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광하이텍 대표이사. 끝내주는 학벌. 엄청난 집안. 완벽한 스타일링이 배합된 그럴싸한 외모. 성격까지 받쳐주니 도저히 여자가 안 붙을 래야, 안 붙을 수가 없다. 오는 여자 마다치 않고, 가는 여자 고이 보내준다. 중요한 건, 지금 눈앞에 나타난 신입 비서가 첫사랑과 닮았다는 사실.
스무 살, 한창 뜨겁던 나이, 사랑에 목숨 걸던 시절에 찬미와 인연이 있다. 과외 교사였던 백찬미를 뜨겁게 짝사랑했었고, 대 차게 까였다. 그때의 기억을 가슴 아픈 추억으로 묻고 고이 간직하고 살았는데..
첫사랑과 똑 닮은 여자를 경력직 사원 수시채용 면접장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한데 이름도 틀리고, 나이도 틀린. 얼굴만 똑같은 여자란다. 수상한 여비서는 새우 눈초리로 감시하듯 쳐다보는 건 기본, 아무도 없는 본인 사무실에서 몰래 기어 나오질 않나, 굳이 주말까지 꾸역꾸역 출근해 회사 기밀을 캐묻고 다닌다.
학창 시절에 학교 폭력 피해자로 떠밀리듯 자퇴해 검정고시 패스, 남들보다 조금 일찍 대학에 들어갔다. 긴 시간 묵묵히 공무원 시험에 올인 했고, 천신만고 끝에 붙었다.
하필, 많고 많은 국가직 중 국정원에.. 지옥의 훈련이 끝날 땐, 수석 요원이었던 동기생 권민석과 연인이 되었고, 아이를 낳기 전, 민석은 현장에서 사망했다.
겨우 20대에 싱글 맘이 된 이후, 자진해서 데스크만 전전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선 현장과 최대한 멀어져야만 했으니까. 4대 보험 되는 안정된 직장, 따박 따박 거르지 않고 나오는 월급. 퇴직 후 공무원 연금까지. 예은이 바라던 삶이었다. 현장 요원으로 차출 되기 전까지는..
일광하이텍 인턴사원으로 어렵사리 잠입하며, 아이를 키우면서 정신없이 지나쳤던 신입의 악몽이 차츰 되살아난다. 콩알 만 한 간으로 녹취 따기, 염탐하기, 문서 빼돌리기를 하려니 하루에도 열두 번씩 심장이 솟구쳤다, 바닥 쳤다 난리도 아니다.
실수 연발에 사고 만발로 인턴 기간도 못 채우고 잘리기 직전, 회사 밥솥 모델이자 인기 톱 스타 강우원의 전담 마크로 배정 받는다.
남편도 모르고 딸도 모른다. 그녀가 정부 요원, 그것도 블랙 스파이라는 사실을. 하나 뿐인 딸내미는 ‘엄마랑 말이 안 통한다’며 대화 거부. 평범한 회사원인 남편은 ‘아줌마가 뭘 아냐’며 타박 하기 일쑤. 내 이것들을 확 그냥-! 삼단 옆차기로 날려 깔아뭉개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뭐, 회사에 출근해서도 그다지.. 다를 건 없다. 십 수년 전, 현장에서 날고 기던 블랙 요원 황미순은 국제 대 테러 대응 팀에서 1,200원 짜리 영수증에 목숨 거는 잡무 요원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권고 퇴직의 압박에도 꿋꿋이 버티는 중이다.
당장 때려치우면... 대출금 이자에, 딸내미 학원비는 어쩌라고? 더는 현장에 나설 일은
없을 거라 철석같이 믿고.. 37.26.38 핫바디를 43.34.45 헉바디로 풀어 재낀지 한참 전인데. 오~ 마이 갓! 관절염과 요통으로 계단이 제일 겁나는 나이에 현장 잠입을 하라니... 당장 사표 쓰고 나가라는 무언의 압박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