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길재수(吉滓秀)·길양근(吉梁根)·길설근(吉楔根) |
본관 | 해평 길씨[2] |
출생 | 1914년 1월 13일[3] |
전라남도 장흥군 장서면 등촌리 (現 전라남도 장흥군 장평면 등촌리 90번지)[4] | |
사망 | 1986년 3월 18일[5] |
전라남도 보성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944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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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길덕동은 그의 4촌 동생이고[6], 독립유공자 길인주는 그의 6촌 재종형(再從兄), 5선 국회의원을 지낸 길전식은 6촌 재종제(再從弟)이다.[7]
2. 생애
길양수는 1914년 1월 13일 전라남도 장흥군 장서면 등촌리(현 장흥군 장평면 등촌리)에서 아버지 길영전(吉永銓, 1879. 5. 23 ~ 1949. 4. 21)과 어머니 경주 정씨 사이의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선린상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9년 12월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하여 동조시위를 펼 것을 결심하고 조회를 할 때 단상에 뛰어올라 만세를 외친 뒤 시위를 선동하다가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처분을 당했다. 1931년 6월에는 사회주의 비밀결사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에 가입한 뒤 장흥군 조직부 및 장평면 책임자로 선출되어 농민조직의 확대 강화와 일본인 지주 및 친일 지주에 대한 소작쟁의의 활동을 펴는 한편, 마을에 야학을 개설하여 조직강화에 힘썼다.
이후 1934년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당초 1934년 9월 15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받았으나, 검사 측의 공소로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형사부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545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보성군으로 이주해 은거하다가 1986년 3월 18일에 병환으로 별세했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1년 10월 1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1] 처음에는 이름의 한자를[2] 영암·장흥파 22세 근(根) 항렬. 족보명은 길양근(吉亮根).[3] 음력 1913년 12월 18일.[4] 이 지번은 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5년 당시 길두전(吉斗銓)의 소유였다. 길두전이 누군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다만 길양수의 셋째 작은아버지 길영구(吉永九)의 초명이 길두현(吉斗鉉)인 것으로 보아 길양수의 둘째 작은아버지 길영순(吉永淳, 1881. 9. 27 ~ 1949. 9. 11) 또는 다른 가까운 아버지 항렬인 사람의 초명으로 보인다. 1981년 8월 31일을 전후해 장조카 길종일(吉鍾壹, 1961. 5. 5 ~ )의 소유가 되었다가 현재는 문중 소유가 되었다. 한편, 이 지번에는 포은선생영정을 봉안한 양강영당(陽岡影堂)과 이웃사랑이라는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5]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3월 22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6] 길양수의 아버지 길영전(吉永銓, 1879. 5. 23 ~ 1949. 4. 21)은 길덕동의 아버지 길영순(吉永淳, 1881. 9. 27 ~ 1949. 9. 11)의 맏형이다.[7] 길양수와 길덕동의 조부 길성진(吉聖鎭, 초명 길성돈吉聖敦, 1857. 10. 30 ~ 1916. 9. 22)은 길인주와 길전식의 조부 길봉진(吉琫鎭, 초명 길봉택吉琫宅, 1865. 7. 8 ~ 1923. 4. 26)의 셋째 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