28 321 512 284 364 .353 .346

5.2. 투수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평균자책 세이브 홀드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85 MBC 1 0.00 1 0 0 0 0 0 0 0
KBO 통산(1시즌) 1 0.00 1 0 0 0 0 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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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0년대 실업야구 시절부터 야구를 봐온 하일성 해설위원도 역대 최고의 유격수로 김재박을 꼽았다.[2] 아버지의 고향은 개성이다. 즉 김재박은 실향민 2세.[3] 프로에서는 딱 한 경기에 구원투수로 나왔다. 이 경기의 승리투수(결승타점 역시 타자로 나온 본인이 기록. 결승타점은 연장 끝내기였다.). 그래서 프로 통산 투수기록은 1승 무패 방어율 0.[4] 김재박은 이 당시 국가대표팀에 뽑힌 게 신기하다는 회고를 했다.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인데, 모두 창단팀에 들어갈 정도로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영남대 시절에도 국가대표보다는 서울의 대학팀을 이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을 정도였다.[5] 당시 결승전에 대한 내용은 이곳 항목을 참조.그때 인터뷰.[6] 148타수 65안타.[7] 2위인 한일은행 투수 김윤규의 방어율이 3.21이었다.[8] 확인결과 출루율 1위도 하였다. 따라서 8관왕이며 당시 기사를 보면 현재 7관왕이라 부르는 것과 달리 8관왕이라고 부르는것을 확인할수있다.당시 기사.[9] 다만 현재 기준으로 볼때는 타율, 홈런, 타점, 도루라는 클래식 스탯에 MVP, 신인왕, 3관왕상이라는 타이틀이 더해져서 완성된 것으로 지금 기준으로는 관 수로 치지 않는 상들이 들어가 있지만 저 상들을 수상했다면 예상할 수 있는 출루율, 장타율, 최다안타 등의 수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 분야도 단지 수상을 안 했을 뿐 실제로는 1위였을 개연성은 존재한다. 여하튼 현재 기준으로 최대 몇 관왕인지는 의문.[10] 다만 김재박 본인도 이 당시 기록을 7관왕이라고 회고한다[11] 대구초등학교, 1974년을 끝으로 야구부가 해체되었다.[12] 당시 경북중학교, 1970년 경운중학교로 교명 변경.[13] 그 당시 대구 출신 야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대구·경북의 야구 명문인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하기를 희망했으나, 당시 경북고등학교 감독이었던 서영무 감독이 테스트해보고는 몸도 작고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았다. 때마침 집이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이사간 곳 근처에 대광고등학교 야구부가 신설되면서 대광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그런데 야구 때문에 대구에서 서울로 전학 간 그가 대학교는 다시 대구에 있는 영남대학교로 오게 된 것도 이유는 비슷한데, 대광고를 졸업한 김재박은 한양대학교를 가고 싶어했으나 그 당시 한양대 감독이 경북고에서 그를 받아주지 않았던 서영무 감독이었고 같은 이유로 한양대에서 퇴짜를 맞은 그는 당시 야구부가 창설된 영남대학교로 진학하면서 다시 대구로 내려오게 된다. 대구경북지역의 아저씨 팬들은 그때 경북고에서 김재박을 받아줬거나 영남고나 대건고라도 갔다면 삼성이 훨씬 일찍 더 많이 우승했을 거라고 안타까워 하기도 한다.[14]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김재박이 대구상고, 하다 못해 대건고라도 갔다면(대구고는 1976년 재창단) 역대 삼성 라이온즈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기량도 역대급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성으로 볼 때도 의외로 삼성 레전드 중에서 드문 순혈 대구 토박이다.[15] 이 대회가 그 유명한 개구리 번트가 나온 대회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당시에 2:1 런아웃 상태에서, 벤치에서 사인은 없었지만 베테랑들이 작전이 필요하면 주도할 수 있도록 해주었는데 당시 안타가 2개밖에 없었을 정도의 일본 우세의 원사이드 경기였고, 3루에 김정수가 있어서 일본에서는 스퀴즈를 경계했다. 그래서 김재박은 번트를 준비했지만 일본도 공을 높게 던지며 경계하자, 점프로 번트를 대게 되는데, 점프로 번트한 건 생각한게 아니라 본인이 생각해도 운이 좋게도 몸이 반응했던 것이라 한다. 이후 한대화가 쓰리런을 날려 5:2로 승리하게 되었다.[16] 2020년대 기준 만 28세면 한창 나이지만 프로야구가 갓 출범한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은퇴를 할 시기였다. 실제로 당시 실업야구 선수 중 서른을 넘어서 뛴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2000년대 초반에도 9 만 30세 전후에 많은 선수들이 은퇴를 했다.[17] 실제로 투수로 등판한 기록도 있음.[18] 이미 만28세를 넘긴 즉 선수생명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음에도 수비 수준은 차원이 달랐다.[19] 1983년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는데 최초 중고신인 골든글러브 수상자로 기록됐다[20] 하지만 김재박은 결국 통산 1000안타를 기록하지 못하고 은퇴한다.[21] 김재박이 현역 생활을 연장한 반면 이광은은 순순히 유니폼을 벗었고 LG에서 코치를 맡게 된다. 훗날 LG 선수 출신 최초로 LG 감독을 맡았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경질됐다.[22] 구본무 구단주는 평소 온화한 성품과 품위를 중시하는 능성 구씨 가풍 때문에 계열사 임원들에게 화를 내는 일이 좀처럼 없었고 젊은 직원에게도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김재박 무상 트레이드 지시 때도 속으로는 "이놈들은 일처리를 대체 왜 이따위로 하는가"라고 생각했으면서도 "LG와 선수를 위해 그냥 풀어주시오"라고 정중히 얘기한 셈이다.[23] 트레이드 당시 나이가 무려 만 38세였다.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30세가 넘어가면 선수 생활의 말년으로 인식하던 시절이었는데 그 모든 것을 고려해도 상당히 오랫동안 뛴 셈이다. 현재도 38살에 선수로 뛰면 노장 반열에 든다.[24] 사실 플레잉 코치 역할은 1987년 MBC 시절부터 줄곧 맡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