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권영회(權寧會) |
이명 | 권택(權澤) |
본관 | 안동 권씨 |
생몰 | 1885년 9월 19일 ~ 1910년 7월 1일 |
출생지 | 전라도 남평현 욱곡면 구례동 (현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욱곡리 흥동마을)[1]# |
사망지 | 대구형무소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권영회는 1885년 9월 19일 전라도 남평현 욱곡면 구례동(현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욱곡리 흥동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6월 기삼연 의병장의 부대에서 활동했으나 기삼연이 일제 헌병대에게 체포된 뒤 총살형에 처해지자 1907년 11월 심남일 의병장의 부대에 다시 들어갔다. 1908년 3월 7일부터 10월까지 전남 영광, 강진, 장흥 남평 등 각 군에서 5회에 걸쳐 일본헌병 및 순사대와 결사적으로 전투하였으며, 동년 10월 조경환 의진의 참모로 12월경까지 총기를 휴대하고 함평, 광주 등지에서 일본 헌병대와 4회에 걸쳐 전투를 벌였다.19098년 12월 박민홍(朴珉洪) 의병진이 40여정의 총기로 무장을 갖추고 투쟁할 때 부하가 40내지 50여명이 되자 이곳의 참모장이 되어 함께 나주, 남평 등지에서 일본군과 2회에 걸쳐 전투를 벌였다. 1909년 1월 2일에 휘하 40여 명의 의병과 함께 무안읍내에서 순사 함필영의 숙소를 포위 공격하여 순사제복 및 대검 등 20여점을 노획하고 함필영(咸弼永)을 사살하였다. 동년 2월 1일 이후 행적을 감추고 있다가 구세군(救世軍)의 부위(副尉)가 되었으나, 동년 9월 25일 장흥군 눌양리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1910년 4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동년 5월 31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또한 6월 11일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역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으며, 동년 7월 1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권영회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