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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18:57:54

귀자모신

귀자모에서 넘어옴
鬼子母神
파일:attachment/oosstatue.jpg
일본에서 13세기에 제작된 귀자모 좌상. 일본 시가현 온조우지(원성사園城寺) 소유. 카리테이모 좌상(가라제모 좌상 訶梨帝母 座像)으로 불린다.

1. 소개2. 설화3. 매체에서

1. 소개

불교의 호법신. 아기의 탄생과 양육을 보호하고 불법을 수호하는 여신 혹은 보살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하리티(Hārītī)라고 하는데 한자로는 하리제, 하리저 등으로 음사한다.

2. 설화

귀자모신은 원래 4세기 초에는 존재한 것으로 파악되는 불설귀자모경에서 처음 등장하나, 그 자세한 내력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기록은 7세기 말에 당나라승려 의정(義淨, 635~713)이 지은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 자세히 나온다. 경전에 따르면, 그녀는 전생에 억울한 원한을 품고[1] 완전히 절망하여 죽기 직전에 "내세에 내가 다시 태어나면 반드시 이 나라의 아이란 아이는 모조리 잡아먹어 씨를 말려버리겠다"는 저주의 발원을 하여 야차로 태어났다.[2]

이후, 하리티는 왕사성(인도 라즈기르) 인근에 살면서 왕사성 사람들에게서 아기를 훔쳐 잡아먹는 잔혹한 야차녀로 살았다. 대단히 잔혹한 짓을 아무렇지도 자행하는 하리티였지만, 자기가 낳은 자식 1만 명에게는 상냥한 어머니였다. 기록마다 500명, 또는 100명이라고 하는 등 구체적 숫자는 애매하다. 그래서 진짜 1만이 아니라 많은 숫자를 의미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한편 하리티가 그냥 야차도 아니고 노귀신왕(老鬼神王) 선서가(판칭카. Panclka)의 아내였다거나 역질을 퍼뜨리는 역신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하리티에게 자식을 잃은 사람들을 본 아난존자와 여러 사문들이 석가모니에게 하소연하자,[3] 석가모니는 하리티의 자식 중 막내[4]의 모습을 감추었다. 막내 아이가 보이지 않자, 하리티는 애타는 마음으로 세상을 찾아 돌아다니다 부처가 있는 곳까지 와서 아이를 찾아 달라고 빌었는데, 이때 부처는 하리티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부처의 다정한 말에 하리티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크게 뉘우쳤고, 이에 부처의 법문에 귀의했다. 이후 하리티는 아기의 양육과 보호를 맡고, 아이가 없는 가정에는 아이를 점지해주는 신이 되었다. 후에 귀자모신의 자식들 중 딸 하나가 길상천이 되었다.

불설귀자모경에는 비사문천도 귀자모신의 아들이라는 언급도 있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소설 우부메의 여름에서도 이 일화가 언급되는데, 교고쿠도는 여기서 "부처라면 가정이나 가족에 대한 애정도 하나의 번뇌이고 집착이니까 그것마저도 버려야 한다고 말하지, 저런 식으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누구도 똑같다는 것을 헤아리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라고. 그리고 이는 소설의 중요한 복선이자 스포일러가 된다.

'부처는 가족에 대한 애정을 번뇌나 집착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며 소설 외적인 측면에서 '교고쿠도는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허무주의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숫타니파타 첫머리 다니야 경[5]를 읽어봐도 그러한 주장은 근거가 떨어진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기뻐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로 인해 기뻐한다. 사람들은 집착으로 기쁨을 삼는다. 그러니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기뻐할 것도 없으리라.”라는 마왕에게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근심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걱정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는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담마빠다에 따르면, 부처는 "세상에서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은 즐거움이며,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은 즐거움이다. 사문을 공경하는 것은 즐거움이며, 바라문을 공경하는 것은 즐거움이다." 고 했으며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도 부모를 범천이나 스승으로 받들어야 한다며 효를 강조했다. 또한 여러 제자들과 가르침을 청해 온 이들에게도 효와 자녀 교육에 대해 설했다. 또한 효를 중요시하여 죽은 부모에게 보시를 올리고 위령제를 올리는 아리아계 종교의 전통을 부정하지 않아, 죽은 부모에게 보시를 올리는 것 또한 의미가 있다고 설했다. 중국 불교에서는 부처는 출가하여 부모와 자식을 버렸고, 따라서 "출가는 곧 불효다."라는 유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필사적일 정도로 부처를 변호하고 불교에서도 효를 중시한다고 주장했다. 마냥 부처가 효와 가족애를 부정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귀자모신이 아동의 수호신으로 인식된 데에는 원래 야차들이 인도의 토착신들로서 아리아계 종교의 영향력 확장으로 그 권위를 잃어 재앙과 축복을 동시에 행하는 신적 존재들로 격하되었던 일도 영향을 주었다. 즉, 야차들은 하리티처럼 아이들을 잡아먹고 사람을 해치며 아리아계 종교인 힌두교불교를 공격하는 부정적인 존재면서 호의를 얻으면 수호신이나 재복신으로서 축복과 보호를 제공해주는 긍정적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리티가 수호신이 된 것도, 이러한 야차들의 성격에서 보면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니다. 특정한 인물에만 한정된 사례이긴 하나, 야차가 보호해주기로 맹세한 인간이 모친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절대적 보호를 제공한 일도 있다.

여기에 더해 하리티 본인이 야차왕의 아내나 역신이라는 전승이 전해질 정도로 격이 높은 야차로 묘사되었던 점도 작용했다. 불경에서는 야차 사회의 위계 질서가 매우 엄격한 것으로 묘사했다. 그래서 야차들의 습격을 받은 인간이 서열이 높은 야차나 야차왕의 이름을 외우면, 그보다 서열이 낮은 야차는 그 인간이 자신의 상급자나 왕의 호의를 입었다고 판단해 절대로 해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자모의 이름을 외우거나 그녀를 신앙하는 것으로서 재액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려 했던 것이다.

귀자모신은 그림이나 조각에서는 주로 한 손에 아기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다산을 뜻하는 길상과(吉祥果, 석류)를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있는 어머니 상이라는 이유로 서양의 피에타와 비교되는 경우가 많은 듯.

석류는 마(魔)를 없애는 과일이라고도 하는데, 부처가 훈계할 때 인육을 먹고 싶어지면 먹으라면서 석류를 주었다고 한다.[6] 풍요를 상징하는 염소뿔이나 석류를 든 도상으로 보아, 본래 야차들이 그렇듯 비아리아계 인도인의 풍양신이었다고 추정한다. 네팔 카트만두의 스와얌부나트 사원 곁에 귀자모신을 모시는 작은 사당이 있는데 인근 주민들이 매우 중요시하며, 당의 승려 의정이 지은 남해기귀내법전에도 등장한다.

남해기귀내법전에는 인도에서는 승려를 공양할 때에 식사하는 끝 자리에 쟁반 하나 정도 음식을 담아서 아리저모(阿利底母) 즉, 귀자모신에게 공양을 올렸다. 앞서 설명한 일화에서 부처에게 귀자모신이 교화된 후, 그녀가 석가모니 부처에게 500명이나 되는 자신의 아이들은 뭘 먹고 살면 좋겠느냐고 묻자, 부처는 “비구들이 머무는 절집에서 날마다 제삿밥을 마련할 때마다 너희들을 배부르게 먹게 하겠다.”라고 말했다.

이후, 서방의 모든 절에서는 늘 문이나 집이 있는 곳과 식당과 주방 근처에 아리저모의 형상을 새기거나, 품에는 아이를 안고 무릎 아래에는 몇 명의 아이들이 있는 그림을 그려 그 상(像)을 표시해 매일 그 앞에 공양하는 음식을 크게 차려 놓았다. 여기에 질병이 있거나 아이를 낳을 소식이 없는 사람이 향응하는 음식을 올리면 모두 소원을 이루게 된다는 전승이 있다. 이러한 풍습은 동북아시아에도 전해져서 현지화가 이루어질지언정, 귀자모를 모시는 제단이나 사당을 두어 아이에 대한 보호를 간구하거나 아이를 점지받는 일이 오래도록 성행했다.

3. 매체에서


[1] 그 원한이 무려 3대에 이어졌는데 처음에는 의 모략으로 유산(의학)을 하다 죽은 본처, 이후엔 첩이 환생고양이에게 달걀을 잃은 암탉, 바로 전에는 그 첩이 새로 환생한 표범에게 새끼를 계속 잃은 암사슴이었다.[2] 실제로 법구경의 주석서를 비롯한 불교 문헌들에는, 죽어서 윤회할 때에 야차로 태어나 복수할 것을 맹세하여 원한의 대상이나 아이들을 해치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3] 왕사성(라즈기르)을 다스리던 빔비사라 왕이 석가모니에게 최초의 절(불교) 죽림정사를 지어 바쳤기 때문에, 석가모니는 죽림정사, 또는 왕사성 인근 영취산(영축산)에 상당 기간 머물렀다. 지금도 죽림정사 터와 영취산에 석가모니가 머물렀던 자리(여래향실)의 터가 있다. 귀자모신이 왕사성 인근에 살았다면, 주민들이 석가모니에게 탄원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자연스럽다.[4] 이름이 핑갈라(Pingala) 혹은 프리얀카라(Priyankara)라고도 한다. 남해기귀내법전에는 한역으로 애아(愛兒)라고 했다. 불설귀자모경(佛說鬼子母經)에는 부처를 따르는 사문들을 시켜서 귀자모신의 자식들을 모조리 잡아오게 했다.[5] 부처와 목자와의 대화[6] 이 이야기가 와전되어서 석류에서 인육 맛이 난다는 말이 있는데 당연히 사실무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