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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15:37:26

김연수(1965)

제8대 대전광역시 중구의회 후반기 의장
김연수
金連洙 | Kim Yeon-soo
파일:김연수 의장3.jpg
<colbgcolor=#e61e2b><colcolor=#ffffff> 출생 1965년 9월 20일 ([age(1965-09-20)]세)
충청남도 부여군
본관 광산 김씨
지역구 대전광역시 중구
거주지 대전광역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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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61e2b><colcolor=#ffffff> 학력 부여홍산초등학교 (졸업)
대전경덕중학교 (졸업)
대전상업고등학교 (2학년 휴학)
대전예지고등학교 (2학년 편입학, 졸업)
대덕대학교 (자동차학과 / 전문학사)
대전대학교 (경영학 / 학사)
대전대학교 (경영학 / 석사)
신체 175cm
병역 병역필
종교 기독교
소속 정당

파일:국민의힘 흰색 로고타입.svg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7, 8
약력 현대건설중기 해외사업부 리비아 근무 6년
[1]
한진자동차정비 대표
대전광역시 그린자동차정비조합 2대 이사장
제7, 8대 중구의회 의원
제7대 중구의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
제8대 전반기 중구의회 부의장
제8대 후반기 중구의회 의장
국민의힘 윤석열 대통령후보 대전광역시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국민의힘 중구청장 예비후보
국민의힘 책임당원협의회 부의장
대전광역시체육회 대외협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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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출생 및 성장2.2. 리비아 파견2.3. 중구의회 의장2.4. 근황
3. 여담4. 어록5.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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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술자(Technician)출신[2] 정치인이다. 재선 구의원. 제8대 대전광역시 중구의회 후반기 의장을 역임하였다.

2. 생애

2.1. 출생 및 성장

김연수는 1965년 9월 20일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5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모님은 교육열이 강하였다. 중학생이 되던 해 부여에서 대전으로 유학을 나와 정착했다. 대화동의 허름한 옥탑방에서 누나들과 자취생활을 하며 부모님의 뜻을 가슴에 간직하고 학업에 열중했다고. 대전경덕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이후 대전상고에 진학하였으나 2학년이 되던 해에 휴학을 결심한다.

홀로 계신 어머니를 뵈러 시골에 갔을 때, 5남매를 먹여살리기 위하여 일하시는 어머니의 씁쓸한 현실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체구의 몇 배는 될듯한 콩 다발을 지게에 지고 힘겹게 걸어오는 모습을 본 순간, 김연수의 마음은 너무 아팠다. 그리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기술을 배워 돈을 벌어서 하루빨리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들을 부양하기로 결심했다. 논산의 농민교육원에 입학하여 자동차정비기능사 2급 자격을 취득하고, 선화동 소재의 신형자동차정비공장에 취업하고, 불과 3년만에 어머니를 대전의 자취방으로 모셔와 함께 지낼 수 있었다.

2.2. 리비아 파견

한 번 휴학한 학교는 직장생활로 인하여 복귀하기 어려웠다. 월세방에서 전셋집으로 간다는 꿈은 쥐꼬리보다 못한 월급으로는 수십년이 걸린다는 차디찬 현실에 부딪힌다. 김연수는 이 시기에 관하여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가깝게 다가왔다"고 회고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서 해외근로자 파견 모집공고를 보게된다. 이것이 삶의 유일한 탈출구라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응시하였고 현대건설에 합격을 하게 되었다.

합격 후 김연수는 리비아에 자동차정비사로 파견될 운명이었다. 당시 만연했던 아랍계 테러리스트의 배후로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가 지목되었고, 리비아는 미국과 전쟁 중이었다. 리비아에 있던 근로자들은 불안한 마음에 앞다투어 귀국을 원했다. 그 빈자리를 채울 근로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전쟁 중인 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아들을 보내지 않으려 결사반대를 하였다. 급기야 매형에게 설득을 부탁했으나, 매형은 되려 출국을 응원했다.

파견이야말로 집안을 일으킬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누나들은 눈물로 그를 배웅하였다. 김연수는 폭격이 쏟아지는 리비아에서 삶의 전쟁을 펼친다. 리비아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더 뜨겁고 매서웠다. 사막의 모래 바람과 싸워야 했고, 전쟁으로 물자 수급이 부족하여 생활환경은 최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표한 돈을 벌기 전에는 귀국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인고의 세월 6여년 만에 계획한 뜻. 다시말해 집 한채와 소박한 카센터 운용할 재원 목표를 이루었고, 1992년에 귀국을 했다.

2.3. 중구의회 의장

귀국 후 카센터를 운영했다. 동종업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대전광역시 그린자동차정비조합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전광역시 중구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다.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한다. 전반기 부의장을 거쳐 후반기 의장으로 선출된다. 이로써 김연수는 민선 8기의 대전광역시 기초의회, 광역의회 통틀어 유일한 국민의힘 소속 의장직을 수행한다. 그는 여야의 대립으로 망가진 의회의 기능을 복구하고, 의원간 화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동시에 박용갑 구청장을 비롯한 집행부를 효과적으로 견제하였다.

2.4. 근황

김광신 중구청장이 중도낙마하자 202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에서 무공천을 발표하면서 당을 탈당하고 출마할 것으로 점쳐졌지만 당의 무공천 방침 앞에 18년간 지켜온 당을 탈당하여 출마하는 것은 국민의힘 책임정치에 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러 중구청장 재선거 불출마를 결정하였다.#

3. 여담

4. 어록

梅一生寒不賣香
매화는 일생을 추워도 그 향을 팔지 않는다

그가 좌우명으로 삼는 격언. 항상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오늘은 민주당 전당대회가 아니라 전국의 시군구를 대표하여 회의하는 날이다."
2020년 4월 20일, 전국시군자치구의장협의회 시·도 대표회의에서. 서울 중구의회 조영훈 의장에게 날린 일침. 의장협의회의 대표인 조 의장은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에 출마한 황명선 논산시장에 대한 지지발언을 하였다. 심지어 기념촬영에서 기호 2번 포즈를 취해달라 요구. 결국 조영훈 회장은 연단에 올라가 공식 사과를 했다.
"중구의 신형엔진"
김연수의 대표 캐치프레이즈.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10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전 중 가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4,661 (17.65%) 낙선 (4위)
2014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새누리당|
파일: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svg
]]
10,798 (38.8%) 당선 (1위) 초선
2018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자유한국당|
파일:자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5,974 (20.77%) 당선 (3위) 재선


[1] 1986~1992년[2] 자동차정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