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 1912년 9월 27일 |
경상남도 진주군 (現 경상남도 진주시) | |
사망 | 1992년 1월 30일 (향년 79세) |
경기도 성남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본관 | 의성 김씨[1] |
가족 | 전월선(부인), 김원웅(아들) |
학력 | 국방대학교 (행정학 / 졸업) |
이명 | 김석(金石)·왕석(王碩) |
호 | 진양(晉陽) |
주요 경력 |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 비서관 의열단 연락원 한국광복군 제1지대 예하 분대장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
종교 | 유교(성리학) |
상훈 | 대통령표창 수훈 건국포장 수훈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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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광복회 회장 김원웅의 부친이다.2. 생애
1912년 9월 27일 경상남도 진주군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만주로 건너간 그는 1931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 비서관을 맡았었고, 1935년 중국 난징으로 이동하여 의열단에 입단해 연락원으로 활동했다고 알려진다. 이후 1941년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가담하여 선전 및 정보수집 활동을 수행하였으며, 이준식이 이끄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에 들어가 산시성, 화베이성 등지에서 지하공작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2] 그 밖에도 만주, 신양 쪽에서 조선의용대로 들어가 대적선전공작을 하거나 중경, 하남성 및 만주지방 특파공작원으로서 지하조직망 구축 및 적정 탐지 및 선전 공작 활동한 전력이 있다.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 동북지역 총책이라는 지위를 숨기고 '왕석(王石)'이라는 가명을 쓴 채 중국인 엿장수로 살다가 1940년 일제 순사에게 붙잡혀 국내로 압송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소변을 본다는 핑계를 대고 기차에서 뛰어내려 탈출했고, 건강이 회복되자 다시 임시정부에 복귀했다고 알려진다. 1942년 김구의 주선으로 19살의 나이로 광복군에서 활동하던 전월선과 결혼했다. 1945년에는 한미연합작전의 한국측 대표로 미국 정보기관인 전략정보국(OSS·CIA의 전신)과 함께 한국광복군과 미군의 국내 상륙을 위한 OSS 작전(독수리 작전)을 추진하는데 협력하였다.
8.15 광복 이후 국내로 귀환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국방부 차관을 지내던 최용덕의 특임행정보좌관 직책을 지냈고 1955년에서 1956년까지 한국독립당 최고위원직을 맡았으며, 그 후 1958년 충청남도 도지사 직무대행 서리 직책을 지냈다. 그 후 성남에서 거주하다가 1992년 1월 30일 경기도 성남시 궁내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그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고, 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92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927년에 해체된 의열단에 1935년부터 활동했다는 등 시간적으로 안 맞는 기록, 구체적인 증거 부족 등으로 광복회 대의원들이 그 행적의 진실성에 이의를 제기한 바 있다. 당시 보훈처가 광복회장 김원웅에게 유리하도록 면죄부를 준 것 아닌가,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고 봤다면 어떻게 조사했고 그 근거가 무엇인지 공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보훈처는 자필 공적서와 같은 핵심적인 증거 자료 공개를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