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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13:37:20

김교철

파일:김교철.jpg
성명 김교철(金敎哲)
생몰 1880년 7월 27일 ~ 1954년 10월 6일
출생지 경기도 남양도호부 장안면 삼동
(현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
사망지 경기도 수원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교철은 1880년 7월 27일 경기도 남양도호부 장안면 삼동(현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3일 차희식, 차병혁 등이 장안면 석포리 이장 차병한, 장제덕, 장소진 등과 함께 2천여 명의 군중을 일으켜 장안면사무소를 향해 만세시위를 전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참가하기 위해 장안면 사무소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 군중은 이미 면장 김현묵(金賢默)을 앞세우고 쌍봉산(雙峯山)에 올라가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쌍봉산으로 달려가던 중, 우정면 사무소로 가기 위하여 내려오던 시위군중과 합류하여 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그곳에 도착하여 선두에 서서 서류를 끄집어내어 불태우고 면사무소 건물을 투석으로 파괴하였다. 오후 5시경 시위군중과 함께 몽둥이를 가지고 화수리(花樹里)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공포를 쏘며 대항하는 일본 경찰과 투석전을 벌여 일본인 순사 천카와바타 토요타로(川端豊太郞)를 죽이고 주재소를 파괴·방화하다가 체포되었다.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소요·살인·방화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수원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4년 10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김교철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