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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14:19:42

권순태/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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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북 현대 모터스
2.1. 2006 시즌2.2. 2007 시즌2.3. 2008 시즌2.4. 2009 시즌2.5. 2010 시즌2.6. 상주 상무 피닉스 (군 복무)2.7. 2013 시즌2.8. 2014 시즌2.9. 2015 시즌2.10. 2016 시즌
3. 가시마 앤틀러스
3.1. 2017 시즌3.2. 2018 시즌3.3. 2019 시즌3.4. 2020 시즌3.5. 2021 시즌3.6. 2022 시즌3.7. 202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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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축구 선수 권순태의 클럽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전북 현대 모터스

파주에서 초중고를 나왔고 파주종고 3학년에는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될 정도로 유망한 자원이었다. 이후 전주대로 진학해 정진혁 감독에게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기용됐고 3학년엔 대학 최고의 골키퍼로 주목받았다.

그렇게 대학 리그 최고 골키퍼로 발돋움한 권순태는 지역 연고 구단 신임 감독 눈에 띄었고 3학년 2학기에 부활한 2006년 K리그 드래프트에서 우선지명을 받으며 프로 선수가 됐다.

2.1. 2006 시즌

등번호 21번을 달았다.

신인임에도 K-리그 2라운드 서울 원정에 선발 출전하며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성경일, 이광석 등 기존 선배들을 제치고 주전으로 등극했다.

키는 182cm로 골키퍼 치고는 큰 편은 아니지만 빠른 순발력과 거침없는 판단을 바탕으로 하는 플레이를 강점으로 전북의 후방을 든든하게 막았고 리그 30경기에 나서 32실점을 하며 나쁘지 않은 실점률을 보였다.

또한 ACL에서도 부동의 주전 수문장 자리를 지키며 연일 드라마 같은 승리를 거뒀고 2006년 전북의 첫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리고 12월에 열린 FIFA 클럽 월드컵 두 경기에서도 멋진 선방을 보이며 프로 1년 차에 세계 무대까지 경험하는 순간을 맞이했다.

2.2. 2007 시즌

등번호 1번으로 번호를 변경했다.

2007 시즌에도 리그컵에서 성경일과 로테이션을 돌린 걸 제외하면 리그와 FA컵에서 부동의 주전으로 나서며 팀의 6강 플레이오프 경쟁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9월 2일 부산과의 홈경기 후반 30분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됐고, 전북은 권순태가 결장한 6경기에서 단 1승만 거두는데 그치며 리그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ACL에선 탈락하고 만다.

k-리그 20경기 23실점, 리그컵 7경기 6실점, FA컵 1경기 1실점을 기록했다.

2.3. 2008 시즌

역시 주전 골키퍼를 맡았고, 4월 한 달 간 부상을 당해 홍정남에게 자리를 내준 것을 제외하면 리그, 리그컵, FA컵, 플레이오프 등 모든 경기에 출전했고, 팀의 6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기여했다.

K-리그 24경기 30실점, 리그컵 9경기 11실점, FA컵 3경기 4실점을 기록했다.

2.4. 2009 시즌

리그 28라운드 광주 상무전을 제외하고 모든 경기에 나섰고, 팀의 압도적인 선두 행진을 수호했다.

비록 FA컵에선 4강에서 탈락했지만, 리그 챔피언 결정전에서 성남을 이기며 팀 역사상 최초 K리그 우승 멤버가 됐다.

K-리그 29경기 31실점, 리그컵 4경기 9실점, FA컵 4경기 6실점

2.5. 2010 시즌

역시 꾸준히 선발 출전하다가, 8월에 무릎 부상을 당하며 약 두 달 간 결장했다.

그 사이 팀은 ACL 8강전에서 탈락했고, 4경기에서 3패를 기록하는 등 부진에 빠졌다.

그러다 26라운드에 복귀해 다시 주전 자리를 꿰찼다. 하지만 지난 시즌 만큼의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진 못했고, 챔피언 결정전 진출에 실패하며 아쉬운 시즌을 보냈다.

K-리그 24경기 24실점, 리그컵 6경기 4실점, FA컵 1경기 1실점, ACL 6경기 8실점

2.6. 상주 상무 피닉스 (군 복무)

2010년 말 상주 상무 피닉스에 입대했다. 2009년 K리그 우승의 주역이었지만 이 시절 오른쪽 무릎의 내측인대 부상 및 실명 위기까지 갔던 눈 부상으로 극심한 슬럼프가 시작됐다.

상무에서는 1년 9개월 동안 리그와 리그컵, FA컵을 모두 포함해 34경기 55실점 7클린시트를 기록했다.

2.7. 2013 시즌

2012년 9월에 전역했고 2012년 개천절 부산 원정 경기에 복귀전을 치렀다. 이후 최은성에게 계속해서 밀리며 리그 최종전에만 나서며 복귀 시즌은 2경기 출전에 그쳤다.

2013시즌 초반에는 최은성과의 경쟁에서 다소 우위를 보이며 적지 않은 기회를 받았다. 그러나 꾸준히 실점을 한데다 5월 들어 실점률이 더욱 높아졌다. ACL 16강전 가시와 레이솔전 두경기에서 5실점을 기록했고 6월 1일 부산전 4실점, 6월 26일 수원전 5실점 등 최악의 모습을 보였다. 결국 수원전을 끝으로 팀에 복귀한 최강희 감독에 의해 다시 최은성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며 잔여 경기에서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권순태에겐 좋은 기회로 작용했다. 어쩌다 보니 3년 차에 최고참 골키퍼가 되어 버린 덕에 힘들게 후배들을 이끌었는데 이제는 자신이 의지할 만한 선배가 생긴 것. 가뜩이나 골키퍼 코치 자원이 부족한 K리그[1]에서, 실력으로나 인성으로나 리그 내에서 최고라 인정받는 최은성의 옆에서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 시기의 가장 큰 변화는 '성격'. 평소 실점 이후 수비수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때마다 최은성이 따끔하게 혼내며 잡아주었다고 한다. 또한 스스로도 슬럼프를 벗어나기 위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익히자 기량도 조금씩 늘었다고 한다.

2.8. 2014 시즌

슬럼프를 벗어나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시즌이다.

최은성이 플레잉 코치로 옮기면서 자연스레 권순태의 출장기회가 늘어났고, 주장 이동국에 이은 부주장에 선임되는 등 팀내 입지가 확실히 커졌다.

최은성이 은퇴한 7월 이후 FA컵과 리그 우승을 동시에 노리는 전북의 골대를 0점대 방어율로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본인도 인터뷰에서 "최은성 코치님을 만난 것이 내 골키퍼 인생의 중요한 터닝포인트"라고 언급할 정도로 많은 것을 배웠다는 듯. 최은성이 코치가 된 지금도 그를 코치가 아닌 형님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우승을 하게 되면 가장 먼저 트로피를 최은성에게 주고 싶다고 말했다. 손발이 부끄럽지만 그게 선수로서 최은성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은성옹께서도 "걔는 왜 자꾸 그런 소리를..."하며 겉으로는 타박하시지만 흐뭇함을 숨기지는 않으신다. 숨겨왔던

7월 23일 K리그 클래식 17라운드 울산 현대와의 경기에서는 이동국-김신욱의 공격 대결이 펼쳐질 것이라 예상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권순태와 김승규의 미친 선방쇼가 주목을 받았다. 두 정상급 골키퍼의 활약으로 경기 결과는 0-0 무승부.

게다가 10월부터 전북 현대의 8경기 무실점 연승기록을 이끌고 있을 정도로(중간에 부상으로 2주 결장하여, 개인기록으로는 6경기 연속 클린시트이다.) 기량이 매우 향상되어 K리그 최상급 골키퍼로 인정받고 있다. 최흐옹이 특별과외라도 해주셨나
11월 22일 수원과의 경기에서 1실점으로 연속기록은 멈췄지만 2:1로 역전승해 팀은 9경기 연승을 이어가고 있고, 권순태 역시 뛰어난 선방으로 MOM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주장 이동국이 결장한 스플릿 라운드 내내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을 지휘하며 차기 주장감으로서 가능성을 보여줬다.

2014년 38라운드의 최종기록은 34경기 출전 중 클린시트 18회(1위), 6경기 연속 클린시트, 경기당 실점율은 0.56(총 19실점)으로, '최고득점'이 자랑이던 전북에 '최소실점'이라는 명성을 더해주었다. 특히 실점율은 지금까지 최저기록이었던 0.57을 깼으며, 이 기록은 신인시절 권순태의 코치였던 최인영의 것이었기에 더욱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걸출한 골키퍼들의 활약이 돋보인 시즌이었지만,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베스트 GK상을 받은 건 권순태였다. 사실, 국가대표가 아니고 스포트라이트가 적은 골키퍼 포지션이어서 그렇지 역대급 시즌을 보내며 시즌 MVP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국대와 인연이 없어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진 못했지만이것마저 은성옹에게 배운 것인가, 이쯤이면 명실상부한 2014년 K리그 최고의 골키퍼라 할 만하다.

2.9. 2015 시즌

지난 시즌에 이어 부주장직을 연임한다.

4월 4일 K리그 클래식 4라운드 포항과의 경기가 전주성에서 있었는데, 막판 멋진 연속 선방으로 무실점 승리를 지켜내는데 공헌했다. 그리고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5월 16일 2015 AFC 챔피언스 리그 16강 2차전 베이징궈안과의 원정경기에서도 신들린듯한 미친 선방쇼를 보여주며 팀의 1:0 무실점 승리와 8강 진출에 에두, 이재성과 더불어 가장 크게 기여했다. 이날만큼은 전북의 해외진출 0순위가 이재성보다 권순태라는 평을 받았을 정도.

7월 17일의 K리그 올스타전에서 팀 슈틸리케의 골키퍼로 전반 45분 동안 뛰며 1실점을 기록했지만[2] 전반 17분과 전반 20분에 안정적으로 공을 잘 잡아내어 실점 위기를 막아내고 전반 23분에는 레오나르도의 강슛을 몸으로 막아내어 선방하는 등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8월 30일 성남과의 원정 경기에서 신들린 선방들을 보여주며 MOM에 선정되었다. 게다가 이 경기는 슈틸리케 감독이 관전한 경기였다!! 슈틸리케 감독에게 단단히 눈도장 찍었다. 2015년 8월말 현재 클린시트 10회로 K리그 클래식 1위이다.

9월말 기준 30경기에 출장해 28실점, 2파울, 3경고, 0퇴장, 경기당 평균실점 0.93점을 기록 중이다. 3선이 텅 비어버려 예년에 비해 폭망급인 팀 전술과 기복이 심한 경기력에 비해, 작년보다 더 말도 안되는 전북의 압도적인 전반기 승점 고공행진에 에두, 이재성 등과 함께 가장 큰 공헌 중이다. 2014년에 이어 2015년 K리그 클래식 베스트 GK상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 있으며 어이없는 실수만 나오지 않고 이 기량을 쭉 유지하면 수상 가능성 또한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팀의 경기력 탓에 14시즌과 같은 평균실점 기록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15년 8월 15일 열린 포항원정에서 전북 수비진들의 폭망 속에 미친 선방을 보여주었으나 결국 3실점하며 패했다. 4년만에 진출한 아챔 8강의 감바 원정에서도 팀의 일본원정 징크스를 해결 못하며 3실점. 다만 이런 경기에도 권순태의 책임이나 실수를 말하는 전북 지지자들이나 리그 팬들은 거의 없는 수준이다. 비판 받아도 팀 전술이 도마 위에 오를 정도. 수석코치님, 비교되십니다

이런 활약 등으로 인해 순태사르, 권순태헤아 같은 별명들도 생기긴 했다.[3]

12월 1일 베스트 일레븐 GK부문에서 후반기 들어 강력한 도전자로 나선 포항의 신화용을 큰 표차로 제치고 2년 연속 수상하는데 성공하였다. 경사났네 경사났어1

12월 6일 결혼식을 올리고 같은날 뒤이어 결혼식을 올린 같은 팀의 연예인 홍정남과 함께 품절남이 된다. 경사났네 경사났어2

2.10. 2016 시즌

전북에서의 11번째 시즌에 전북 10대 주장에 선임됐다. 골키퍼로서 최초의 전북 주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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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종료 후 최강희 감독이 직접 권순태의 이적을 허용했다고 밝혔다.#

전북 통산 336경기 358실점 109 클린시트를 기록했다.

3. 가시마 앤틀러스

일본 J1리그의 챔피언 가시마 앤틀러스로 이적했다. 등번호는 1번. 계약 기간 3년이라고 한다.

3.1. 2017 시즌

초반에 주전으로 맹활약했으나 부상과 감독 교체 이후로 노장 골키퍼 소가하타 히토시에게 주전을 빼앗겼다.

3.2. 2018 시즌

가시마에 그대로 잔류해서 주전 보장을 약속 받았나 했더니 상하이 선화와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도 벤치에 머물렀다. 2018년에도 주전은 불투명한 상황.

ACL 두번째 경기 수원 삼성과의 원정 경기에서 오랜만에 선발출장하며 데얀 다미아노비치의 페널티킥을 막고 수차례 안정감을 보여줬다. 팀은 1-2로 승리.

J1리그개막전 시미즈 S펄스와의 원정경기에서도 선발출장하며 pk를 연속2경기 선방하면서 0대0 무승부에 기여했다. 가시마의 인스타에서는 이틀연속 권순태의 독사진이 올라왔고 주전으로 점점 자리를 굳혀가는중. 이날 가시마가 엄청나게 부진하면서 MOM까지 선정됐다. 그리고 살이 많이 빠진 모습을 보여주면서 반응속도가 좋아졌다.

2라운드 감바 오사카와의 홈경기에서도 주전으로 출장하며 다시 주전으로 복귀했다. 이 경기에서도 무실점을 기록하며 팀은 1-0승리.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소가하타 히토시가 출전하지만 리그에서는 계속 주전으로 나오고 있다. 특히 4라운드 사간 도스전에서 맹활약을 보여주면서 지난시즌의 부진을 완벽히 날려버렸다. 현재의 폼이라면 챔피언스리그에서도 토너먼트부터는 주전으로 뛰게될 수도 있을듯.

최근에는 팀이 부진하며 실점이 많아지고 있는데 수비수들이 정신들 못차리고 있는게 가장 큰 이유지만 권순태의 폼도 예전같진 못하다.

이후 리그에서 가와사키에게 4실점, 요코하마에 3실점을 하면서 결국 소가하타 히토시에게 또 밀렸다. 벤치로 밀린 나가사키와의 경기에서 팀이 승리를 거두면서 우라와와의 다음경기에서도 벤치멤버행. 이 경기에서 소가하타가 무실점으로 활약했고 팀 또한 승리를 거두며 저번시즌처럼 벤치행이 현실화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리그 2연전이 휴식이었는지 상하이 상강과의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서 미친 선방을 보여주며 팀의 8강 진출에 공헌했다. 특히 상하이로 원정을 갔던 2차전에서는 pk포함 2골을 먹혔음에도 MOM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선방을 보여줬다. 이 경기에서 그동안 소가하타를 지지하던 팬들의 마음까지도 돌려놓았고 그동안의 맘고생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4]

아챔 4강 1차전에서도 선발로 나섰는데 당시 상대였던 수원삼성 임상협에게 박치기를 해 논란을 일으켰다. 해당 장면

2018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10경기에 출전하며, 주전 골키퍼로써 ACL 우승에 기여하였다. 본인 커리어 통산 3번째 ACL 우승을 달성하였다.[5]

그리고, 클럽 월드컵에서 레알 마드리드 공격진의 무수한 슛팅을 온 몸으로 막아내었다.

3.3. 2019 시즌

J리그에서 30경기를 출전하며 꾸준히 가시마 앤틀러스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였다. 2019 AFC 챔피언스리그에서도 11경기를 출전하며, 팀의 8강 진출에 기여하였다.

3.4. 2020 시즌

2020년 시즌부터 출전 경기 수가 급격히 줄었다. 리그에서 단 7경기만 출전하였으며, 팀 내 1999년 생의 오키 유야(Yuya Oki)가 사실상 주전 골키퍼로 출전하였다. 팀은 5위로 2021년 AFC 챔피언스 리그에 참가하지 못하게되었다.

3.5. 2021 시즌

2020년 8월 경기부터 가시마 앤틀러스의 모든 경기에 주전 골키퍼로 오키 유야(Yuya Oki)가 중용되는 만큼, 2021 시즌 팀 내의 입지도 상당히 불안정한 상황에 놓였고, J1리그 개막전과 J리그컵 첫 경기에도 모두 명단제외 되었다.

비록 경기에 많이 뛰지는 않았지만 자신과의 경쟁에서 이긴 어린 주전 골키퍼들에게 아낌없이 노하우를 전수해주었다고 하며, 21시즌 리그 7경기 출장을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 가시마와 1년 재계약을 채결했다.

3.6. 2022 시즌

2022년 시즌에는 가시마에 스위스 출신 레네 웨일러 감독이 지휘봉을 잡게 되면서 팀 내 상황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현재 13라운드까지 전경기 풀타임을 소화하면서 주전 골키퍼로 다시금 중용받고 있다.

시즌이 끝나고 11월 3일 가시마하고 1년 재계약을 한다는 단독 보도가 나왔다.

2022년 12월 22일, 전주월드컵경기장을 찾아 여러 일정과 코로나19 등의 영향으로 그동안 수령하지 못했던 2016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 반지를 받았다. 링크

3.7. 2023 시즌

2023 시즌에는 한 경기도 나서지 못했다.

가시마 통산 164경기 176실점 57클린시트를 기록했다.


2023년 12월 3일 요코하마 FC와의 마지막 홈경기 이후 은퇴식을 통해 은퇴했다. 가시마 앤틀러스 구단 측에서 은퇴식을 꽤나 크게 열어주며 구단에 헌신했던 외국인 선수에 대한 예우를 각별하게 했다. ACL 우승을 이끈 골키퍼이자 2010년대 후반 가시마의 전성기의 한 축이였으며 외국인 선수임에도 후보로 밀려났을 때 젊은 선수들에게 경험을 전수하고 훈련을 돕는 등 구단에 순수하게 충성하는 모습에 팬들에게 상당히 좋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권순태는 축구 선수의 길을 끝마치고 인생의 제2막을 열게 됐다.

[1] 전북은 GK 코치로 무려 최인영을 가지고 있었으나 최강희흑역사국대 감독을 하고 돌아온 후, 선수단 관리 실패를 이유로 대부분의 코치진들이 물러나게 되면서 최인영도 2013년 10월 계약 종료로 나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벤치 멤버였던 권순태는 하프 타임 때 필드플레이어와 함께 몸을 풀거나 구석에서 혼자 놀았다. 2014 시즌에는 최은성이 플레잉 코치가 된 데다 아예 본인이 주전이 되었으니......[2] 권순태를 상대로 골을 기록한 선수는 레오나르도[3] 다만 공식 별명은 아니어서 이렇게 검색해서 리다이렉트로 이 문서에 들어올 수는 없다.[4] 사실 한국팬들 입장에선 들어보지도 못한 79년생 골키퍼에게 대우가 밀리는게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소가하타 히토시는 출신지도 가시마가 위치한 이바라키현인데다가 98년 프로 데뷔이후 가시마 한팀에서만 뛰어왔으며 실력또한 오랜기간 주전으로 활약한 뛰어난 선수였고 현재에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팀이나 팬들에게는 특별한 선수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후보 GK들이 떨어져서 부담이 덜한 다른 J리그 팀들의 한국인 골키퍼들과는 다르게 권순태가 느꼈을 압박감은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5] 권순태는 2006년, 2016년 전북 현대에서 이미 2번의 ACL 우승을 경험하였다. 총 3회로 ACL 우승을 가장 많이 경험한 선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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