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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3:27:24

김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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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김내성의 작품들

1. 개요

김내성(金來成). 1909-1957

한국의 추리소설[1], 대중소설 작가. 호는 아인(雅人).

2. 생애

1909년 음력 5월 29일[2] 평안남도 대동군 남곶면 월내리[3]에서 소지주였던 아버지 김영한(金榮漢)과 어머니 강신선(康信仙) 사이의 3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23세이던 193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대학에 진학했다. 원래는 독일 법학을 전공했지만 일본 유학생활 중 추리소설에 심취하여 일본의 추리소설과 서양 고전문학들을 섭렵하며 문학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5년 일본 잡지에 일본어로 된 세 편의 단편 추리소설을 게재하기도 했다.

귀국 후 본격적으로 추리소설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6년,일본 유학시절 일본어로 쓴 소설 "추리 소설가의 살인"을 개작한 "가상범인"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1937년에는 김내성이 창조한 한국 최초의 명탐정 캐릭터 유불란[4] 탐정이 처음 등장하여 활약하는 장편 소설 "백가면"을 발표했다. 한편으로는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조광"지의 편집과 각종 좌담회 사회를 맡았다.

1939년은 김내성에게 의미있던 해로 조선일보에 추리 연재소설 "마인"을 연재했는데 크게 히트를 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아내의 친정이 있는 함경남도 안변으로 요양을 떠났고 이곳에서 해방 이후 김내성의 히트작이 된 "청춘극장"을 구상하게 되었다.

1940년대는 김내성에게 있어 흑역사로 남을 시대였다. 그는 각각 1943년과 1944년에 발표한 두 편의 첩보소설, 태풍과 매국노에서 유불란 캐릭터를 다시 등장시켰는데, 여기서의 유불란은 일제를 도와 경성에 침투한 서양과 중국의 스파이를 색출해내고, 마르세유에서 일제를 위한 첩보 활동을 펼치는 캐릭터로 변질되어 등장한다.[5]

해방 이후 김내성은 여러 편의 소설을 집필하고 라디오 드라마 작가로 활동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1946년 한국 최초의 어린이 드라마라고 할수 있는 "똘똘이의 모험"의 기획.각본을 맡아 크게 히트를 치게 되었고 영화화까지 되었다. "마인" 역시 영화화되어 개봉했다.

1947년에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번안한 소설 "진주탑"을 집필,발표했고 1949년에는 안변 요양시절에 구상했던 "청춘극장"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청춘극장"은 크게 히트를 치게 되었지만 한국 전쟁이 터져 일시 연재가 중단되기도 했다. 서울에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숨어지내던 김내성은 1951년에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청춘극장"을 5부로 완결했다. 이듬해에 '대망'이라는 가제로 구상했던 소설 "인생화보"를 연재해 1953년에 완결했다.

1956년 "실낙원의 별"을 새로 연재 시작하였지만 1957년 연재도중 뇌일혈로 사망했다. "실낙원"은 김내성의 큰딸인 김문혜가 아버지의 구상 노트를 바탕으로 후반부를 집필해 완결했다.[6]

김내성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추리문학가로서 활동한 최초의 작가이며 일제 강점기와 1950년대에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그의 소설인 "마인", "똘똘이의 모험", "청춘극장", "인생화보" 등은 여러 차례 영상화 되었을 정도였고 여러 번 새로 책을 찍어냈을 정도로 베스트셀러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김내성은 잊혀진 작가가 되었다. 1993년KBS에서 창사 20주년을 맞이하며 여명의 눈동자에 맞서듯 청춘극장을 드라마로 만들었으나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할 정도로 참혹하게 망했고 이후로 김내성 작품에 대한 영상화는 맥이 끊겨졌다.

그러다가 2009년, 김내성 탄생 100주년을 맞아서 김내성은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판타스틱 최신호에서 김내성 관련 기사를 실었고 2009년 5월 판타스틱을 발간하는 페이퍼 하우스에서 김내성의 대표작 "마인"을 출간했다. 김내성의 단편들은 에도가와 란포유메노 큐사쿠가 떠오르는 이른바 에로 그로풍의 호러 미스터리가 많다. 1994년에 [비밀의 문]이라는 추리 단편 모음집이 출판된 적이 있다.

에도가와 란포와는 일본에 있을 때부터 친교가 있었고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서로 편지를 주고 받았다. 김내성은 추리 소설을 쓰던 시절에는 “탐정 작가여, 어서어서 나오라! 그리하여 우리 조선 문단으로써 하나의 훌륭한 탐정 문단을 가지도록 하라!”라는 말도 남겼는데, 정작 그는 광복 후에는 추리 소설은 거의 쓰지도 않았다. 에도가와 란포가 전후 명맥이 끊긴 일본의 추리 문학을 부흥시키기 위해 프로듀서의 역할을 하면서 갖은 노력한 것에 비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에도가와 란포같은 인물이 없던 한국 추리 문학계는 1950년대 60년대는 깊은 침체기를 겪었다.
채만식의 <염마>와 김동인의 <수평선을 넘어서>가 1930년대 중반 “한국 근대 추리소설사의 적장자”였다면, 그 뒤를 이어 1930년대 후반에 출현한 김내성은 한국 추리소설의 영광과 치욕을 한몸에 아우른 존재였다. 박 교수가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최초이자 유일한 추리소설 전문 작가”라 평하는 김내성은 1939년작인 <마인>에 탐정 유불란(아르센 뤼팽 시리즈 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음차)을 등장시켰으나 사건 해결에 실패한 유불란의 탐정 폐업 선언으로 작품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1940년대에 내놓은 <태풍>과 <매국노>, 아동모험소설 <백가면과 황금굴> 등에 다시 등장한 유불란은 일제 당국의 대동아공영권 이념에 따라 서양 첩보기관과 대결을 펼치는 “체제 협력적 선전 선동”의 도구로 그려질 뿐이다. “김내성의 치명적인 과오는 일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야합했기 때문이 아니라 명탐정 캐릭터를 사상적 지도자로 변질시킴으로써 추리소설의 근간을 무너뜨렸다는 데에 있다.”
일제시대 때 친일 의혹도 있다.#

3. 김내성의 작품들



[1] 한국 최초의 추리소설로는 이해조의 쌍옥적이 일반적으로 거론되는데 근대 추리소설 도입 이전에 존재한 정탐소설과의 구분을 놓고 정탐소설로 볼 것이냐, 추리소설로 볼 것이냐 하는 논쟁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최초로 본격 추리소설가로 활동한 작가가 김내성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2] 양력 7월 16일.[3]평양시 락랑구역 송남리[4] 불란이라는 특이한 이름은 모리스 르블랑에서 따온 것이다.[5] 이것만 보면 친일 의심을 받을 만하나, 그 외 밝혀진 친일행적이 없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점, 일본어에 능통하면서도 한국어 창작을 고집한 점 때문에 제외되는 편.[6] 김문혜가 후반부를 집필해 완결했지만 독자들은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한 사람이 쓴 소설로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한다.[7] 1936년에 귀국해 1939년 「조선일보」에 한국 최초의 장편 추리소설 『마인』을 연재하면서 진정한 한국 추리소설의 비조(鼻祖)가 된다. 연재가 끝나고 12월에 출간된 『마인』은 6천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다. (심훈의 『상록수』 판매고가 만 부 정도인 것과 비교해도 상당한 베스트셀러라 할 수 있다.) 『마인』의 대중적인 인기를 짐작케 하는 일면이 출간 횟수인데, 자료에 따르면 1948년 ‘해왕사’, 1968년 ‘진문출판사’, 1983년 ‘삼성문화사’, 1986년 ‘영한문화사’에서 출간됐고, 2009년 김내성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판타스틱’에서 재출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