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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8:34:46

김시스터즈

<colbgcolor=#111><colcolor=#fff> 김시스터즈
The Kim Sisters
파일:F-Kim-0614-Impact-e1402696353438.jpg
(왼쪽부터) 이민자, 김숙자, 김애자
장르 스윙재즈, 발라드,
리더 김숙자
데뷔 1953년
해체 1975년
레이블 Epic Records (1959년)
Mercury Records (1961년)
Monument Records (1963년 ~ 1966년)

1. 개요2. 활동3. 무대 영상4. 루머
4.1. 빌보드 Hot100 7위에 올랐다?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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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3년에 데뷔한 대한민국 최초의 걸그룹.

2. 활동

일제강점기 때 활동했던 한반도 최초의 걸그룹인 저고리 시스터즈의 멤버 이난영이 그의 딸들인 김숙자와 김애자, 조카 이민자[1]를 모아 김시스터즈로 데뷔시켰다. 1953년에 미8군 부대에서 첫 공연을 했는데, 당시 멤버들의 나이는 리더이자 맏언니인 김숙자가 겨우 13세, 막내인 이민자는 11세였다. 김숙자, 김애자의 부친인 김해송은 태어날 때부터 월북 후 실종 상태였다.

음악적 성향은 재즈, 특히 당시 유행했던 스윙재즈가 메인이었고 로큰롤, 일반 팝송, 컨트리 뮤직, 국악 등 다양했다. 세대 구분을 하자면 대한민국 재즈 0세대, 대한민국 걸그룹 0세대이다.

1959년에 대한민국 걸그룹 최초로 미국에 진출했는데, 당시 미국의 최고 TV쇼 '에드 설리번 쇼'에 22번이나 출연했다.[2] 1970년 5월 한국으로 귀국해 공연을 펼쳤고 한국과 미국을 돌아다니다가 1975년에 공식적으로 활동을 종료했다.

3. 무대 영상


김시스터즈의 무대는 4분 40초부터 나온다. 참고로 썸네일 가운데의 여인은 김시스터즈가 아니라 가수 송민도다.






에드 설리번 쇼 출연 모습. 1분부터 가수이자 김시스터즈의 어머니[3] 이난영이 같이 나와 흑인영가를 한국어로 개사해 부른다.

4. 루머

4.1. 빌보드 Hot100 7위에 올랐다?

김시스터즈의 곡 "Charlie Brown"이 빌보드 싱글 차트 7위까지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일부 언론과 인터넷을 중심으로 떠도는데 현재 존재하는 자료와 정보를 통해 확인된 바에 따르면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정보는 없다.

Charlie Brown은 더 코스터즈라는 그룹이 1959년 발표한 곡인데 김시스터즈가 이 곡을 커버해서 음반을 취입한 것까지는 확인이 된다. 또한 빌보드 핫100 7위 이야기는 한국어 웹사이트 또는 한국 언론의 영문판에서나 찾을 수 있는데, 만약 김시스터즈가 핫100 7위에 오른 것이 사실이라면 1962년 당시의 빌보드 싱글 차트가 발굴되든지, 아니면 미국측 웹사이트에서도 한 번은 거론될 만한데도 아무런 출처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김시스터즈는 빌보드지에 몇 번 실린 적##은 있으나 정작 김시스터즈가 7위에 올랐다는 그 싱글 차트만은 발견되지 않았다.

최규성이라는 평론가가 자신의 저서 <대중가요 LP가이드북>에서 김시스터즈가 빌보드 핫100 7위에 올랐다는 설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후일 발표한 <걸그룹의 조상들>이라는 저서에서는 "차트를 확인해본 결과 김시스터즈가 빌보드 핫100 차트에 오른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정정한 바 있다. 한편 김시스터즈의 일대기를 그린 다큐 영화 <다방의 푸른 꿈>을 감독한 김대현 감독 역시 영화 제작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면서 김시스터즈가 빌보드 차트 순위에 올랐다는 것이 잘못된 내용이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씨네21과의 인터뷰 기사에서 밝힌 바 있다. 이를 볼 때 김시스터즈의 빌보드 핫100 7위설은 거짓임이 확실하고 싱글 차트 진입 자체도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동아일보, 문화일보, KBS 등 온갖 제도권 언론에서 이 설을 그대로 보도하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를 확대 재생산할 기미가 보이고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5. 여담



[1] 가수 겸 작곡가인 이봉룡의 딸.[2] 참고로 비틀즈보다도 더 많이 출연했다.[3] 이민자에게는 고모(부친이 이난영의 오빠).[4] 위의 김시스터즈 공식 홈페이지를 참고하였다.[5] 스틸리 댄의 명곡 Aja도 실제 지인의 한국계 와이프 이름인 애자에서 유래했는데 마찬가지로 에이자로 발음한다[6] 이 수치는 21세기에도 B-급 연예인이 매일 행사 1개씩은 뛰어야 채울 수 있는 금액이며 1960년대 미국 평균 임금이 5,600달러(2020년의 딱 1/10)였음을 비교하면 당시 한국을 아득히 넘어 미국에서도 스타급 대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단순한 진출 수준이 아니라는 의미다.[7] 이쪽도 로드 스튜어트 등 협업으로 상당히 유명하다. 2006년에 부인과 함께 헝가리로 귀국한 상태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