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김빈길(金贇吉, 미상∼1405년).조선의 장군. 아호는 죽강(竹岡). 시호(諡號)는 양혜(襄惠), 본관은 고성 김씨(固城)이다.
태조(太祖) 때의 무인으로 낙안(樂安) 출신(현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이다. 성품이 충직(忠直)하고 근검(勤儉)하였다.
2. 생애
1394년(태조 3) 전라수군첨절제사(全羅水軍僉節制使)로 있을 때 만호(萬戶) 김윤검(金允劍) 김문발(金文發) 등과 함께 왜적의 배 3척을 섬멸하는 등의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같은 해 투항해 온 왜인이 도망간 일로 인하여 최운해(崔雲海)‧이구철(李龜鐵)‧김영렬(金英烈) 등과 함께 국문(鞫問)을 당하였는 데 이때 우정승 김사형(金士衡)과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이 그 죄를 감해 주기를 청하여 얼마 후 유배되고, 모두 수군(水軍)에 다시 편입되었다.이후, 1397년 왜구와 맞서기 위해 현재의 낙안읍성을 흙으로 쌓았다.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약 30여년 후인 1426년에 그 토성을 근거로 다시 석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대략 현재 낙안읍성의 모습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1405년(태종 5)에 전라도수군도절제사가 되었을 때에는 도내(道內)의 요해처(要害處)에다 만호(萬戶)를 두고, 병선(兵船)을 나누어 정박시켰고 또한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군비를 비축하게 하여 주는 것만을 바라는 폐단을 없애고. 평소 아랫 사람을 대함에도 한치도 소홀함이 없었다. 예로 그가 수군절제사로 있을 때에도 항상 사졸(士卒)들과 더불어 감고(甘苦)를 같이하였고, 또한 도적을 쫓아 행선(行船)할 때에도 분연(奮然)히 몸을 돌보지 않아 군사들이 모두 사력(死力)을 다하였으므로 가는 곳마다 승리하였다. 상을 받으면 항상 군사(軍士)의 공(功)이 있는 자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비록 외진 백성들이라도 그의 은혜을 입었다.[1]
이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관직을 버리고 낙안군 백이산 부근에 망해당이라는 정사를 짓고 노후를 보내면서 낙안군 지역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낙안팔경:망해당기>인 <금강모종><백이청풍><보람명월><옥산취죽영><징산숙로><평지부사><단교어화><원포귀범>은 이 지역에 지금까지 내려오는 가장 유명한 한시가 됐다.
늘그막에 김빈길 장군은 전북 고창으로 친인척과 함께 모두 이주하게 되는데 고향인 낙안과는 약 100여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생소한 곳이며 낙안군 지역에서 크게 이름을 떨친 장수가 일가친척을 모두 데리고 고향을 떠나게 된 점은 뭔가 말 못할 고민이 있었음을 반증해 주고 있다.
이 부분에 관해 김빈길 장군 후손들은 "당시 남해안 지역에 왜구의 침입이 잦고 국가적으로도 혼란스러운 가운데 모함이 난무해 야인으로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고 증언해 주고 있는데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고 백의종군하던 것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전북 고창에서의 야인 생활을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그곳에서도 왜적의 침입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다시 전쟁터로 나갔는데 결국 사진포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왕은 김빈길 장군의 전사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증의정부(贈議政府) 우의정(右議政)에 추증(追贈)하고 양혜(養惠)라는 시호까지 내렸다고한다.
3. 평가
현재, 전북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의 김빈길 장군 묘소에는 신도비 등이 세워져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고 전북 진안군 안천면 백화리에는 김빈길 장군 영정을 모신 화천사라는 사당이 있어 매년 2월 보름 향사를 지내고 있다.그에 반해, 고향땅인 낙안에는 옥산 부근의 생가나 백이산 자락의 정자인 망해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고작 낙안향교내 충민사의 영정 한 장이 전부다. 특히, 그가 쌓았던 낙안읍성내에도 김빈길 장군과 관련해 흔한 비석조차 없다는 것은 안타까움이다. 김빈길 장군이 낙안군의 중시조나 마찬가지며 낙안읍성을 최초로 쌓은 인물이란 점을 감안하면 이런 모습은 부끄럽기까지 하다
[1] 참고문헌 - 태조실록(太祖實錄), 정종실록(定宗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 (집필자 : 권이태 , 수정자 : 이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