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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자/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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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무명 시절3. 출세4. 일본에서의 성공5. 북한 공연6. 2002년 이후7. 아모르 파티
7.1. 역주행 경위
8. 아모르파티 대히트 이후9.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10. 김연자 진성 한가위 빅쇼

1. 개요

김연자의 활동을 정리한 문서이다.

2. 무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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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동양방송(TBC)[1] <가요 신인 스타[2]> 오디션 쇼. 매주 금요일 예심에서 뽑힌 4명이 TV에 출연해서 우수 가수로 뽑히면 메달을 딴다. 메달을 따서 올라가는 토너먼트 형식으로 이 메달을 3번 따면 "신인 스타"가 되어 1년간 TBC 전속 가수로 활동한다.

TV를 보니 노래자랑에 의상을 입고 2절을 부르는 게 멋있어서 김연자는 출전하기로 결심했다. 김연자는 <9월의 노래>를 불렀는데 "패티김 노래 불렀지만 이미자랑 똑같구만"이란 심사평을 듣고 떨어졌다. 집에 왔는데 PD가 재도전해 보라고 전화했다고 한다. "저 그 노래밖에 모르는데요?"라고 김연자가 대답하자 PD는 그 노래로 다시 나오라고 했고 김연자는 나갔다가 합격했다. 패티김 노래를 고른 이유는 광주에서 노래자랑 여기저기 다녀 보니 트로트를 부르면 떨어지고 발라드를 부른 사람이 붙어서라고 한다.

합격한 뒤로 손진석 사장이 첫 음반을 취입해주었다. 1974년 8월 30일에 제작 발매한 데뷔 앨범은 그녀의 독집이 아니다. LP의 B면에 김연자의 노래를 넣고, A면에 민정일의 노래가 들어갔다. 김학송이 작곡한 《말을 해줘요[3]》가 대표곡이다. 15세에 그녀의 첫 노래이자 앨범이었다.[4]
다섯 번/세 번[5]의 도전 끝에 1974년 10월 3일 <가요 신인 스타>에서 패티김의 「살짜기 옵서예」를 노래해 우승[6]했다. 이 날을 데뷔일로 정했다.# 당시 이 쇼에서 "신인스타"로서 최연소 기록을 세웠으며 김연자가 불렀던 다른 노래는 「수원 처녀」.#

1976년[8] MBC 신인가수 선발대회에 출전했다. 함께 출전했던 당시 고1이었던 김란영 왈: “당시 김연자씨 창법이 지금과 달랐어요. 간드러지는 게 아니라 성량이 아주 풍부했어요. 그렇게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죠. ‘잘못 왔구나’ 싶었다니까요(웃음).” 하지만 김란영이 대상을 받고, 가수로 데뷔한다.

1976년 오아시스레코드 - <엄마의 노래 / 나를 보고 있네요>
1976.12.03 오아시스레코드 - <김연자 독집 "봄비가/낯선 얼굴들"> 제작 '봄비가'가 히트 조짐을 보이던 즈음[9] 김연자가 일본에 갔다는 말이 있다.

1977년 TBC 「전국남녀가요신인 콩쿨」 우승

당시 일본에서 엔카의 원류는 한국이란 말이 많았다.[10] 일본의 토리오(trio)레코드사가 이성애 같은 한국인 가수를 데려오려고 서울에서 연 오디션에 김연자는 합격한다. 일본행을 어머니는 찬성하고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김연자는 당시 심적으로 힘들었고 밤무대 외의 비전이 안 보이던 생활과 가난을 벗어날 돌파구를 원했다. 비자가 안 나와 10달 이상 기다리다가 1977년 8월 일본에 간다.채널A_분노왕 28회 하지만 일본에서도 일본어도 모르고 힘들고 외롭고 한국에 가고 싶다며 매일 울며 엄마에게 전화했더니 당시 직장인 월급이 12만 엔이었는데 전화세가 30만 엔 나와서 회사한테 혼났다. 초기엔 향수병에 시달렸다. 술만 먹으면 집에 가겠다며 여권을 들고 집 밖에 서 있었다. 다행히 동네에 택시가 잘 안 다녔다. 그리고 한국이 욕먹는 게 싫어 참고 이겨냈다. "내 이름은 들리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니 나쁜 얘기를 하는 것 같아 스트레스를 받았다"
파일:1977 일본 김연자 여자의 일생.jpg

일본 데뷔 싱글 음반

1977년에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일본어로 리메이크한 《女の一生(듣기)》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일본 데뷔곡 수록 앨범 토리오 레코드사가 2만 엔을 아사쿠사 공회당에게 줘서 첫 무대를 가졌다. 3년 전속 계약으로 회사가 월급과 의식주를 제공했다. 히트치지 못해서 스케쥴이 별로 없었다. 1년만에 일본어와 글에 능숙해졌다.

1978년[11] 김연자는 방송에 출연했다가 훗날의 남편 金好植(김호식)과 처음 만난다. 스튜디오에서 자주 마주쳤다. 남편은 첫눈에 천생연분이라 느꼈다 했다. 김연자도 처음부터 끌렸기에 같은 성이지만 본관이 다름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그는 재일교포 2세이자 유명 재즈 오케스트라 '클리어 톤즈'의 지휘자이자 악단장. "제가 방송무대에 출연했다가 남편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어요. 사실 제가 그때 나이도 어린데다가 낯선 외국 땅이라 모든 것이 쑥스러고, 기도 제대로 못 펴고 있었거든요.그런데 하루는 누군가가 다가와서 한국말로 아주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돌아봤더니, 바로 밴드 지휘자였어요. 그때 누군가와 한국말로 대화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반가웠죠."

엔카를 부르면서 밝고 여리며 하늘하늘 꺾는 창법을 익혔다. 트로트 창법과 접목시켜 감칠맛 나고 독창적인 목소리를 찾아냈다. 하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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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2월 19일 오아시스레코드 - 김연자 독집 <두손을 잡아요 / 먼 훗날>

일본 소속사가 주는 월급은 25만 엔이었는데, 20만 엔은 어머니에게 보냈다. 어머니는 봉투 붙여 생활비를 하고 연자가 보낸 돈을 모아서 빚을 보태 연립주택을 샀다. 김연자가 비자 때문에 6개월마다 귀국할 때마다 사글세, 월세, 전세로 집이 이사해 있었다. 일본 데뷔 3년만에 한국에서 재계약을 기다리는데 해고 통보를 받는다. 일본 회사 사람에게 “3년 동안 히트도 못하고 월급만 나가는 가수"라는 말을 들었다.

3. 출세

1980년 11월 10일[12] <힛트레코드> 알잖아요 내 마음 / 둘이서 앨범 듣기

김연자가 할일없이 집에서 놀고 있는데, 작곡가 김영광 씨가 메들리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김연자 왈 "메들리가 뭔데요?"
1980년 12월 20일(or 1981년 5월 8일)[13] 힛트 레코드에서 트로트 메들리 앨범 <노래 꽃다발 1집>을 제작 발매했다.앨범 듣기
1981년 3월 13일 노래의 꽃다발 3집[15] 발매했다.듣기
1981년 <힛트레코드> 어디쯤 가고 있을까 / 서울행 완행열차

1981년 8월 31일 ~ 9월 1일[17] 노래 실은 관광열차 제1집 .

1982년 4월. 밴드 악단장 출신 재일교포 2세 김호식과 결혼했다. 남편은 18세 연상이며 자식이 있는 재혼했다. 김연자는 결혼할 때는 인기가 많지 않았고 메들리 앨범이 약간 히트 치려 할 때였다고 말했다. 채널A 분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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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6월 NHK 생방송 출연.
1982년 7월 9일 <오아시스 레코드> <김연자 신곡집 갈길을 못가네 / 남의 속도 모르고> 발매.
1982.08.15 <노래 올림픽 제1집> 제작.듣기 (지구 레코드)
1982.08.15 <노래올림픽 제2집> 제작
1982년 8월 25일 <노래올림픽 제3집> 제작
1982년 9월 20일 김연자 신곡 1집 제작.(지구 레코드)앨범 듣기
진정인가요(1982) (1982년 12월 30일, 1982년 KBS 가요대상 여자가수상 후보[18]

1983년 6월 25일. <2집 망각> 듣기 <그런거야> 히트. 중박
그런거야(1983) (1983년 12월 30일, 1983년 KBS 가요대상 여자가수상 후보[19]
1983 MBC 10대 가수 상

* 어머님께 50평 집을 선물했다.[20] 84년도쯤에 사 드렸다는데 지구 레코드 계약금으로 돈을 댔다는 건 말이 좀 안 맞다. 어쨌건 이때 엄청나게 잘나가던 건 명백한 사실이다. SBS미운우리새끼

1984년 9월 15일 3집 <타인의 얼굴 / 가면의 사랑> 발매.앨범 듣기 여기 수록된 '수은등'이 한국에서 대박났다. 2021년이 된 지금은 '아모르 파티'가 유명해졌지만, 김연자의 대표적인 히트곡은 '수은등'을 뽑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다.
수은등(1984) (1984년 12월 30일, 1984년 KBS 가요대상 여자가수상 후보[21]

1984년 10월 19일, 한국인으로서 조용필에 이어 두 번째 NHK홀 리사이트를 열었다. 라이브 레코드 한일 동시 발매한다.

1984 MBC 10대 가수 상

1985년 7월 15일 제작. 김연자 4집 <당신은>
영동부르스(1985) (1985년 12월 30일, 1985년 KBS 가요대상 여자가수상 후보[22]

1986년 5월 20일 제작. 작년에 낸 4집에 2곡을 추가하여 4(.5)집 재발매.
1986년 <천하장사>
아침의 나라에서(1986) (1987년 4월 25일,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때부터 공식 주제가로[23] 사용되어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의 개막식에서 연주되었다.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 때는 캘거리와 서울을 위성으로 연결한 "우리는 올림픽" 생방송에서 소개되었으며, 캘거리 동계 올림픽 폐회식에서도 연주가 되었다.

하지만 1988년 6월에 서울 올림픽 주제가는 <손에 손 잡고>로 교체된다.TVN 인생술집
파일:1988 올림픽 아침의 나라에서.png

4. 일본에서의 성공

김연자는 <아침의 나라에서>가 올림픽 주제가니까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일본 재진출을 결심한다.

<아침의 나라에서>는 요시오카 오사무(吉岡治)가 작사한 <朝の国から>란 제목의 싱글로 발매됐다. 1988년[24] 5월 일본 バップ VAP 레코드사에서 1절은 한국말, 2절은 일본말 가사로 취입하였으며, 서울 올림픽 공식 주제가로 발표되고, 5월 25일 도쿄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제목으로 88 서울 올림픽 공식 가요 발표회를 가졌다. 올림픽 찬가를 부른 가수가 일본에 왔다고 홍보했다.

1988년 6월 21일 갑자기 올림픽 주제가 변경이 발표되어 주제가 자격을 상실한 김연자는 크게 상심한다.

남편은 김연자의 일본 내 기획사 대표를 맡아 그녀의 모든 스케줄과 수입을 관리하며 김연자의 성공에 공을 세운다. 남편은 가요계 인맥이 많았고, 남편 때문에 김연자를 도와준 사람들도 많았다.
“두 번째로 일본에 갔을 땐 아무런 신경 쓸 일 없이 노래만 부르면 됐어요. 그땐 남편이 제 매니저가 되어주었어요. 남편은 어떻게 하면 가수 김연자를 세계로 통하게 할 수 있을까 연구하는 사람이에요. 어떤 때 보면 남편이 저보다 더 제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같아요. 남편 이 야쿠자라는 등의 소문은 말도 안 돼요. 정말 자상한 사람이에요.”

어쨌든 이노래는 시판 2개월만에 10만 장 이상 팔리며 히트한다. 덕분에 김연자는 일본에서 성공가도에 올라서 주로 일본에서 활동한다.

다음 해인 1989년 NHK 홍백가합전에서 <아침의 나라에서>를 불렀다.
1989년 제 40회 NHK 홍백가합전 朝の国から (아침의 나라에서)
당시에 일본에서 HD하이비전으로 방영됐다.

NHK 홍백가합전에 총 3번 출연하며[25] 계속 히트곡을 내서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엔카 가수 중 한 명이 됐다.

1989년 6월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앙콜 공연.
1989년 10월 5일 미야코 하루미(都 はるみ)가 프로듀스한 신곡 暗夜航路(암야항로)[26]발매. 인기가 없다가 6개월만에 인기 폭발해 그녀의 대표곡으로서 장수한다. 60만 장 이상 팔렸다.
キム・ヨンジャ - 暗夜航路(암야항로)

1990 일본 산토리홀 엔카 가수 첫 공연

1990년 8월 15일 소련 사할린 동포 1만 명 야외 자선공연 <눈물의 아리랑(涙のアリラン)>. 사할린에 거주중인 노인 10명을 한국에 초대. 김연자가 기억에 남는 특별한 공연 3가지[27] 중 하나로 꼽았다.
【공연 사진 펼쳐 보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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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9월 15일~25일 3회째의 브라질 공연. 상파울로시 의회로부터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회 공헌한 사람에게만 수여하는 ‘안셰타장’을 수상. 상파울로시내에 ‘김연자 거리’ 창설의 명예.

1994년 NHK 홍백가합전에서 <흐르는 강물처럼>을 노래.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 '흐르는 강물처럼'을 부르는 것을 보면 왜 일본에서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한국으로 치면 조용필의 추모 공연으로 모나리자를 일본인이 부르게 한 것이다. [28]
김연자 - 川の流れのように (흐르는 강물처럼)

1995년 10월 27일 발매한 싱글 ‘涙の鎖(눈물의 사슬)’은 엔카부문 테이프·CD 판매량 1위를 차지하며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가요계를 평정했다는 소리를
김연자 - 涙の鎖(눈물의 사슬)

1997.2.23 미수교국인 쿠바의 수도 아바나 국립극장에서 쿠바국립교향악단의 협연으로 공연. 한국인 첫 쿠바 공연. 클래식 위주인 아바나 국립극장에서 팝송을 처음 부름. 동아시아 노래가 아닌 팝송, 스페인계 노래와 <아침의 나라에서> 부름.#
雪國(설국) 원곡(1986):요시 이쿠조(吉幾三)

2001년 NHK 홍백가합전에서 <림진강>을 노래했다. 북한 공연을 준비하며 배운 노래다.
2001년 NHK 홍백가합전 김연자 <림진강>

2001년 7월 일본 법무성 대상 수상

5. 북한 공연


6. 2002년 이후

이 시기 인터뷰에서 김연자 왈 :
"일본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지요. 일본은 어디까지나 '단체사회'라는 걸 깨닫게 됐고 이젠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고 노력한답니다." "히트곡이 별로 없어요" "남의 노래도 많이 불렀어요" "선배들이 닦아 놓은 길을 열심히 따라갔을 뿐이에요"

2002년 FIFA 월드컵 찬가였던 '愛☆アリガトウ (사랑☆고마워)'.
2002년 11월 21일 <北の雪?(북의 눈벌레>싱글 발매. 오리콘 엔카 차트 5주(다른 기록과 달라 불분명) 연속 1위



2006년 프랑스 파리 공연 계획했으나 취소되어기사 2007년 프랑스 파리에서 공연했다.기사

2008년 8월 2일 or 6일[32] '夜明け前(동트기 전)'싱글 발매. 오리콘 엔카 차트 3주 연속 1위.



일본에서 새 싱글 발표로 한창 활동 중, 8월 8일 급성 간암으로 아버지가 사망했다.

스케줄로 바쁠 김연자에게 어머니가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10일 후에야 공연 후 회식 때 지인의 전화로 부고를 들었다. 향수병과 마지막엔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었던 꿈과 한국에 홀로 계신 어머니가 건강하실 때 자주 뵙기 위해 한국 활동 재개를 결심한다.
“국내에서 활동하면 일단 한국에 와 있는 동 안이라도 가족과 함께할 수 있잖아요. 지난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가족의 소중함을 크게 느꼈어요. 음반을 내고 한창 바쁠 때였는데 열흘 뒤에야 임종 소식을 들었어요. 제가 흔들릴까 봐 큰 공연부터 무사히 마치라고 알 리지 않으셨대요. 그 얘기를 듣고 수화기를 붙잡은 채 몇 시간을 울었는지 몰라요.”
일본 연예계는 엄격해 스케줄을 펑크 내면 막대한 손실을 볼 수 있다. 당시 그녀가 스케줄을 취소하려면 약 100억 원 이상의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33] 돈 때문에 일본에 갔지만 결국 돈 때문에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모습도 지켜보지 못하게 될 줄이야. 그녀는 장녀로서 면목이 없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불효를 갚기 위해 그녀는 한국 활동을 결심했다. 떠나보내고 난 후에 그리워하느니, 지금부터라도 가족의 정을 더 느끼고픈 마음에서다. 그러나 아직은 아예 한국에 정착할 계획은 없다. 그간 일본에서 활동해 온 세월이 아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분 간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할 예정이다.

“일본 생활은 정말 바빠요. 새 음반이 나올 때 마다 신인처럼 뛰어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20여 년을 그렇게 노래만 부르며 살아왔지요.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저는 죽을 때까지 노래를 하고 싶어요. 목소리가 허락하는 한 노래를 부르고 남은 생은 우리나라에서 보낼 거예요. 제가 뼈를 묻을 곳은 한국이죠. 귀화는 생각해 본 적 없어요.” 한국에서 자신의 1980년대 인기가 그대로 남아 있을 줄 알았던 김연자는 한국에 와서 달라진 상황을 깨닫고 신인의 마음으로 해야되겠구나 생각했다. 한국어도 잘 기억이 안 나서 "에… 또"만 반복했다.

2009년 12월, 22년만에 한국에서 신곡 <10분 내로>[34] 발표. 한국 성인가요계에서도 여전히 죽지 않은 김연자 파워를 보여주며 성공했다. 이후 이 곡은 일본 콘서트에서도 한국어로 불러지면서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가 됐다.
<10분 내로> (2009)
김연자의 주장에 따르면, 처음 일본에 무일푼으로 간 김연자는 빚이 있는 남편에게 돈 관리를 맡겼고, 그게 쭉 이어져서 김연자는 활동에 필요한 돈을 남편에게 매번 타서 쓰기만 했다. 지방 공연에 가면 경비로 20만엔을 주는 식이었다. 남편은 "가수는 노래만 하면 된다"며 김연자에게 출연료나 직원 월급 등을 한번도 안 알려줬다. 그녀는 쉬는 날이 드물게 매일 일했고 가수로서 성공했지만, 그녀가 속한 회사의 사장이자 돈 관리를 전담했던 남편은 돈 없다며 김연자에게 돈 주기를 꺼려 했다. "남편에게 월급을 달라며 직접적으로 호소해 보기도 했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그래도 남편이 돈을 모아놓고 자신의 노후를 책임져줄 거라 기대했던 김연자는 남편이 모은 돈이 없대서 충격 받는다. 김연자는 가수 활동으로 번 돈을 1400억원(매출이겠지만)으로 추산했지만, 남편이 돈 없대서 이혼 위자료나 재산분할을 전혀 받지 못했다.
2012년에 YJK COMPANY를 설립했다.

7. 아모르 파티

김연자는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를 좋아한 까닭에 작곡가 윤일상을 소개받는다. 윤일상이 "누나 어떤 노래 하고 싶어?"라고 묻자 김연자는 그동안 불러왔던 노래 주제들과 다르게 자신의 인생을 표현하고 싶어 "내 인생의 찬가"를 원한다고 대답하자 윤일상이 만들어줬다. MR을 받은 김연자는 발라드풍의 음악을 예상했는데 생소한 EDM에 놀라고 감을 못 잡아 헤맸다고 한다. 노래할 타이밍을 분간할 수 없고 못 부르겠다고 윤일상에게 전화하여 가이드 보컬 녹음본을 받고서야 녹음했다. 엇박이 많아 연습 때도 어려웠는데 녹음 후에도 어려워서 옆에서 잡음이 방해하면 틀린다고 한다. 지금도 무대에서 손으로 마디를 세는 모습을 보인다. 초기 라이브 때는 많이 틀렸다.

처음 제목은 '연자송'이었다며 "이는 내 인생을 그린 곡이었기 때문"이라 밝혔다.KBS 아침마당 7941회 2017.09.05 운명을 사랑하라(독일 철학자 니체)는 뜻의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제목을 달아준 사람은 신철 프로듀서다. 이건우 작사.
원래 아모르 파티에 랩 피처링이 들어가려고 했죠. 근데 제안했던 분이 거절하면서 지금처럼 심플하게 나왔어요. 유명한 베테랑 남자고 현역이라기보다 선생님에 가까운 분이에요. 팩트는 그분이 절 찼다는 것이다.(웃음) 지금 버전이 좋아서 만족해요.

노래에 대해서는 아모르 파티(김연자) 참고.

2013년 3월 27일 <채널 A 분노왕> 방송에서 EDM과 트로트를 결합한 아모르 파티가 최초로 공개됐다. 인터넷에 기재된 앨범 발매일은 7월 23일이다. 보통 신곡 앨범을 발매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지만, 신곡 앨범이 발매되기 전에 방송이나 콘서트에서 먼저 부르는 경우도 알게 모르게 있는데, 아모르 파티가 후자의 경우에 해당되는 듯 하다.[35]

"숨 차다", "어디까지 1절이냐?" 등 중장년층이 어려워하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공연장에서 노래를 불러도 별 반응이 없어 '이 노래는 꽝이다'고 그녀는 생각했다.기사 자신은 좋아했는데 트로트 팬들이 "이 노래 못한다, 접어라" 등의 말을 했다고도 한다.MBC 박준형, 정경미의 2시만세 자신도 가사 외우기도 어려워 성인 가요에 안 맞다고 판단해 이 노래 부르기를 멈췄다. 대신 '밤열차', '쟁이쟁이'를 밀었다.

2014년 김연자 왈 "국내에서 김연자는 '트로트 가수'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틀을 깨고 싶어서 '아모르파티'를 불렀는데 오히려 대중과 멀어진 것 같다"#

7.1. 역주행 경위

2016년 KBS 열린음악회(2016년 7월 10일 방영) PD가 이 노래를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김연자는 이미 본인의 노래 아모르파티가 익숙해지기 전에 해당 곡의 공연활동을 포기하고 살아가던지라 가사도 잊어버린 상황이라 처음엔 거절하였지만 PD가 꼭 불러 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36]" EXO 다음 순서로 출연했다. 인터뷰 영상 알고 보니 PD가 평소에도 ‘왜 이 좋은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 의아했다더라.기사

윤일상이 엑소 무대 끝나고 나가지 못한 채 앉아 있던 엑소 팬들이 아모르파티를 보고서 바로 sns에 팬캠과 추천글을 올려 소문냈다고 말했고, 그걸 들은 김연자가 언론에 말하여 그렇게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그것은 윤일상의 잘못된 추측이고, 그런 경위와 다르게 이 공연 영상을 나중에 돌려본 사람이 인터넷에 소문낸 것일 가능성이 크다. 정작 열린 음악회에 엑소와 김연자가 함께 출연한 2016년에 계속 잠잠했기 때문이다.

파일:amor fati restart.jpg
그러다가 2017년 3월이 되어서야 <아모르파티>를 추천하는 트윗이 등장했다. 이 추천글이 좋은 반응을 일으키며 인터넷 여기저기 퍼지면서 알려졌다. 이 시기에 이를 통해 아모르파티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노래를 처음 접한 반응인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이전엔 <아모르파티>을 추천글이 올라와 반향을 일으킨 적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 트위터[37]는 엑소의 팬일 수도 있으나 그렇더라도 적어도 열린음악회 현장에 엑소 때문에 앉아 있다가 어쩔 수 없이 보게 됐다는 설은 틀릴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트윗엔 관중이 찍은 "아모르파티"가 아닌 kbs 방송 영상이 링크됐다. 고로 공연 때 바로 팬캠이나 추천글을 올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후일 유튜브하다가 <아모르파티>를 보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정황상 "열린음악회 녹화 현장 엑소팬의 즉석 입소문에 의한 역주행설"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8. 아모르파티 대히트 이후

어쨌든 역주행한 아모르파티의 대박으로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김연자는 제5의 전성기라고 말했다. 그래서 김연자의 히트곡으로 수은등보다 아모르 파티가 먼저 떠오르거나, 김연자는 잘 몰라도 아모르 파티는 아는 사람들도 많다. 초딩들도 "아모르 누나" 라고 부르면서 알아보는 등 트로트계를 초월한 전국적 인기를 누리게 됐다.

2017년 5월 27일에 방영된 <무한도전>에 출연하며 더욱 인기가 많아졌다. 지상파 3사를 포함해 여러 주요 tv 쇼에 출연하며 방송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인물 중 하나로 떠올랐다. 대기실에서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후배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이며 큰 어른의 풍모도 과시한다. 현역 아이돌들의 나이가 보통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임을 감안하면 거의 젊은 할머니 뻘인 셈이다.

부산대의 섭외로 가수 경력 처음으로 대학 축제 무대에 섰다. 부산대에서의 공연은 반응이 좋아 유튜브 조회수도 높게 나왔고, 다른 대학에서도 섭외가 많이 들어왔고, 뉴스로도 나갔다. 이에 김연자는 9월 서울 핸드볼경기장에서 '떼창' 노래경연(tvN 300)에 부산대 학생 150명을 초청했고, 부산대 학생들은 버스 3대로 상경해 아모르파티를 떼창으로 불러 상대 가수를 이기는 등 2차례나 서울로 올라가 출연했다.

부산대 총학생회가 가을축제 '시월제'를 개최한다고 하자 김연자가 감사의 뜻으로 부산대 재방문하여 무료공연과 장학금 지급을 했다.

2018년 12월 28일 KBS 가요대축제 엔딩곡으로 선정되었을 때 그야말로 가요계 대통합을 이뤘다고 해도 될만한 위엄을 보여줬다. 사실 연말 무대의 엔딩 자리를 놓고 인기 아이돌 팬덤과 소속사 측의 보이지 않는 알력다툼이 생기기도 하는데, KBS가 이런 논란을 한 번에 잠재워버리는 신의 한 수를 뒀다고 할만한 기막힌 선택을 했다. 여담으로, 이 공연 당시 세계구급 아이돌이 안무를 모두 외우기라도 한 듯이 사실상의 백업 댄서 역할을 자처하자 해외의 K-POP 팬들은 "도대체 저 여자 가수가 누구길래 저런 광경이 나오느냐?" 라면서 크게 놀랐다고 한다. 또 다른 아이돌의 해외 팬들도 세계구급으로 유명한 아이돌[38]을 백업 댄서와 뒷배경으로 깔아버리는 김연자의 위엄에 놀란 것은 마찬가지다.[39] 그 덕분에 유튜브에서 김연자 동영상에 갑자기 외국인들의 댓글이 증가하는 일도 있었다. 영상(해외IP 전용), 영상(국내용), 영상(국내용2)

불후의 명곡 400회 일본 특집의 1부인 399회(2019.04.20. 방송)에서 전설로 출연했으며 트롯 전국체전에 글로벌 팀 감독으로 출연했다. 유명가수전에 출연했다.

후에 탈모르 파티로 리메이크되기도 하였다.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선거송으로 사용하였다.

9.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장미여사 - 무대모음.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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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김연자 진성 한가위 빅쇼

2023년 9월 29일 진성과 함께한 KBS2에서 추석특집 김연자 진성 한가위 빅쇼를 방영했다.


[1] 현재의 JTBC 또는 KBS2[2] 이름에 쇼 or 전국이 붙어 얘기되는 경우도 있지만 당시 동양방송이 전국구가 아니라 수도권과 동남권 위주로 방송되었고, 당시 신문 기사에는 "가요 신인 스타"라고만 지칭함을 봐서 프로그램의 정식 명칭은 <가요 신인 스타>로 보인다.[3] "말해줘요"라고 잘못 소개된 경우가 많다.[4] 제작 또는 발매일이 1974년 10월 3일 가요신인스타 쇼에서 메달 3개를 따 우승한 후인 것으로 얘기되는 경우도 있는데, 10월 7일 기사에 김연자가 취입한 곡으로 말을 해줘요가 있다고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 데뷔앨범은 우승하기 전에 예심 합격이나 첫 메달 획득 후에 제작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5] 인터뷰마다 말이 다르다.[6] 메달 3관왕을 말한다.[7] 오아시스 레코드[8] 1973년이란 말도 있고, 김란영이 고1 때라는데 1963년 9월생이라는 것과 계산이 맞지 않는다.[9] 조짐만 보이고 그친걸로 보인다.[10] 엔카의 기틀을 세운 일본의 전설적인 가수이자 작곡가인 코가 마사오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서 민요를 배워 이를 엔카에 접목시켰다. 1977년 일본에서 이성애의 <가슴 아프게(1976)>가 대히트 쳤다. 일본 가요계에서는 ‘엔카의 바탕을 한국의 가수 이성애를 통하여 확인하게 된다.’면서 극찬했다, ‘이성애’는 당시 2년이 채 되지 않은 시기에 8장의 앨범을 발표하면서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기획상을 받았다[11] 1977년이란 말도 있음. 처음 일본 진출했을 때란 말을 오해해서 일본에 간 첫 해로 착각한 것일 수 있다.[12] LP에 적힌 일자. naver엔 1981년 4월 6일.
파일:19801110 김연자 알잖아요 내 마음.jpg
[13] 출처마다 날짜가 다르다. #1#2 #3[14] LP엔 힛트 레코드라고 적혀 있다.[15] 김일성이 김연자의 이 메들리 앨범 카세트 테이프를 선물 받아 김정일과 함께 들으며 좋아했다. 이게 아니라 다른 앨범일 수도 있다.[16] 자체 조사라고 공신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고 레코드사에서 음반 제작해서 판 수량이다.[17] 출처마다 날짜 상이하다.[18] 여자가수상은 윤시내가 받았다.[19] 여자가수상은 윤시내가 받았다.[20] 방배로 28길 31[21] 후보 지명 장면 . 여자가수상은 이은하가 받았다.[22] 여자가수상은 정수라가 받았다.[23] 1986 아시안 게임 개막식 때 <대회가>라고 나온 것은 다른 음악이다.# <아침의 나라에서>는 개막식 후반에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 뒤에 합창되었다. # 아시안 게임 때도 사용된 것은 맞으나 아시안 게임 "공식 주제가"였는지는 의문이다.[24] wiki에는 1987년 발매로 표기됐지만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25] 1989년 '아침의 나라에서', 1994년 '흐르는 강물처럼', 2001년 '림진강'이라는 곡으로 출전.[26] 시가 나오야의 소설 '암야행로'와는 관련없다.[27] 올림픽 폐회식, 홍백가합전, 사할린 자선공연 #[28] 흐르는 강물처럼은 akb48의 제작자이기도 한 아키모토 야스시의 작사곡었다. 당시 작사가였던 야스시는 이곡으로 대 작사가의 반열에 올랐다.[29] 김일성 생일 기념 연례 행사[30] TV에는 청년문화회관이라 나왔다.# 청년중앙회관 안의 극장을 청년문화회관이라 하는 것일 수 있다.[31] 김연자가 이야기할 때마다 말이 조금씩 다른데 여러 가지 인터뷰를 조합해서 정리한 이야기.[32] 기사나 인터뷰마다 발매일이 다르다[33] 이러한 규정 때문에 가수 이박사는 진짜로 100억을 날렸다.[34] 이병오 작사, 이호섭 작곡.[35] 이와 같은 또 다른 예로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는 2000년 상반기부터 방송에 나오기 시작했고 뮤직비디오까지 제작되었지만 앨범 발매일은 2001년 2월 5일이며, 서지오의 '여기서'는 2017년 10월부터 방송에 나오기 시작했지만 앨범 발매일은 2018년 1월 15일이다. 설운도의 '사랑이 이런 건가요'도 2018년 5월부터 방송에 나오기 시작했지만 앨범 발매일은 1년이나 늦은 2019년 5월 9일이다.[36] 본인 표현이다.[37] 현재 알려진 시발점인 트윗 계정 @standbymemong이 해지되고 여기서 링크된 유튜브 계정도 해지되어 조사가 어렵다. 이 계정이 인터넷에 남긴 대화에도 엑소는 찾을 수 없다.[38] 당시 좌측엔 EXO, 우측엔 방탄소년단, 중앙엔 TWICE가 춤을 추고 있었다.[39] 물론, 김연자EXO, 방탄소년단, TWICE 멤버들이 태어나기 이전에도 가수로 활동했고 한류 1세대의 주역으로 평가 받을 정도로 해외 무대에서 이름을 크게 알렸던 가수였다. 특히, 일본에서는 '엔카의 여왕' 으로 부를 정도로 우리나라 이상으로 더 인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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