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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7 23:37:37

그대가 아는 조선은 죽었다. JOY를 표하도록 하지

1. 개요2. 국가설명 및 국가별 등장인물
2.1. 아시아
2.1.1. 조선2.1.2. 진
2.1.2.1. 역대 황제
2.1.2.1.1. 고황제2.1.2.1.2. 목종2.1.2.1.3. 태조2.1.2.1.4. 태종2.1.2.1.5. 정종2.1.2.1.6. 세종2.1.2.1.7. 경종2.1.2.1.8. 문종2.1.2.1.9. 성종2.1.2.1.10. 의종2.1.2.1.11. 기타인물
2.1.3. 후명2.1.4. 청2.1.5. 일본
2.1.5.1. 역대 왕
2.1.5.1.1. 메이지2.1.5.1.2. 기타인물
2.1.6. 베트남
2.2. 유럽
2.2.1. 프랑스2.2.2. 러시아

1. 개요

리첼렌이 '유카리'[1]명의로 참치 인터넷 어장에서 연재한 AA작품이다. 2018년 5월 2일부터 2018년 6월 8일까지 총 108화를 연재하여 완결했다.

조선이 경신대기근을 못버티고 멸망한 후 이란 나라로 새로이 건국되는 것을 시작으로 다같이 미쳐날뛰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https://bbs.tunaground.net/trace.php/anchor/1532316616/30/32

2. 국가설명 및 국가별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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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아시아

2.1.1. 조선

관련AA는 사기사와 후미카.[2]

경신대기근이 일어나는 와중에 현종이 이에 대처하기는 커녕 사대부 조지기만하고 있고, 여기에 당시에 송자라 불릴 정도로 명망이 높던 송시열을 제대로된 증거없이 제거하려하자 결국 사대부들이 폭발, 신료들의 압박에 송시열에게 양위하면서 전주 이씨의 조선이 끝나게 된다.

이후 남은 왕족들은 이전에 개성 왕씨에게 그랬듯 사고로 수장시켜버린다.[3]

2.1.2.

이 작품의 주인공 국가. 경신대기근으로 전주 이씨가 몰락하고 송시열이 선양을 받으면서 세워진 국가.

청과 싸워 이기고, 부활한 명을 상대로 남북조 시대를 이어가다가 기어이 명을 굴복시키고 선양받아 천명을 거머쥐었으며, 이후 강남 호족들을 완전히 굴복시킴으로서 완전하게 완성된 환벽한 중화제국.

대항해시대라라는 세계사의 흐름과, 요순시대를 능가하는 성세라는 국내의 번영이 합쳐져 전 세계에 영향력이 뻗어나가, 이후 세계 질서를 지탱하는 초강대국이 된다.

특이한 점으로는 20세기 초 까지 절대군주제를 유지했는데, 그 이유는 역대 황제들이 큰 실책 없이 유연한 사고방식과 체제를 유지한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진 세종으로 세종의 치세는 부국강병, 문화 중흥 및 상업의 발달, 황화 댐과 황립극장으로 대표되는 산업혁명 등 천하무빈(天下無貧)의 치세를 달성하여 살아있는 상제로 추앙받았고, 결국 기근과 역병을 과로사 끝에 막아낸 후 황실의 인기와 권위가 하늘을 찔렀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후대 황제들은 큰 실책 없이 선정을 이어갔고 결국 성종때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황재가 될 수 없었던 태자, 성리학적 사상으로 애민정신이 충만한 성종, 유능하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지닌 이홍장, 최익현, 손문 삼재상 등 여러가지 요건이 맞물려 입헌군주제로 개혁에 성공한다.

천조질서를 기반으로한 일종의 팩션을 구축하고 있는데, 어장 내에선 속칭 '조공웰스'라 불리며 황제인 팩션리더 대진, 좌승상인 제 1번국 일본, 우승상인 제 2번국 베트남을 기반으로 당상관들인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유구국, 버마 등 오세아니아와 동북아, 동남아 소국들을 각각 일본과 베트남의 휘하에 둔다.

이들의 특징은 상하관계가 확실하지만 상호 호혜적이고 구성국간 단합도가 높은것이 특징으로 대진이 번국들과 조공무역을 이어가고[4]대진이 일본과 베트남의 인도 전후복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했으며, 베트남이 의리를 지켜 일본을 도와 대 프랑스 전쟁과 인도 군정에 참가하거나 일본이 호주, 뉴질랜드 소국들을 챙겨주고 관동대지진때 역으로 소국들이 일본을 도와 재난복구에 힘쓰는 등 상국, 번국 가리지 않고 서로 도움을 주고 우호적인 분위기로 상술했듯 다같이 한 조정으로 비유되곤 한다. 그래도 보통 초강대국인 대진이 휘하 번국들을 챙겨주는 편.[5]
2.1.2.1. 역대 황제
등장인물의 이 박스 안의 내용은 '이 세계의 21세기 즈음에 '위키'에 요약문으로 작성된 내용'이라는 느낌으로 어장주가 생과 평가를 정리한것이다.
2.1.2.1.1. 고황제
AA는 멀린. 본명은 송시열.

"왕(나)의 이야기를 하자."
- 경신대기근에 의한 사회혼란상에 전조가 대처하지 못하면서 천심이 떠나자 전조를 멸하고 왕위에 오른 건국시조.
- 전조의 무관들을 잘 다독이고 만주의 군벌세력들과의 의견차를 잘 조율해 반청복명을 승전으로 이끔. 다만 본인에게 군재는 없었던지 직접 친정에 나서는 모습은 보이지 않음.
- 여러모로 역사가 낳은 효웅인 천출 출신의 심양공과의 관계가 자주 조명되는 편.
- 다만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대기근 이후의 혼란을 수습한 공로와는 별개로 전조와의 차이점이 별반 보이지 않는 탓에 진의 개국공신으로서보다는 조선의 명신으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함.
2.1.2.1.2. 목종
AA는 아챠코. 본명은 송궁.

"이 나라 진은 유자들의 나라가 아니다."
-반청복명 전쟁 당시 이미 여든을 바라보던 송시열을 대신하여 반청복명 전쟁기에 무신들을 이끈 강한 군주.
-당시만해도 한나라의 군주라기보다는 서인들의 우두머리에 가깝던 진왕의 처지를 적극적으로 벗어나려고 시도함. 때문에 잦은 암살시도를 비롯하여 적들 또한 많았음.
-이때문인지 사서에서도 부정적인 면이 많이 그려져있고, 대중적으로 열렬한 사랑을 받고있는 심양공 가문의 반란을 진압하고 가문을 멸한 점 때문에 냉혹한 철권군주로서 대중적으로 평가받으나, 실상 왕권은 그렇게 강한편은 아니었음.
-여러모로 조선의 색채에서 벗어나 진나라 특유의 색채를 만들어냈던, 진이라는 궁궐을 세울 설계도를 그려낸 군주.
-다만 아버지나 아들에 비하여 단명한 고로 학계에서는 일벌이기만 좋아하고 정작 일을 수습할 생각은 안했던 모험주의자로 평가받고있음.
2.1.2.1.3. 태조
AA는 마리. 본명은 송현.
-내치면 내치, 외치면 외치, 군재면 군재. 모든면에서 대중들과 학계 모두에게서 고평가를 받는 유일무이한 삼한계 군주. 동시에, 진의 실질적인 건국시조.
-명재상 임도익을 내세워 삼한땅이 대기근의 여파에서 벗어나 활발한 상업으로 부강해지게 하였으며, 아버지가 무책임하게 떠넘긴 개혁 초안들을 넘겨받아 훌륭하게 완성시켜 송진의 치세를 안정화시킴.
-아직까지 진 내에 남아있던 전조의 잔당들을 숙청하여 정통성을 바로세우고, 아버지대의 숭무정책을 이어받아 당대 동아시아 제일의 군대를 육성하여 끄끝내 명을 쓰러트리고 삼한계 국가 최초로 천명을 손에 거머쥠.
-또한 현명하게도 단번에 명을 무너뜨리지 않고 잠시 강남땅에 들어선 순을 멸하고 명을 복원시키면서, 선양을 통한 천명의 완성에 밑바탕을 준비함.
-학계에게는 물론이고 대중들에게도 고평가 받는 명군. 뭐든지 척척 해내는 산신령적인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 고증에서 그렇게까지 벗어나지도 않는다.
2.1.2.1.4. 태종
AA는 에이라 일마타르 유틸라이넨. 본명은 송백
-명으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중화제국으로서의 진을 완성한 황제. 다만 아버지가 모두 이룩한 일을 그대로 넘겨받은 것 뿐이라 역대 통일제국의 시조들 중 저평가받는 감이 있음. 물론 사마염보다는 고평가.
-황제가 되어서 무엇을 했다, 보다는 이 무렵 자금성을 뜨겁게 달구었던 진의 개국공신 세력과 친위세력간 충돌로 인한 정쟁 덕분에 더 유명하다. 특히 황태자궁에 닭피로 저주를 건 미치광이 황자의 이야기는 화룡점정.
-본국보다는 일본땅에 여칠지를 보낸것으로 일본에서 더 유명한 군주. 때문에 일본천자라는 본인에게 그다지 달갑지 않을 별명도 있음.
-학계의 평가는 그럭저럭 주어진 상황 내에서 평타 정도는 친 범군. 대중적으로는 퓨전사극용 아침드라마형 무능한 가장 정도.
2.1.2.1.5. 정종
AA는 유클리우드 헬사이즈. 본명은 송이우.
-대진국 역사상 몇안되는 똘기넘치는 황제. 그러나 일선만은 넘기지 않았기에 폭군으로 평가되는 경우는 드물며, 치세로서는 범군이요 인간상은 광인으로 평가받는다.
-역시 치세 중 최대의 업적을 꼽아보자면 공인들을 조정에 불러모아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개발이 가능해진것과 강철의 대량생산을 명한것. 이것만으로 많은 공돌이들에게 애증을 몰아 받고있다.
-고대 로마도 아니고 대신들과 즐기기 위하여 근세에 콜로세움을 세운 독보적인 또라이. 덕분에 당대 무협지들의 세계관이 대폭 확대되었지만, 적극적인 살생을 명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이것이 용서받기는 어렵다.
-창작물에 등장하면 반드시 최종보스다. 주로 무협지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주인공을 곤경에 빠트려 황명으로 개최한 무술대회에 강제로 끌어오는 역으로 자주 등장한다. 혹은 아예 본인이 절대무공을 휘두르는 케이스도 있다.
-태자 시절에 황태자궁에 닭피를 뿌린다는 전례가 없는 사태와 폐모를 눈뜨고 봐야만했다는 점 때문에 동정을 얻어 주인공에게 심적으로 기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만 이 경우 높은 확률로 주인공은 사파출신.
-학계에서의 평가는 신권과 황권의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린 점에서는 박한 평가를 주지만, 공반 세력의 대두 덕분에 어느정도 상쇄되는편. 다만 그 어느 누구도 또라이라는건 부정안한다.
2.1.2.1.6. 세종
AA는 사죠 마나카. 본명은 송애가.
-천하무빈(天下無貧). 이 4글자로 설명가능하다. 문경지치도, 정관지치도, 개원지치조차 여기까지 이른적은 없다. 천지가 열리고 처음으로 하늘 아래 가난한자가 없었다라고 하는 성세.
-그 요임금과 순임금의 요순지절을 과거로 돌려버린 장본인. 오죽하면 진 세종의 치세를 기점으로 유학이 지향하고자하는 가장 모범적인 치세가 뒤바뀌었다고 표현할 정도.
-황하 치수를 완성하여 우임금을 발 아래에 두었으며 자신의 목숨을 바쳐 기근과 역병을 막아냈고, 아버지대에 이미 상당한 성장을 이룬 진을 마침내 산업혁명으로 이끌었다.
-흔히 살아있는 상제로서 자주 표현된다. 진의 창작물에서도 다른 임금들은 쉽게 다루어도 진 세종만은 감히 다루지 못한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커녕 주인공의 후원자, 최종보스로도 등장하지 못한다. 그냥 신성불가침의 영역.
-예외적으로 일본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편. 물론 주 역할은 최종보스. 일본에서 주자에 버금가는 현인으로 추앙받는 아큐를 오체투지 시킨 전적 때문. 다만 악인으로 등장하기보다는 그냥 크툴루 신화의 외신에 가깝게 묘사된다.
-학계에서의 평가는 흔히 주화입마의 본고장. 치세를 연구하다가 주화입마에 빠져들면 다른 제왕들의 치세를 객관적으로 평가할수없게 되기 때문이라고.
2.1.2.1.7. 경종
AA는 사쿠라바 하루미. 본명은 송청.
-세기의 로맨티스트 황제. 여성향 로맨스 소설의 영원한 워너비. 그를 모티브로 하지 않은 여성향 남주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나랏돈을 펑펑 쓴것으로 유명하다면 이쪽은 반대로 짠돌이 황제로 유명하다. 선천적으로 장삿꾼 기질이 있었다는것이 학계의 공통된 평가.
-고작 농가 출신의 일개 궁녀에 지나지 않았던 총희를 위하여 모든것을 바친것으로 유명한 황제. 다만 그 결과 나라가 망한 양귀비와는 다르게 총애를 받은 총희-훗날의 황후-또한 총명한 여성이었기에 나라가 흔들리지는 않았다.
-여러모로 학계에서는 아버지와 비교되는 일이 많다. 물론 해상무역을 촉진시키고 황실의 이름 아래 해상보험을 만드는 등 업적들이 없었던것은 아니고 아버지 대에 물려받은 장강과 요하의 치수를 완성했지만 역시 아버지의 빛에 가리는것.
-그러나 민간에서는 신성불가침의 아버지보다 훨씬 자유롭게, 그리고 자주 등장하는 편. 이미 말했다싶이 여성향 로맨스 소설의 황제다. 남주가 높으신 분이라면 뺴박 이 사람 카피본이다.
2.1.2.1.8. 문종
AA는 아나스타샤(Fate 시리즈). 본명은 송아.
-통칭 십덕황제. 열가지 덕을 갖추었다고 전해진다. 그 덕은 물론 좋은 의미에서의 덕이 아니라 그 덕이 맞다. 철덕, 역덕, 삼국지덕, 식물덕, 선덕, 여행덕 등 십덕을 두루 갖추셨다고한다.
-환경주의자들의 영원한 워너비. 그가 생전에 세운 진시황릉 국립공원과 파촉 밀림(사실 이건 그의 사후 여기까지 커진거지만)은 환경주의자들의 열렬한 사모와 제삿밥을 두둑히 얻어먹고 있다. 다만, 파촉 주민들은 싫어한다. 그가 만든 밀림 때문에 호환으로 물려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
-그의 아들 진 성종의 팬들에게 매우 미움받기로 유명하다. 그가 일찌감치 성종에게 일을 모두 떠넘기는 바람에 성종은 일평생 일만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고 그가 놀기만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한데, 진 정종 말과 재위 초기 진을 다스린건 틀림없이 진 문종이었다. 태자가 장성하고 나자마자 일을 때려치웠을 뿐.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만국박람회를 개최하여 진의 위상을 잘 모르고있던 해외에까지 진의 위상을 보여주고 진시황릉을 발견하여 2천년만에 제사를 올리고 받들어 모신것이 있다. 이것만 보면 굉장한 업적으로보이나, 실상 이 업적 또한 그의 아들 진 성종의 업적이라는것이 학계의 총평.
-학계의 평가는 인축무해한 범군. 환경주의자들에게는 현인신, 일반 대중들에게는 십덕후. 파촉사람들에게는 웬수.
2.1.2.1.9. 성종
AA는 티어밀리스 그레 포르트제. 본명은 송타애.
-태종이 진을 중화제국으로 만들었고 세종이 중화 그 자체로 만들었다면 진 성종은 진을 근대적 국가로 완성시킨 명군. 다만, 임팩트가 강한 두 황제 사이에 끼어있다보니 역덕후들을 제외하면 그의 역할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는 이들은 굉장히 드물다. 나라가 평안하면 나랏님 이름도 모른다의 대표적인 경우.
-통칭 일평생 일만하다가 죽은 황제.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아버지의 업무를 곁에서 도왔고, 장성하여서는 땡땡이치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업무를 보았으며 늙어서조차 정신이 병들어있던 아들을 대신하여 업무를 봐야했다. 진서에서 아버지의 업무를 돕기 시작한 일자부터 세면 장장 76년 326일간을 일만하다가 죽었다.
-시조 송시열 이후 150년만에 태어난 꼬장꼬장한 유자. 한번 틀리다 생각한건 반드시 바로 고쳐야 직성이 풀렸으며 한번 옳다고 생각한 일은 마지막까지 밀어붙였다. 덕분에 그의 치세에는 백성들이 나랏님 이름도 모르고 살았다고 기록되어있다.
-인도 대학살에서 희생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태산을 오른 황제로서 본국보다도 인도에서 널리 이름이 알려져있다. 유사 이래로 최초로 진혼식을 위하여 태산에 오른 황제이기 때문. 덕분에 인도에서는 아직도 그를 소재로한 영화나 드라마들이 나올정도로 인기가 높다.
-학계의 평가는 적절한 시대에 태어난 적절한 명군. 민간에서는 아, 그 이홍장, 최익현, 손문 어르신들을 등용하신 분! 정도의 인식.
2.1.2.1.10. 의종
AA는 IA. 본명은 송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 그리고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에게 가장 많은 제삿밥을 얻어먹은 황제라는 역설적인 타이틀을 가진 민중들의 영원한 아군.
-그는 심각한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로, 일상생활에 심각한 지장이 있을 정도로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수없었으며 다른 것에는 일체의 관심도 없이 일평생 그림만 그리면서 살았다. 그러나 일평생 집무를 돌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아무도 없다. 그의 아버지 진 성종이 그가 아무것도 해도 진이 유지 될수있도록 안배해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민중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굉장히 직설적이고 또한 암울하다. 그는 낭만과 로망으로 가득했던 그 시대에 사람들이 외면하여 보지 않았던 처참한 현실을 어떠한 미화도 없이 액면 그대로 들이대보였고, 이러한 그의 그림들은 당대의 진 조정에서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끝없이 노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암울한 작품세계와는 대비되게도, 그 자신은 누구보다도 사람들을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민중예술에 뛰어든 계기도 이러한 사람에 대한 애정 때문으로, 이러한 황제를 지키기 위하여 온나라에서 무림고수들이 구름같이 몰려들기도 했다. 때문에 인도 대학살의 소식을 들었을때는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다하며,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작품세계는 더더욱 암울해지게된다.
-민간인을 강간하려한 황태자 능원군을 진성의 시민들 앞에서 볼기짝을 때려 죽일 뻔한 사건은 아직도 사진으로 남아있다. 진성황실박물관에 갈일이 생긴다면 한번 구경하고 올 것.
-학계의 평가는 공산주의자 아스퍼거 증후군 황제. 민간에서의 평가는 현대판 양산박의 주인어르신 정도.
2.1.2.1.11. 기타인물
심양후 여칠지: AA는 야스리 나나미
-중화제국으로서의 대진국의 개국공신. 후일 그의 자손들이 진 세종 치세에 벌인 역모로 그의 가문이 풍비박산 나는 와중에도 그의 묘비만은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으며 도리어 후일 릉(陵)으로 격상시켜 왕이나 다름없이 섬겼다.
-결혼도 하지 않고 오로지 나랏일만을 위하여 모든것을 바친 충신. 명재상 임도익이 내치를 이끌었다면 그는 일평생 무로서 진나라의 국방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냈다.
-학계에서는 흔히 여칠지의 인생사만 알고있어도 진의 개국초기를 모두 알수있다고 평가한다. 진의 초창기를 다루면서 그를 주역 중 한사람으로 등장시키지 않는 작품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이하게도 고향인 만주도 아니고 일본 민간에서는 상제로 모셔지고 있다. 통칭 팔백만신살자. 누군가는 사실 몽고혈통이라서 8백만신을 몰살하고 상제 자리를 꿰찬거라고 평가하기도.
-진나라에서와 일본의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사람. 진나라에서는 당연히 오랜세월 진나라를 위하여 봉사해온 충신 중 충신으로서 높이 평가하지만 일본에서는 나라를 빼앗은 침략자 취급.
-오죽하면 할로윈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그를 형상화한 오니가면을 쓰고 나올 정도.

천진백 박애나: AA는 엘레나 블라바츠키
-만중일재(萬中一材). 그녀를 처음 북경으로 불러온 정종 송이우가 "천명을 불러모으면 백명 중 하나가 10명은 될것이고, 만명을 모으면 천명 중 하나가 10명은 될것이다"라고 한것에서 유래되었다. 즉, 그 만명중에서도 오직 한명.
-흔히 동양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불리운다. 그녀가 설계한것만으로 천진의 수공업 제철소와 황하댐, 북경 황립극장이 있으며 그 이외에 그녀가 주도하여 개발한 것 또한 발화기(라이터), 철선, 철근콘크리트 등이 있다.
-정종 송이우의 괴짜성을 증명하는 사례 중 하나. 아직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활발하지 않던 시대에 오직 실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뜸 정 2품에 달하는 벼슬을 내려 총책임을 맡긴건 그 뿐이다.
-공돌이들의 영원한 워너비이자 현인신. 천진시 광장에는 높이만 30m에 달하는 그녀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시 외곽에는 그녀의 혼을 달래는 사당이 세워져 있다. 단순 크기만으로는 관운상제에는 미치지 못해도 어지간한 급은 잡신으로 깔수있을정도.
-이렇게 여러모로 창작물에서도 학계에서도 이야기거리가 많은 그녀임에도 말년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않다. 야사에서는 진 세종에게 말실수를 하여 낙향했다고하기도.
느그애미 쌍년 씨발놈아

무의공 신치강
-본래 명나라 태생이었으나 명나라를 등지고 진나라를 택한 희대의 명장. 행적은 오삼계와 비슷해 보일지 모르나 그 인품과 재능은 오삼계와 비할바가 못된다.
-삼한계 어머니를 뒀다는 이유로 진급이 계속하여 누락되고 노골적으로 소외당하자 앙심을 품어 심양후 여칠지에게 남몰래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하여 여칠지가 대명정벌을 진 태조에게 청하게 한 장본인.
-만일 그가 없었다면 진 태조 또한 입맛을 다실 뿐 천명을 빼앗는데까지 도달하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항복한 항장으로서 진나라군에 종사하였으며 그의 재능과 인품을 높이산 여칠지에 의하여 일개군을 이끌고 명나라 의용군을 격파, 진나라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그가 보여준 선형진은 두고두고 후세의 군략가들이 칭찬을 아끼지않는 선형진의 정석.
-항장으로서는 드물게도 처신을 능숙히하여 편안한 말년을 보내고 천수를 누렸다. 그의 후손들은 그 이후에도 진나라의 명가로서 오늘날까지도 그 명맥이 이어져오고 있다.
-창작물에서는 주연으로서 등장하기 보다는 조연으로서 자주 등장한다. 얼마전 그를 주인공으로한 일본 만화가 인기를 끌어 화재가 된 바 있다.

상국 모이제: AA는 제임스 모리어티(Fate 시리즈)
-조선에게 정철이 있다면 진나라에게는 모이제가 있다고 흔히 일컬어지는 수험생들의 끝판왕. 오늘도 그의 사당에는 수능대박을 꿈꾸는 수험생들의 한과 애원이 가득하다.
-아들을 잘못둔 탓에 묘호도 공도 명성도 모두 잃은 케이스. 오늘날 진나라 땅에서는 그를 기리는 사당 하나 찾아볼수없다. 도리어 도쿄 외곽에 하나 남아있는 정도.
-진에서는 아들농사를 잘못지어 패가망신한 작자 정도로 굉장히 낮게 평가되고 있다. 본인이 생전에 아무리 잘났어도 아들농사를 잘못지어 나라와 황실에 폐를 끼쳤으니 죽어 마땅하다는 평가.
-일본에서는 여러모로 애증이 서려있는 인물. 여칠지가 침략자라면 그는 정복자로, 일본에 유학을 도입하려 시도하고 행정체제를 개혁한것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나 역적 도쿠가와를 비호한것 때문에 증오도 많이 받고있다.
-진나라에서는 창작물은 물론이오 학계에서도 그다지 다루지 않는 반면 일본에서는 정말로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한다. 아큐의 본격적인 활동시기와 겹치기 때문.

상국 모조묘: AA는 히가시혼간 사나에
-당신은 말하는 망탁조의!
-그의 업적을 말하자면 끝이 없다. 기근으로 피폐해진 일본 민초들을 수탈하여 그야말로 인세에 지옥도를 만들었으며 저질화폐를 찍어내 남중국해 일대에 경제공황을 불러일으켰고 이 나비효과로 정씨왕국은 적자를 메우려다가 아편장사에 손을 대어 멸망당하였으며 그 여파로 네덜란드까지 멸망당했다. 도쿠가와 조 일본까지 합하면 그 혼자서 나라 3개를 해먹은 격. 망탁조의조차 그를 보고서는 혀를 내두룰것이다.
-남색을 밝혀 천성이 음탕하였고 탐욕스러웠으며 못먹는것이 없었고 권력지향적이었고 잔혹하기 그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멍청했고 무능했다. 아무리 역적이라지만 여기까지 대놓고 까이는건 드물다. 남조의 롸끈한 폭군들이 부럽지않다.
-일본측 야사에 따르자면 백성들이 굶주려 먹을것이 없어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잡아먹는 참상이 벌어진다고하자 자신이 여지껏 유일하게 못먹어본것이 사람고기인데 어찌 구할수없겠느냐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단순 야사라고 하기에는 전적이 워낙 롸끈해서 대부분 정설로 판단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진정한 제육천마왕 취급. 노부나가도 이 인간 앞에서는 울고간다. 진나라에서도 사람대접해주기 싫어하는 극악무도한 역적 그 자체.

섭정공 간동견: AA는 마토 조켄
-당신은 말하는 개새끼!
-여씨 일족이 권력투쟁하느라 진나라를 뒤흔들었다면 이 인간은 재물욕을 채우느라 진나라를 망가뜨렸다. 진 세종이 아니었다면 진은 쇠락의 길을 걸었을것이다.
-친인척 중심의 인사임명에서부터 황명날조에 매관매직. 과연 이쯤되니까 묘조묘 놈과 놀아난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숨만은 건질수있었던것은 전적으로 진 세종이 모질지 못했던탓.
-전성기에는 왕이나 다름없이 의복을 해입고 왕궁이나 다름없는 저택에서 식객들을 시켜 문무백관의 옷을 입혀 왕이라도 된 마냥 행사했다고 한다. 정말 용케도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애초에 국정을 보지않고 그 위세를 누리기만하다보니 제대로된 아군이 없었다. 결국 진 세종이 장성하자마자 실각하여 유폐당했다.
-유일한 업적이 있다면 공반들을 보호하여 훗날의 대공사가 원활히 수행될수있도록한것. 그러나 이것도 자신의 사익을 추구한 결과라 업적이라고 불러주기도 아깝다.
-창작물에서도 학계에서도 평가는 한입을 모아 똑같다. 역적 노무 색휘.

광둥왕(?) 구뭐시기: AA는 구다코
-진 세종의 강남 정벌에서 딱 한줄 등장한다. "광둥왕을 자칭하는 호족 구씨가 수신을 병폐한채 황상의 심기를 거슬러 구씨 씨족을 멸하였다."
-애초에 진나라는 명나라가 망하고서 오등작을 책봉한 전적이 없다. 심양후니 뭐니 하는것들도 다 고향땅을 따온 묘호지 본인들의 생전에 가지고 있던 영지가 아니다. 그런데 왠 듣보잡 호족이 광둥왕을 자칭하고 있었다.
-강남땅이 진세종기까지만해도 얼마나 따로 놀고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 덕분에 진서에 딱 한줄 등장함에도 불과하고 그 멍청함이 깊은 인상을 남겨 두고두고 회자된다.
-분명 광둥왕을 자처할 정도면 대단한 세력을 누리던 호족일것이 분명한데도 놀라울 정도로 그 사료를 찾아볼수가 없다. 구씨 씨족이 멸하고 나라에서 회수해간 재화들을 제외한 나머지 재산들을 그 하인들이 모조리 훔쳐 달아났기 때문.
-덕분에 사서에서 딱 한줄 등장함에도 관련된 야사가 무진장하다. 그 멍청함이 놀라울 뿐 아니라 상상할 여지도 많기 때문.

공헌공 조철남: AA는 스탈린
-박애나가 진나라의 과학혁명을 시작했다면 조철남은 진나라의 산업혁명을 이끈 인재. 쉰이 조금 안되어 정면에서 물러난 박애나와는 다르게 여든이 넘는 나이까지 진나라를 위하여 헌신했다
-그의 업적을 요약하는건 불가능하다. 진나라의 산업화 과정에서 어디서든 한번 이상은 이름이 언급되는 인물. 오죽하면 그의 이름의 철자가 밝은 철이 아니라 쇠철이라는 농담이 있다.
-이토록 산업혁명과 분리해서 이야기하는것이 불가능한 인재 중의 인재였음에도, 공학도들 사이에서 그의 명성은 그다지 드높지 않다. 여성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던 박애나와는 달리 그는 어디까지나 후방에서 업무를 보던 관료였기 때문.
-이렇다할 내세울만한 위인이 없는 연해주에서 열심히 밀어주고 있는 연해주 출신 위인. 우스갯소리로 연해주는 조철남 왕국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학계에서의 평가는 진나라의 산업혁명을 선두지휘한 위대한 산업부 장관. 민간에서의 평가는 아, 그 연해주 출신 곰돌이 아저씨!

효정황후 정태후: AA는 카사기 시즈카
-수많은 딸가진 집 아버지들의 웬수이자 영원한 진나라 처녀들의 워너비. 오늘도 황족과의 운명같은 만남을 꿈꾸는 아가씨들의 열망 속에 아버지들의 한숨소리는 깊어져간다.
-강소성 출신 가난한 농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끝내는 만인지상의 황제에게 간택받아 황후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여성향 소설에서 그녀보다 다루기 좋은 여주인공 모델이 없다.
-보통 이런 경우 장본인의 권력욕이나 우행으로 결말이 더럽혀지는 경우가 많은 반면, 정태후는 무지렁이 농가의 여식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과하고 끝까지 현명하고 똑부러지는 정처로서의 면모를 보이며 죽는 날까지 자식들의 품안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여러모로 여성향 소설가들의 연구대상 그자체.
-경종에게 사업가 기질이 있었다면 정태후에게는 살림꾼의 기질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다시말해 당대 조정의 세무감찰을 도맡아했다는 이야기. 덕분에 야사에서 등장하는 모습과 정사에서 등장하는 모습이 굉장히 상이한 황후. 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관료들의 원망을 샀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학계에서의 평가는 진 경종 시기의 2인자. 민간에서의 평가는 여성향 주인공의 표본.

승상 이홍장: AA는 아이작 네테로
승상 최익현: AA는 안한수
-그들의 후임인 손문과는 다르게 이 둘은 함께 싸잡아서 평가받는 경우가 잦다. 그만큼 이 두사람이 진나라 조정을 이끌은 세월이 길 뿐 아니라, 두사람이 절친한 맹우였기 때문이다.
-흔히 이홍장이 폭주하려고하는 진이라고하는 기관차가 부숴지지 않도록 적절하게 유지보수했다면, 최익현은 기관차가 선로에서 탈주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이홍장이 온건한 개혁으로 진나라에게 새활력을 불어넣었다면, 최익현은 그런 진나라가 올바른 길을 갈수있도록 버팀목이 되어주었다는것.
-두사람 모두 진 문종 시기에 조정에 출사한 동문이며, 진 성종 시기에 함께 중용받았고, 또 진 성종 말기에 함께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렇듯 공통점이 많다보니 생전 사석에서는 서로 말을 놓고서 편히 웃으며 술잔을 주고받았다 전해진다. 이 두사람의 우정을 소재로 진 의종이 남긴 여러장의 수채화가 아직도 황립박물관에 남아있다.
-진 의종이 남긴 그림 덕분에 그들을 대하는 각 황제들의 태도도 알수있다. 진 문종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고, 진 성종은 애환어린 표정으로 그들에게 신뢰를 보내고 있으며, 진 의종 스스로 그린 상상화에서 진 의종은 두사람을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 3대에 걸쳐 진나라를 지탱한 명신들이자 불굴의 충신들.
-학계에서는 흔히 진나라의 관포지교. 민간에서는 엄하고 믿음직한 어르신들.

우주공 유가인: AA는 아무로 레이
-인류 최초로 우주유영을 한 우주비행사. 흔히 "지구는 푸른 베일에 감싸인 신부와도 같다."라는 말로 널리 알려져있다.
-대진국 강원도 춘천시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기술학교에서 금속제련 과목을 졸업하여 과거시험에 응시, 합격함으로서 공반이 되었고, 그 뒤 항공기 정비에 관심을 보이다 비행사 자격증을 획득하여 공군에 입대하였다.
-이후 공군 조종사로서 복무 중 당시 그를 눈여겨본 우주개발국의 소 국장에게 발탁되어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로서 훈련을 받게 된다. 발사 후 그는 사실상 전사 취급되어 2계급 특진해 공군 정령(正領=대령)의 지위에 올랐고, 이후 우주유영에 성공한후 지구에 복귀하여 해당계급을 그대로 인정받게 되었다.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라는 명성 때문에 진나라 조정은 이후 그를 최대한 사고가 날지도 모르는 전투비행사에서 멀리 떨어지도록 만들었으나, 그는 끄끝내 전투비행사 자격증을 회복하기 위한 훈련비행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34세. 사후 그에게는 우주공이라는 유일무이한 묘호가 부여되었다.

활사공 하도휴
-진나라 제일의 멋쟁이 천재 금수저 사업가 겸 불세출의 바람둥이. 가장 진나라다웠던 부자이자 가장 화려했던 시절의 상징.
-대진국의 도읍인 진성에서 당상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여러모로 부족함 하나없는 환경 속에서 그는 자신이 원하던 무엇이던 할수있는 활동의 자유를 얻었고, 그는 자신의 이러한 활동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게 된다.
-그는 1854년 그의 첫작품이자 역사상 최초의 영화인 '열차의 도착'을 촬영하였고, 이후 1861년 세계 최초의 극영화인 '달세계 여행'을 촬영했다. 이후 그는 다시 1882년 세계 최초의 유성영화였던 '애상가희(愛想歌姬)'를 촬영했고, 1886년 '신 수호지'로 당대에는 최초로 천만관객을 흥행시키며 자신의 재능을 뽐냈다.
-이후 신 수호지를 마지막으로 촬영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자신의 자산과 인맥, 그리고 명성을 이용하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제 2의 문화수도로 재부흥하던 함양땅에 기거하며 그곳을 진나라 영화산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그는 영화 감독이 아닌 사업가이자 영화계의 대부로서의 모습을 주로 보이게 된다.
-생전 무수한 추문을 남기고 그의 사생아로 의심되는 이들만 소대가 넘는다는 야사를 남긴 호색가였으나, 마지막까지 혼인하지는 않았다. 혹자는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천재답다고 평하기도.
-오늘날 함양 시가지 중심에는 그의 사당이 세워져있다. 제후의 사당이나 다름없이 꾸며져 있기에 함양을 들렸다면 한번쯤 들려보는것도 나쁘지 않을것.

예원공 안채나: AA는 아베 나나
-가장 화려했던 시절의 가장 화려히 빛나던 영원한 별. 그리고 가장 낮은곳에서 출발하여 가장 높은 곳에서 인생을 마무리한 인생역전의 상징.
-흑룍강성 치치하얼에서 여진족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뒷골목을 전전하며 하루하루 빌어먹을 음식을 구걸하던 걸인이었고, 그들은 그녀가 9살이 되던 무렵 묘상관이라는 이름의 술집에 그녀를 내다팔았다.
-술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끼니를 때우던 그녀는 12살 무렵 치치하얼의 국립극장 앞에 붙어있던 당대 최고의 경극 여배우 고원풍의 포스터를 보고서 가희의 꿈을 꾸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을 잔혹했고, 그녀는 27살까지도 극장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홀로 노래와 안무를 연습하며 당장 하루하루의 끼니를 때워야했다.
-서른이 가까워질때까지 기회 한번 얻지 못하고 서서히 자신의 꿈을 포기하던 그녀에게 길을 제시한것은 당시 예술부(후일 국립문화예술진흥사업) 소속의 예인 관리담당원 무준보와의 만남이었다. 우연히 들어간 술집에서 그녀의 재능을 엿본 그는 그녀에게 예인선발회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했고, 그녀는 그곳에서 당당히 장원으로 국가예인으로 인정받게된다.
-이후 그녀는 황립극단 제일의 여성 가희이자 별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도 77세까지 장수한 그녀는 사후 자신의 모든 재산을 과거의 자신과 같은 불우한 예인지망생들을 돕기위한 자선재단을 설립하는데 사용하고서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2.1.3. 후명

2.1.4.

2.1.5. 일본


대진을 이은 제2의 주인공이자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 ???

막부의 쇄국정책 때문에 진과 청, 후명이 천명대전을 하는 와중에 아무런 존재감을 보이지 못한다.

그러다 진 태조때 진의 협박과 해상봉쇄에 굴복하여 진에 입조하게 되고, 영국의 개수작과 시미즈의 반란으로 내전이 일어나자 막부는 대진에 헬프콜을 친다. 이에 여칠지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한 태종은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상국으로 여칠지를 임명하여 도쿠가와 막부에 유교정 이식을 시도하나 토속신앙에 밀려 번번히 실패한다. 와중에 인간 트로피인 덴노를 전전조 폐왕쯤으로 오해하고 덴노에게 도쿠가와 막부에 선양할것을 권하고, 덴노도 기꺼이 받아들여 시고쿠로 향한다.[6]

태종 사후 여칠지는 귀국하고, 모이제가 다시 상국으로 부임한다. 그 또한 일본에 성리학을 주입하고자 시도하고 어느정도 성과는 거두나, 재앙신 여칠지 VS 선신 도쿠가와 이예야스라는 환장할 신화가 탄생하는것으로 실패, 결국 사망하고 [7]아들 모조묘가 뒤를 잇는다.

그러나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성정으로 진의 정치적 혼란기와 섭정의 수렴청정이라는 상황을 이용, 섭정에게 뇌물을 바쳐 종신상국의 지위를 얻고 백성들을 착취하기 시작한다. 섭정에 빌붙던 그는 세종의 친정 이후 급변하는 상황파악에 실패하여[8]결국 모조묘는 처형당하고 정동행성은 폐지된다.

정동행성 폐지 이후로도 텐메이 대기근과 막부의 방치에 난세가 수습되지 못하고, 결국 다시 덴노가 유생과 잇키의 반란에 힘입어 일본의 통치자가 된다.[9]

일본 전역의 혼란에 진의 책임이 컸던 탓에[10] 이례적으로 진에서 먼저 사신을 보내고, 아큐는 이들을 대접하며 간접적으로 부마국 지위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는 진 세종의 심기를 건드렸고, 결국 아큐가 직접 베이징에서 5일간의 오체투지 끝에 수습에 성공하나 진에게 뜯어낼 수 있었던 명분들을 현찰로 땡처리 받고 아큐도 오체투지의 여파로 사망한다.

아큐 사후, 뜻을 이어 완벽한 중앙집권과 유교정 이식에 성공한다. 유자의 나라가 된 일본은 진의 충실한 1번국이 되어 베트남과 더불어 진의 수족이 되며 조선이 명에게 했듯이 진을 선망하고 동시에 경계하게 된다.

이후 동남아와 인도로 진출하여 말라카와 실론이라는 알짜배기 땅을 주워먹는다. 이후 유럽과 인도의 혼란을 계기로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한다. 이때 유가적 이상사회를 그리는 메이지 덴노와 국제사회에서의 경험부족으로 외교의 방향성이 낭만주의적 외교로 굳어진다.

인도를 정벌한 프랑스가 무차별적으로 인도인들을 학살하자, 일본은 차라리 자국으로 추방할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미 맛이 가버린 프랑스는 이를 거절하고 학살을 계속했고, 결국 일본은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기 이른다.

인도인을 구하고자 선전포고한건 좋았으나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를 통해 인도에 해군력을 신속히 투사할수 있었고 결국 일본은 참패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프랑스는 인도의 인종청소에 집중하느라 실론과 해외로 도망치는 인도인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일본은 이들을 한명이라도 더 살리고자 흥남철수 마냥 배가 가라앉기 직전까지 가는 수준으로 인도인들을 대피시켰고 4500만의 인도인들을 살리는데 성공한다.

전후 일본은 이러한 만행[11]에 분개하여 프랑스를 증오하게 되었고, 결국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대 프랑스 연합이 결성되어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베트남과 함께 인도를 재침공하여 결국 해방시키는데 성공한다.

전후 인도에 남은 백인들을 귀국시키나, 유가적 사상의 한계로 강제추방을 거부하고 교화와 화해를 시도한다. 그러나 인도인의 백인에 대한 원한은 깊었고[12] 베트남과 연합으로 치안유지와 군정을 실시하고 진의 도움으로 각종 구호물자와 구호인력으로 상황을 호전시키려고 하나 실패한다. 결국 파키스탄 지역에 남은 백인들을 몰아넣어 독립시키고 도주하던 프랑스의 인도총독을 프랑스의 송환요구를 거부하고 전범재판에 세워 처형시키는 등 갖은 노력을 하나...겨우 그정도로 일이 해결될 리가 없었고 상황은 극단적으로 치닫게 된다.[13] 결국 일본은 마음이 꺾기게 되고, 베트남과 함께 20년의 군정 후 인도에서 완전철수 하기로 한다.

군정 설치 후 대진, 베트남과 전후복구를 계속한다. 복구작업 중 인도의 식민통치 기간에 프랑스가 인도인들을 구덩이에 대충 몰아넣고 대량학살을 벌인탓에 도로변에 백골이 대충 굴러다니는 개막장 사태가 오고, 급기아 대진 성종이 백두산에 올라 진혼제를 지내고 유골들을 수습하는 초유의 상황에 이른다.

이런 상황까지 가자 베트남, 러시아, 공화제국, 브라질과 국제연합을 창설하여 본부를 중립국(?)인 대진 홍콩에 두고 프랑스도 이사국으로 초청한다.[14]프랑스가 희희낙락하며 승낙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국제 사법재판을 열고 인도에서의 학살 혐의로 프랑스를 기소한다.

프랑스는 끝까지 혐의를 부인하나 일본의 철저한 증거수집과 프랑스의 자폭으로 프랑스는 패소, 정의구현에 성공한다.[15]
2.1.5.1. 역대 왕
관련AA는 아카자 아카리->셜록 홈즈->?->유이가하마 유이->이치노세 코토미
2.1.5.1.1. 메이지
-현대 일본인들에게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천황이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반드시 그 1위를 차지하는 인물. 2위나 3위부터는 변동이 있어도 1위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동이 없다.
-아큐 이래 유교화되어 중앙집권화된 일본의 국력을 가장 올바른 방식으로, 그리고 가장 선량한 방식으로 사용한 천황. 그의 치세 동안 일본국은 프랑스와 2차례 전쟁을 벌였으며 그 전쟁은 모두 프랑스의 식민지배 기간동안 인종말살의 위기에 처해있던 인도인들을 위함이었다.
-그의 업적은 크게 입헌군주정을 통한 의회민주주의의 도입, 일본의 산업화, 그리고 향후 일본국의 대외정책을 다분히 낭만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방향으로 고정한것이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경우 최선이 호구취급에 최악은 나라가 몰락하지만, 당대에는 프랑스 제국이라는 그 누구도 부정할수없는 절대악이 있었다.
-여러모로 오늘날의 일본과 떼어놓고 이야기할수없는 인물. 진나라인들에게조차 일본의 천황 중 아는 사람을 꼽아보라고하면 그의 이름만은 반드시 한번쯤은 나오게 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학계와 민간 모두 입을 모아 건국 이래 일본국 제일의 성군이라 칭송한다.
2.1.5.1.2. 기타인물
문정공 히에다노 아큐
-나라가 아무리 못나도 나라가 망하면 그 뒤를 따르는 신하가 적어도 3명은 있다를 몸으로 직접 증명한 충신이자 참된 유학자. 일본에서는 찬양해 마지않으며 진나라에서도 과대평가되었다고 할지언정 존경해 마땅할 유자라는건 부정하지 않는다.
-특이하게도 일본의 충신이자 일본의 거유였음에도 그의 먼 선조는 임진년의 왜란 때 일본으로 피랍되었던 양반이었다고 한다. 히에다 가에서도 이에 대해서는 딱히 부정하지 않으며, 일본에서도 그다지 의의를 두고 있지 않다. 오히려 진나라 일부에서 호들갑을 피우는 편.
-나라가 망하고서도 전조의 왕을 찾아가 충성을 맹세하여 그를 위하여 학당을 운영하였으며, 그 학당에서 기른 제자들이 다시 전조를 일으켰다는 춘추전국시대에도 찾아보기 힘든 참된 거유. 현 일본국의 국부이자 스승으로 섬김받고있다.
-그에게 유일한 불행이 있다면 하필이면 진의 황제가 그 진세종이었다는것. 말년에 시간이 얼마 남지않았음을 직감하고 진 세종을 시험하다 직접 장맛비를 맞으며 오체투지를 한 일화는 오늘날에도 두고두고 회자된다.
-일본에서는 흔히 패자(稗子)라고 칭송하며 띄워주지만, 진나라에서는 명신이고 충신이었음은 인정해도 학문의 깊이는 거기까지 깊지않다고 부정하는편. 이 일로 멱살잡이하고 싶지않다면 웬만하면 일본인 앞에서는 이야기를 애초에 꺼내지도 않는게 좋다.

열녀 모노노베 후토
-나라가 아무리 못나도 같이 죽을 충신이 셋은 있다를 온몸으로 증명한 천출 출신 궁녀.
-더이상 자신에게 봉급을 지급해줄수도, 안전을 보장해줄수도, 권세를 누리게 해줄수도 없는 망국의 왕을 뒤쫓아 당시에는 시골촌구석 중에서도 촌구석 취급받던 시고쿠땅까지 쫓아들어갔다. 그것도 푸른피로서의 의무도 없이 일개 천출 출신의 무지렁이 궁녀가.
-아큐를 도와 몸을 팔아 아큐가 학당을 운영할수있도록 해주었고, 또 그에 감복한 아큐에게 가장 먼저 가르침을 받아 여성의 몸에도 불과하고 훗날 패자로 칭송받는 그 히에다노 아큐의 제 1 제자로서 이름을 날렸고, 후일 나라가 기근으로 피폐해졌을때는 손수 격문을 띄워 역적 도쿠가와를 강력히 규탄하고 옥사한 열녀의 표상.
-실록에 따로 열전이 기재되어있는 유일한 천출 출신 궁녀. 때문에 일개 궁인 출신임에도 불과하고 사료는 꽤나 풍부한 편이며, 충신이자 열녀의 표상으로 일본국에서 널리 읽혀졌다.
-다만 그와는 별개로 진나라에서는 그다지 이름이 알려져있는 인물은 아니다. 일개 궁녀까지 기억하기에는 진나라 내에서도 충분히 인물이 많다.
-학계에서는 창조된 가상의 인물이 아닐까하는 의견이 한때 정설로 받들어진적 있다. 그 행적이 너무 비현실적이기 때문. 다만 그녀가 손수 띄운 격문이 발견되면서 이런 의심은 해소되었다.

일본국 제 1대 국무총리 이토 히로부미: AA는 토비이치 오리가미
-국제연맹의 아버지. 종전 이후 일본의 전공와 진나라의 위세를 빌려와 완성시킨 국제연맹 체제는 오늘날까지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때문에 세계 어딘가에서 존경받는만큼 세계 어딘가에서는 원망해마지 않는 인물.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제국이 유럽에서의 양면전쟁으로 더이상 인도에 신경쓸수없다는 확신이 들고나서야 참전을 결행한 일화로 유명하다. 당시 일본 전역에서 참전여론으로 내각이 뒤집히기 직전까지 갔던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과감한 처사. 덕분에 일본은 전쟁 중 큰 피해없이 인도를 해방시킬수있었다.
-50년간의 군정을 주장한 메이지 덴노를 설득하여 일본의 군정기간을 20년으로 줄이고, 다시 군정기간을 늘려야한다는 여론이 의회 여야에서 과반수를 차지했을 때도 일본 여야를 설득하여 최소치인 15년간의 군정기간 연장으로 타협시켰다. 현실주의적 외교관으로 일본의 낭만주의적 행보를 지탱한 인재.
-다만 그의 최후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는데, 국제연맹 창립 이후 여섯개 대국에 의한 세계통치를 확립시킨 그의 행보에 배신감을 느낀 일본의 무정부주의자에게 총격당하여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단말마는 "당했다!"였다고.
-학계에서의 평가는 일본의 리슐리외. 혹은 리슐리외가 프랑스의 이토 히로부미로 평가받기도. 민간에서의 평가는 100년 일찍 태어난 미츠루기 레이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프랑스 대사에게 삿대질하던 사진이 아직도 남아있다.

2.1.6. 베트남

관련AA는 이부키 후코

첫 등장은 진의 천명대정 승리 이후 진 태종때. 진은 베트남에 입조를 권하나 베트남은 소중화 뽕을 빨며 독자노선을 탄다.

그러다 진 세종때 수천톤짜리 윈드재머가 인도차이나 앞바다를 드나들자 바로 꼬리를 내리고 입조하여 일본에 이은 제 2번국이 된다.

진의 제 2번국이라는 지위와 혜택, 유교 1000년 역사에 입각한 강력한 중앙집권과 막대한 행정력, 우수한 농업생산력과 양호한 인구수에 힘입어 나름 강국으로 성장하나, 작 중 큼지막한 사건이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 중심으로 일어나다 보니 진 문종 만국박람회 전까지 에도 막부를 이은 공기로 등극한다.[16]

만국박람회를 시작으로 제 1번국인 일본과 힘을 합쳐 국제사회에서 역할이 늘어나고,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 침공때 일본을 도와 인도를 해방하고 군정을 실시한다.[17]

프랑스의 식민지배 이후 개판이된 인도를 상국 찬스를 사용하여 전후복구 작업에 성공하나, 민족갈등 수습에는 실패하고 이에 인도에서 완전철수를 고심했으나 결국 일본과의 의리를 지켜 함께 20년 후 인도에서 완전철수 하기로 한다.

대 프랑스 전쟁 이후 일본의 주도로 러시아, 프랑스, 공화제국, 브라질과 함께 국제연맹을 창설, 의장국이 된다.

20년이 지나고 일본이 인도 군정 연장을 시도하자 국제연맹에 떠넘기고 인도에서 철수한다. 그러나 국제연맹의 관리 이후 인도는 혼란에 빠쳐 범죄와 마약이 판치는 마굴이 되고, 베트남은 철군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18]

2.2. 유럽

2.2.1. 프랑스

프랑스 제국 시황제 나폴레옹 1세
-인도인들의 마하라자. 신성로마제국의 파괴자. 러시아의 정복자. 아랍인들의 해방자. 발칸인들의 해방자. 이베리아의 해방자. 로마의 보호자. 독일의 보호자. 프랑스 시민들의 황제.
-위에 타이틀 중에서 프랑스 시민들의 황제 빼고는 모두 자칭이라는것이 특징. 현지에서는 그 누구도 그를 해방자라거나 보호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망탁조의의 사마의나 조조조차 살아생전에 자신을 중용한 왕을 배신하여 그 왕족을 멸하지는 않았다. 하다못해 왕망조차 전조의 황제를 융숭히 대접하여 낙향시켰을 뿐이다. 망탁조의를 능가하는 권력지향형 인간.
-학계에서 평가하기를 왕재가 될 그릇이라기보다는 최고사령관이 될 그릇. 식민지를 지키기 위하여 그가 인도에서 벌인 대학살에는 같은 프랑스인들조차 혀를 내두른다.
-프랑스와 그 외의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린다. 프랑스에서는 어느정도 호불호는 있어도 나라를 일으킨 세기의 풍운아이자 명장이지만 그 외에서는 그냥 천하의 개썅놈 취급. 일부 지역에서는 그의 이름 그 자체가 욕설로서 통용되기도.

프랑스 제국 3대 황제 조제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의 영웅, 그리고 인도의 학살자. 비록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학계에서 치매가 걸렸다는것이 정설일 지경이었다지만, 말한마디로 2억 가까이 되는 인명을 지구상에서 지워버린건 그가 유일하고 또 유일해야만한다.
-정신이 온전할 무렵에는 그의 동생 나폴레옹과는 다르게 온건한 정치를 펼쳤다. 그는 비록 타고난 왕재는 없었으나 동생이 남기고 떠난 원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프랑스 제국을 승리나 다름없는 패전으로 이끌었고, 러시아가 실책에 실책을 거듭하여 유럽 각지에 적을 만드는 동안 프랑스는 상처를 달래며 후일을 노릴수있게 되었다.
-그와 인도인들의 가장 큰 불행은 그의 동생 나폴레옹이 만들어낸 프랑스 제국의 기형적인 정치체제에 있었다. 그가 정신적으로 병들어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한것이 분명함에도 제국의 관료들은 오로지 그의 명령에 순종할 뿐이었으며, 결국 정신착란에 걸린 늙은 황제의 말 한마디에 2억 가까이 되는 인명이 도살당하는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학계에서도 민간에서도 정신착란에 걸리기 이전과 이후의 그를 별개의 인물로 평가한다. 치매에 걸리기 이전 그는 프랑스의 영웅이었고, 유럽을 평화롭게 만들지도 모르던 성군이었다.
-그러나 치매에 걸리고 난 이후, 그는 역사상 최악의 학살자로 돌변했다. 그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것이다. 그리고 인류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그가 역사상 최악의 학살자이기를.

프랑스 제국 4대 황제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현대 파시즘의 아버지. 그리고 프랑스 제국에게서 마지막 자정 가능성마저 거세시켜버린 독재자.
-흔히 편안히 죽는 대신 장대위에 메달리는 편이 모든 프랑스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일이었을거라 지적된다. 조제프 시절의 프랑스 제국은 비록 광기에 차있어도 최후의 자정가능성만은 남아있었지만, 그가 독재체제를 공고히하고 난 이후로는 그 최후의 자정가능성마저 거세당하면서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선대 조제프나 후대 위젠에 비하여 뭔가 특출난 악행을 저질렀는가하면 그것은 아니다. 인도학살은 이미 조제프 대에 끝났으며, 루이 시대의 프랑스는 딱히 외세와 전쟁을 한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세계에게 있어서 가장 무해했던 프랑스 황제라고 불리운다. 또 동시에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유해했던 프랑스 황제라고도 불리운다.
-학계에서의 평가는 형장에서 인생을 마무리하는편이 프랑스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결말이었을 인물. 민간에서의 평가도 별반 다르지 않다.

프랑스 제국 5대 황제 루이 외젠 보나파르트
-세계대전의 전범이자 알제리 학살의 주범인 동시에 프랑스 제국의 마지막 황제. 그는 분명 대단한 악인은 아니었으나, 이미 절대악이 되어버린 프랑스 제국에 맞설만큼 선한 인물도 아니었다.
-여러모로 구시대적인 유럽적 제왕에 가까운 인물. 나라보다는 왕조의 유지를 더 중시했으며, 이교도들에게 가차없고 작위클레임에 근거한 정복전쟁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이미 그런 식의 제왕이 용납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세계대전을 일으켜 800만에 달하는 프랑스 청년들을 무의미하게 희생시켰으며, 프랑스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개망신을 당하고 나라전체가 아노미현상에 빠지자 망설임없이 파리를 등지고 알제리로 피신하여 후일을 도모한 끝에 다시 파리에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권력욕과 수신의 화신이라고 부를수있는 인물.
-그의 가장 큰 실책이자 불행은 그와 그의 제국은 그들이 파멸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들 자신의 역량을 온전히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는것이었다. 결국 6자회담에서 국제법을 통과시키고 이를 근거로 러시아 제 2 공화국군이 몰아닥치자 그의 제국은 이렇다할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파멸하고 말았다.
-전범 재판소에서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청산가리 캡슐로 자결을 시도한 그의 마지막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고, 그는 전기의자에 앉아 600만 볼트의 고압전류에 감전되어 온몸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죽었다.

2.2.2. 러시아

러시아 제 2 공화국 제 1대 대통령 로리스-멜니코프
-러시아와 유럽에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인물. 러시아에서는 그를 러시아의 민주화를 이끈 민주투사이자 승전을 이끈 영웅으로 떠받들지만, 유럽인들은 한입을 모아 그를 유럽의 원수라고 저주한다. 러시아의 국익을 위하여 유럽을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떨어트린 인물.
-젊은 시절 차르가 사라지고 성립된 관료독재정에 맞서 두마(의회)를 재개할것을 주장하며 수차례 감옥에 수감되고 시베리아에 끌려갔지만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 제 1 공화국이 시대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리자 민주혁명의 지도자로서 임시정부를 이끌었으며, 최종적으로 혁명 이후 치러진 첫번째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했다.
-세계대전기간 동안 그는 프랑스 제국에 맞서 러시아의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해냈고, 끄끝내 무조건 항복을 강행시키는데에는 실패하였으나 이후 일본의 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협력하여 국제연맹을 주도하면서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프랑스 제국을 나락까지 추락시켰다.
-이후 일본에서의 구제금융으로 무사히 경제대공황의 위기를 넘긴 그는 임기의 마지막 소국들의 권리와 역할에 대하여 규정한 국제법을 국제연맹의 6자회담에서 통과시킴으로서 러시아의 패권을 확고히시키고 16년간의 장기집권을 끝마쳤다. 여러모로 현대 러시아를 논함에 있어서 빼놓을수없는 인재.
-민간과 학계에서의 평가는 흔히 러시아의 영웅. 민간에서는 순수히 경외하는 의미에서 러시아의 영웅이라 부른다면 학계는 다분히 조소적인 의미가 강하다.


[1] AA도 유즈키 유카리[2] 리첼렌이 연재하는 AA작품의 대부분에서 조선 관련AA는 문치 사회를 반영해서 후미카로 등장한다.[3] 왕씨처럼 성을 바꾸던가 해서 살아남은 애들이 있었는지 소론들이 전주 이씨 복권을 노린 적이 있다.[4] 조공무역은 번국이 상국에 조공을 바치면 상국은 하사품을 번국에 제공하는데, 상국의 체면 등을 고려하여 조공의 배 이상을 하사하는게 관례이다. 그렇기에 제 1번국인 일본은 1년에 4번, 2번국인 베트남은 1년에 한두번 대진에 입조할 수 있으며 나머지 소국들은 적당히 3~5년에 한번씩 입조한다.[5] 작중에선 중국집 쿠폰(...)으로 불린다.[6] 후에 이것이 문제가 되는데, 덴노가 쇼군에게 직접 선양한게 아닌 상국 여칠지에게 선양했기 때문. 즉 직접 선양이 아닌 대리선양인 셈이다.[7] 왜에 파견될때 이미 나이가 74살이었다.[8] 진 조정에 대충 '섭정님 이번달 상납금 좀 늦어요ㅎㅎ'라는 내용의 장계를 보내고 이를 받은 세종은 폭소하기에 이른다.[9] 과정이 참으로 드라마틱한데, 낙향한 천황 도시코를 그녀를 모시던 궁녀 후토가 따라 모시고 후에 유학자인 아큐가 그녀를 찾아온다. 이후 궁녀가 몸을 팔아 번 자금으로 덴노와 아큐가 유생들을 가르치던 중, 텐메이 대기근으로 일본 전역이 도탄에 빠지고 덴노가 복귀할 절호의 기회라 여긴 후토가 희생하여 손수 격문을 띄워 잇키들을 일으켰다.[10] 진에서 파견한 상국인 모조묘가 본국에 뇌물을 바쳐 종신상국으로 등극, 일본을 수탈한건 물론 전조가 멀쩡히 남아있음에도 선양을 강요했다. 물론 덴노 본인은 희희낙락하며 귀향했으나 정상적일 천조질서에선 있을수 없는 일이며, 더더욱 진이 일왕으로 앉힌 도쿠가와가 대기근때 수습은 개뿔 주지육림을 즐겼기 때문. 도의적 책임이든 유학적 책임이든 진이 책임이 컸다.[11] 2억명의 인도인들이 무차별 학살당했다.[12] 당장 눈에 보이던 인도인들을 모조리 죽인게 프랑스였고, 길가다 백골이 굴러다닐정도로 죽였으며 그 경험자들이 살아서 다시 인도로 돌아온 상황이었다. 수백년간은 국민감정이 험악해지는건 필연적이었다.[13] 학살에 동조한 프랑스인들은 본국이나 알제리로 튄지 오래였다. 즉 전후 인도에 남은 백인들은 정말로 무고한 사람들이었다.[14] 대진이 빠진 이유는 대진 혼자 나머지를 쌈싸먹는게 가능했기 때문이다.[15] 국제연합 창설과 프랑스의 기소에 총대를 맨 사람이 바로 작중 일본 초대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다. 프랑스 대사에게 삿대질을 하는 사진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16] 원역사 독일 2제국과 비등하거나 그 이상의 국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한동안 공기 신세를 피하지 못했다.[17] 이때 동원한 번국연합군이 일본 200만, 베트남 150만명을 동원했으며, 이후로도 해군력이 진, 일본을 이은 3위로 등극하며 베트남의 국력이 진의 2번국 수준은 충분히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18] 마약이든 범죄자든 인도에서 버마를 경유해 베트남으로 흘러들어올수 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