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마추어 시절
배명고 2학년 시절 제50회 황금사자기 타격상을 수상하고, 1997년 OB 베어스의 2차 6순위 지명을 받은 후 단국대학교에 진학했다. 단국대 시절에는 제34회 대통령기대학야구 타격상도 수상했고, 졸업 후 2001년에 두산 베어스에 입단했다. 원래 포지션은 유격수였는데, 단국대 재학 시절 만성 간염 판정을 받고[1]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그 이외에도 단국대 시절의 어깨 부상 경력 때문에 사실상 유격수 수비 능력은 상실했다고 봐도 무방하다.2. 프로 시절
2.1. 두산 베어스 시절
두산 베어스 신인 시절.
2001년 6월 13일, 일명 613 대첩[2] 당시 1루 대주자로 투입되는 모습.
결국 그 만성 간염 때문에 두산 베어스에 입단하고 나서도 데뷔 초기에 발목이 잡히고 만다. 두산에서도 입단 1년 선배인 강봉규와 함께 기대를 걸기는 했지만, 일단 간염 때문에 체력 훈련이나 출장 자체를 하기가 힘든 편이니 2군에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 당시 두산의 외야진이 깊이가 약한 편이었기 때문에, 실력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주전으로 도약할 수도 있었지만, 결국 그럴 몸 상태가 아니었다.
2.2. 운명을 바꾼 트레이드, KIA 타이거즈행
KIA로 트레이드 되자마자 찍은 앳된 얼굴의 사진.
그 때문에 두산에서도 큰 두각을 드러내지 못해, 1군에는 아주 가끔씩 출장하는 정도로 존재감이 떨어졌다. 결국 2003년 5월 6일 이동수를 상대로 KIA 타이거즈에 트레이드되었다. 그래서 두산 팬들 중에서 김원섭이 원래 두산 출신임을 모르는 경우도 은근히 많다.
KIA에서도 2005 시즌까지는 주로 2군에서만 출장해오다가, 2006 시즌 1군에서 본격적으로 뛰게 되어 규정 타석에는 못 미쳤지만 3할 3푼대의 타격을 보여주며 좌익수자리를 굳혔다. 허나 2007년에는 다소 부진했는데, 고질병인 간염이 도진 탓이었다.[3]
2.2.1. 2008 시즌
2008 시즌에 다시 간염과 싸우면서도 팀의 주전 좌익수로 뛰며 3할 타율에 20도루를 기록하였다. 주로 이용규 바로 뒷 타순에 배치되어 테이블 세터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나 문제는 중심타선. 이 당시 KIA 타선은 밥상을 차려도 먹지를 못하던 타선이었다.여하튼 2008 시즌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KIA의 주전급 선수로 완전히 자리를 굳히는데 성공했다.
2.2.2. 2009 시즌
개막전 선발 라인업에는 빠져 있었으나 광주 홈 개막전에서 이용규가 수비 도중 펜스에 발목을 크게 부딪혀 부상을 당하자 그를 대신해 중견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용규같은 허슬 플레이는 거의 없었으나 상당히 안정적인 중견수 수비와 3할대의 타격으로 팀의 상승세에 공헌했다.
하지만 무리했던 탓인지 6월 초에 근육통으로 1군에서 말소되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간 수치가 급격히 상승하며 병원에 입원했다. 그 당시 간 수치가 170이었다고. 게다가 허리 디스크까지 겹쳤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좀 나아지는 듯 싶더니, 복귀를 눈앞에 두고 모친상까지 당하고 말았다.
자세한 내용은 KIA 타이거즈/2009년/8월 문서 참고하십시오.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복귀한 후 8월 9일 군산 SK전 9회말 2아웃 만루 상황에서 상대 투수 정우람으로부터[4] 끝내기 만루 홈런을 치며 KIA의 9연승을 이어나갔다. 시즌 최종 성적은 2008년에 비해 홈런과 타점이 대폭 상승. 심지어 3루타는 9개로 리그 1위였으며 출루율 0.401과 20도루로 굳건한 테이블 세터 자리를 지켰다.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는 6차전까지 별 활약이 없었다. 하지만 7차전 6회말 공격에서 2구를 체크스윙으로 건드린 것이 나주환 앞에서 불규칙 바운드가 되는 행운의 안타를 쳤으며[5] 7회말 1사 1-3루에서 정우람으로부터 적시 2루타[6]를 때려내며 팀 우승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활약으로 프로 입문 후 처음으로 억대 연봉 진입.
2.2.3. 2010 시즌
주로 좌익수로 뛰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우익수로 뛰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2년간의 타격이 대체 어디 갔는지 2008, 2009년에 비해 선구안이 떨어진 모습을 보이며 삼진을 자주 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타격도 2할 4푼대를 기록하며 2009년에 비해 상당히 떨어졌다. 2010년 후반기 도중 인터뷰에서 2009년에 제법 홈런을 쳤기에 장타력을 더욱 올리려 무리하게 폼을 바꾸다 실패했다고 했다.2.2.4. 2011 시즌
시즌 초반 경미한 부상 때문에 2군에 있었다가 이용규가 햄스트링 부상으로 2군에 내려가자 1군에 복귀했다. 복귀 후 중견수로 출장하며 괜찮은 타격감을 보였으며 특히 4월 24일 잠실 LG전 9회초 1사 만루 4-2로 앞서고 있던 상황에서 그림같은 스퀴즈 번트를 성공시키기도 했다.#4월 말부터는 우익수로 출장.
5월 7일에 있었던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선 혼자서 2타점 1홈런을 쏘아올리며 한껏 물오른 타격감을 과시했다. KIA의 그리 두텁지 않은 외야진에서 틈날 때마다 출장하며 쏠쏠히 활약해주었지만, 역시 문제는 몸 상태. 페이스가 좋은 듯해도 가끔 휴식을 갖는 것은 바로 이런 몸 상태 때문.
SK 와이번스와의 2011년 준플레이오프에서 1~2차전은 대주자, 3차전은 선발 2번타자, 4차전은 대타로 출장하여 3타수 무안타 1득점, 타율&장타율&출루율 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1승 뒤 3연패로 탈락했다.
2.2.5. 2012 시즌
좋은 타격감과 영양가 있는 타점 생산 능력, 안정적인 좌익수 수비를 보여주었다. 주로 3번이나 6번 타자로 출장.보통 고질적인 체력 문제로 여름쯤 되면 선발 라인에서 제외되곤 했는데, 트레이닝 코치의 조언으로 아미노산을 복용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 덕에 처음으로 풀 타임 소화를 할 가능성도 보이고 있다.
8월 23일 무등야구장 LG 트윈스전에서 2:2로 비기던 10회말 2사 2루 상황에서 좌익수의 키를 넘기는 끝내기 안타를 때려내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결국 간 수치가 폭발하면서 9월 21일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그래도 이번 시즌은 상당히 오래 버텨 준 편. 몸 상태가 심각하지는 않은지 이후로도 체력 안배를 해 가며 틈틈이 출전해주었다.
시즌이 끝난 후 FA를 신청했지만, NC 다이노스의 20인 보호선수 외 선수 지명을 피하기 위한 구단의 전략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본인도 KIA에 남겠다는 의지가 강했기에 타 구단의 터무니없는 오버 페이가 들어오지 않는 이상 잔류할 가능성이 높았고, 결국 11월 15일 계약 기간 3년에 계약금 5억, 연봉 3억 원 총 14억 원에 KIA와 재계약했다.# 본인은 광주에 10년 동안 살다 보니 광주가 고향같아 FA 신청은 했지만 애초에 떠날 생각이 없었다고. 김원섭은 만족하는 뉘앙스의 인터뷰를 했지만, 많은 팬들은 좀 더 달라고 해 봤으면 하면서 아쉬워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팀 내 최고 타율[7]과 출루율 4할을 기록하며 꾸준히 활약해 주어서 KBO 골든글러브 외야 후보로 기대를 받기도 했으나, 인지도 때문인지 수상은 받지 못했다. 특히 같은 팀의 이용규는 예년에 비해 좋지 않은 타율을 기록하고도 득표율 2위로 골든글러브를 가져가는 바람에 더더욱 지못미.
결국 KIA 타이거즈 갤러리에서 별도로 조공을 하였다.
2.2.6. 2013 시즌
FA로이드 약빨이 떨어졌는지 시즌 초에는 물방망이와 나사가 빠진 듯한 수비로 간만에 욕을 먹었다. 4월 4일 한화전에서 첫 안타를 기록.4월에는 식어버린 방망이를 선구안과 수비로 메꿔가며 주로 백업으로 출장하거나 플래툰으로 기용되었다. 무엇보다도 외야 경쟁자였던 신종길이 각성하면서 주전 자리가 위태로워졌다.
5월 들어 김상현이 트레이드로 SK로 이적하고, 잘 나가던 신종길이 햄스트링 부상으로 잠시 빠지면서 다시 주전 외야수로 출장하게 되었다. 이후 방망이도 조금씩 살아나고, 여전한 선구안과 수비 능력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KIA에서 없어서는 안 될 선수임을 증명했다.
그런데 6월 2일 LG 트윈스전에서 6회말 볼넷으로 출루뒤에 귀루를 하다가 베이스를 잘못 밟고 왼쪽 발목을 접질렸다. 이후 정밀검사 결과 발목 인대 파열 부상을 당했다는 진단이 나왔으며, 복귀까지 3달정도 걸린다고 한다. 사실상 시즌 아웃.
2.2.7. 2014 시즌
시즌 전 부상으로 연습경기&시범경기에 나오지 못했고 부상에서 나은 뒤에는 자리가 없어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그러다 4월 16일에 경미한 부상탓에 말소된 김주찬을 대신해 1군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러나 올라온 이후에도 타격감이 좋지않아 5월 17일 이범호의 복귀에 맞춰서 말소되었다.김여울 기자 말로는 팀 사정이 너무 좋지 않았던 시기라 2군에서 몇경기 뛰지도 않고 급하게 올렸던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경기감각 조율을 위해 내려갔다고 한다. 위에서 말했던대로 그간 재활을 하다 연습경기와 시범경기를 패스하고 퓨처스서 몇경기 뛰고 급히 올라온거라 그런지 타격에서 상당히 좋지 않았었다. 퓨처스에서 조율을 하고 나서 다시 올라올 것으로 보인다.
6월 6일 미세골절로 내려간 브렛 필을 대신하려 1군에 올라왔다.
6월 7일에는 2회 첫 타석에서 안타를 쳤는데 2루를 뛸 생각으로 하지 않고 1루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이유로 김성근 감독에게서 디스당했다. 이 때문에 기아 타이거즈까지 "그러니까 아래에 있는 거에요"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기아 타이거즈는 LG 트윈스에게서 2회에 무려 6점을 빼앗았다.
하지만 죽어버린 타격감은 쉽게 살아나지 못했고 6월 16일 다시 말소되었다. 대신 김주형이 올라왔다.
시즌 후반에 다시 1군에 와 주로 교체멤버로 출장하였다.
시즌을 종합해 보면 타격은 최악이였으나 외야수 중 가장 안정적인 수비력을 보여준 탓에 그다지 비난받지는 않았다. 1978년생으로 2014년 기준 37세이니 만큼 적지 않은 나이로 인한 노쇠화가 오기 시작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 중평.
2.2.8. 2015 시즌
김상훈이 현역 은퇴를 선언하면서 2015 시즌 KIA 선수단 야수진 내 최고참 선수가 되었다.[8] 고질적인 지병으로 인해 체력 문제가 지적되었던 김원섭이 더더욱 몸 관리에 신경써야 할 때다.개막전에서 멋진 홈 보살을 잡아 내고 팬들에게 손 키스를 보내는 장면이 잡혔다.
시즌 초~중반에는 김주찬과 신종길의 결장, 이대형의 이적 등으로 구멍이 난 1~2번의 테이블세터진에서 주전을 차지하고 있다. 역시 확실히 타격 부문에서 노쇠화가 온 듯 2할 5~6푼대의 썩 좋지 않은 타율을 보여 주고 있으나, 여전히 괴물같은 선구안으로 볼넷을 잘 골라내서 출루율은 훨씬 높다. ops가 8할에 출루율이 4할을 넘어 2할 6푼 타율에 비하면 말도 안 되게 높은 출루율과 ops로 팀에 보탬이 되고 있는 중.
그리고 리그 탑급의 수비는 죽지 않아서, 나지완이 빠지고 김원섭과 김호령이 주전 외야수로 출장하기 시작하며 기아의 수비가 매우 단단해졌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또한 주루 센스 또한 죽지 않아 전체적으로 기동력이 영 아닌 팀에서 어느 정도 활력소가 되어주고 가끔씩 홈런도 한 방 때려 내는, 전성기에 비해 타격 능력은 좀 죽었지만 나머지가 건재하여 언제나처럼 좋은 2번 타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역시 문제는 건강. 날이 더워지며 슬슬 간 수치가 올라갈 때로 이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관건이다.
7월 28일 대타로 볼넷을 얻어내며 본인의 통산 1,000경기 출장을 달성하였다. 다음 타석인 9회 말에는 SK 투수 정우람을 상대로 역전 끝내기 쓰리런을 날리며 본인의 1,000번째 경기를 직접 끝냈다! 영상
8월 25일까지 타율은 .259인데 반해 출루율은 4할대에 가깝다. 뛰어난 선구안과 커트 능력으로 투수의 투구수를 늘린 후 볼넷으로 진루하며 소금같은 활약을 계속 이어주고 있다.
9월 6일 대구 경기 전, 소속팀 감독과 박찬호가 남은경기 타율을 놓고 약속 증서를 만들 때 옆에서 구경하면서 수석코치와 함께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 성공하면 박찬호에게 배트 3개 준다면서 꼬드겼다고.
총평을 하자면, 100타석 이상 출장한 KIA타자중 팀내 타율 4위(0.267), 출루율 1위(0.388), WAR 4위(1.27)를 기록하면서 팀이 본인에게 기대한 이상으로 시즌을 치렀다고 볼수 있다. 이번 시즌 김호령과의 공존은 나쁘지 않았으며, 이대형의 이적과 나지완의 부진 등으로 생긴 외야의 빈틈을 꾸준히 막아주면서 타격뿐 아니라 수비에서도 팀에 기여했다. 1000경기째 경기에서 역전 끝내기 쓰리런으로 인생경기를 만든 것도 큰 수확. 13-14시즌 출장경기가 적었기 때문에 FA자격을 획득하지 못하지만 16시즌에 대활약을 펼쳐서 다음 FA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기를 타이거즈팬들이 기원하고 있다.
2.2.9. 2016 시즌
시즌 후 FA로 풀린다.시즌 전 연습경기와 시범경기에서부터 상당한 활약을 보여주며 39세의 나이가 무색한 듯한 모습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회춘하는 것 아닌가요"
4월 1일 마산 야구장에서 열린 NC 다이노스와의 시즌 개막전 경기에서 6번 타자로 선발 출장해 4:3으로 끌려가던 6회초 1사 2루 상황에서 동점을 만드는 1타점 적시 2루타를 때려내 승리 투수 요건을 갖추고 있었던 상대 투수 에릭 해커를 강판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김기태 감독의 강수를 두는 작전으로 양현종 다음으로 올라온 지크 스프루일이 8회 말 손시헌에게 1타점 적시타를 맞았고 이것이 결승타가 되어 팀은 5:4로 석패했다.
4월 2일 이어진 NC 다이노스와의 2차전에는 1번 톱타자로 선발 출장해 4타수 무안타 2삼진으로 다소 부진했으나 5회초 볼넷을 골라 걸어나갔고 2사 1,3루 상황에서 브렛 필이 때려낸 적시타로 1득점을 기록했다. 특히 이 날은 부상과 오랜 재활로 긴 공백을 깨고 돌아온 투수 곽정철이 프로야구 1군 무대에서 무려 1,792일 만에 세이브를 기록해 부활을 알린 경기였다.
4월 5일 식목일부터 시작된 LG 트윈스와의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홈 개막 3연전 첫 경기에서 다시 1번 톱타자로 선발 출장, 1회말 첫 타석에서 상대 투수 류제국을 상대로 안타를 기록했으나 다음 타자들의 부진으로 1루에서 그대로 잔루가 되었다. 그러다 2회에 LG가 타점을 내면서 1:0으로 뒤지던 가운데 5회말 2사 1,3루 상황에서 류제국의 스트라이크 존 한복판으로 높게 오는 직구를 받아친 타구가 우중간 펜스를 원바운드로 때리며 주자를 모두 불러들이는 2타점 역전 적시 2루타를 만들어냈다. LG 트윈스에게 줄곧 강했던 모습을 올해도 보여주기 시작한 것. 여담으로 이때 2루에 안착한 뒤 날린 키스 세리머니가 압권. #영상 이 안타는 이날 경기의 결승타가 되었고, 김원섭은 3타수 2안타를 기록해 1할대에 머무르던 타율을 2할7푼까지 끌어올렸다. 이후 6회 만년 유망주에서 벗어날 기미를 보이는 김주형이 대형 투런 쐐기포를 때려내면서 팀은 4:1로 이겼다.
4월 6일 우천 취소로 하루 건너뛴 다음날인 4월 7일에 열린 LG 트윈스와의 2차전 경기에서는 1차전 경기와 같이 또 5회말에 안타를 쳐냈다. 3타수 만에 안타. 김원섭은 이에 그치지 않고 다음 타자인 김주형이 좌익수 플라이로 물러나자, 2루 태그업 시도로 좌익수 박용택과의 승부를 벌여 이기는 적극적인 주루 플레이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데 다음 타석인 8회 말에 갑자기 백용환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최근 타격감이 좋던 백용환은 2타수 무안타로 부진. 한방이 있는 백용환이 왜 무사에 주자도 없을 때 대타로 나왔는지 살짝 의문이다. 단지 포수 교체를 위함이었을지.
슬슬 붙박이 주전 1번 타자로 계속 나올 모양이다. 줄곧 1번 타자로 나왔으나 아직은 1군 무대가 벅찬 듯한 오준혁을 대체하는 듯. 수비에서는 중견수로 나와 경기 초반에 어려운 타구를 노련하게 잘 잡아내는 모습을 보였다.
타선은 힘을 발휘하던 4회 3점을 제외하고는 안타깝게도 단 1점밖에 내지 못해 결국 경기는 8:4로 졌다.
4월 10일 KT전에서 2번타자 좌익수로 선발출전했다. 2타수 1안타 1타점 3볼넷으로 오준혁과 함께 테이블세터진은 밥상을 차려줬지만 번번히 밥상을 뒤업는 중심타선때문에 빛을 바라지 못했다.
올라올때가 한참 지나 팬들이 애타게 찾고 있는데 체력안배 차원에서 2군에 내려갔고 거기서 팔꿈치를 다쳤다고 한다.
7월 13일 SK전에서 또 다시 경기를 끝내는 안타를 쳤다. 정우람은 이미 SK를 떠났지만, 다시 SK에 악몽을 재현시켰다는 점이 포인트.
당초 FA가 될것으로 예상됐지만 등록일수 부족 탓인지 결국 FA 대상에 포함되진 못했다.
2.2.10. 2017 시즌
인터뷰를 통해 이번 시즌이 현역으로서 마지막 시즌이 될것이라고 사전에 공지한 상황. 아쉽게도 두번째 FA는 권리를 행사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7월 22일경 은퇴를 암시하는 글을 올렸다..출처 안치홍, 김선빈 키스톤 콤비와 다시 호흡을 맞추지 못하는 점에 대해 아쉬워하는 팬들이 많다. 팀의 암흑기, 전성기를 가리지 않고 좋은 활약을 펼쳤던 김원섭이기에 그의 은퇴는 팬들에게 더욱 아쉬웠다. 다만 시즌 종료 전까지 웨이버 공시를 하지 않고 선수자격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아 순위가 거의 확정된 확장엔트리 가동 시기 즈음에 마지막 은퇴경기를 준비할 수 있도록 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하필이면 이 시즌이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마지막 경기결과로 정규시즌 우승팀이 결정되는 잔여시합이 없는 시즌이 되었고, 결국 은퇴시합을 갖지 못했다. KBO 리그/2017년/정규리그 최종전 참고. 그리고 2017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못들면서 팀의 우승을 밖에서 지켜보며 은퇴하게 되었다. 결국 2017년 11월 KIA의 V11 달성을 바라보며 야구선수 20년 인생을 끝냈다.
[1] 이 때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고 한다.[2] 당시 (KIA로 바뀌기 직전의) 해태가 연장 10회에서 4점을 뽑아냈으나 10회말 수비에서 아웃카운트 하나도 잡지 못하고 5점을 허용하여 대역전패한 경기였다. 이 패배에 발목을 잡혀 타이거즈는 간발의 차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3] 그런데 똑같이 간염을 앓던 기아의 모 선수는 타격왕을 거머쥐었다?[4] 이 기세가 한국시리즈까지 이어져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도 역시 정우람을 상대로 동점 적시 2루타를 때려내며 팀 우승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쯤 되면 정우람의 천적이라고 해도 되...려나? 2015년 7월 28일 본인의 1000경기 출장 경기에서 9회말 정우람에게 끝내기 석점 홈런을 때려낸다. 이쯤 되면 천적이 맞는 것 같다.[5] 그 직후 나지완이 투런 홈런으로 대역전극의 주춧돌을 놓았다.[6] 사실 이 타구는 수비 위치만 제대로 잡았으면 플라이 아웃될 확률이 꽤 높은 타구였다. 하지만 박재홍이 순간적으로 타구 판단을 잘못 한 데다가 노 바운드로 처리하려다 공을 한번 떨구게 되어 1루까지만 갈 타구를 2루타로 둔갑시키고 만 것. 여담으로 박재홍은 7회말에도 최경환의 우중간 가른 타구를 펜스플레이 실수로 3루타로 바꿔주고 만다.[7] 3할 1푼. 이용규보다 높고 팀내 유일 규정타석 3할 타자다![8] 팀 최고참은 1974년생의 최영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