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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5:27:56

광주의 난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곽마
, 오멸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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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난
廣州之亂
시기 279년
장소 광주(廣州) 일대(현 광둥성)
원인 손호의 폭정[1]으로 인한 남방 지방의 반란
교전 곽마군 오(吳)
지휘관 곽마(도독, 교·광 2주제군사, 안남장군)[자칭] 손호
장수 은흥(광주자사)[자칭]
오술(남해태수)[자칭]
하전
왕족
우수(광주독)
왕저[5]
왕연[6]
유략(남해태수)
서기(광주자사)
등수(진남장군·광주목·가절)
도준(서릉독)[7]
도황(교주목·전장군·교주목도독교주제군사)[8]
병력 불명 -등수군: 10,000명
-도준&도황의 지원군: 7,000명
-현지의 관군+@
피해 불명 불명
결과 곽마의 반란 진압 실패
영향 손오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
1. 개요2. 발단: 수윤의 죽음과 손호의 폭정3. 곽마의 난4. 결과 및 영향

[clearfix]

1. 개요

279년에 오나라의 합포태수 수윤 휘하의 사병대장이었던 곽마가 광주지역에서 오나라를 상대로 일으킨 반란. 때문에 '곽마의 난'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 발단: 수윤의 죽음과 손호의 폭정

당초에 곽마는 수윤의 부하였다. 수윤이 죽자, 오나라 법에 의해 휘하의 군대가 흩어져야만 했기에 오랜 시간에 걸쳐 곽마와 정을 쌓은 군사들은 슬퍼하였다. 그러나 눈치 없게 손호는 광주의 호구를 면밀히 조사해서 조세를 확실하게 부과하려 했다. 이는 광주의 백성들을 착취하겠다는 의도였으므로 곽마를 비록한 광주의 민심은 분노로 들끓게 된다.

3. 곽마의 난

분노한 곽마는 부장인 하전, 왕족, 오술, 은흥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오나라에 대항했다. 당시 광주독(廣州督)은 우수(虞授)라는 인물이었는데, 우번과 같은 회계 우(虞)씨였다. 곽마는 광주독 우수를 공격해 죽이고, 당대의 명사였던 왕저&왕연 형제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주살한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도독(都督), 교·광 2주제군사(交廣二州諸軍事), 안남장군(安南將軍)을 자칭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휘하의 은흥을 광주자사에, 오술은 남해태수에 멋대로 임명한 뒤, 하전에게는 창오군을 공격하게 하고, 왕족에게는 시흥군을 공격하도록 한다.

손호등수를 진남장군·광주목에 임명하고 가절을 내리며 1만의 군사를 주어 반란을 진압하게 했지만, 등수는 시흥에서 왕족에게 막혀 나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오나라 조정에서 보낸 중앙군조차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남해태수 유략은 반란군에게 패해 사망하고, 광주자사 서기는 축출되고 만다.

결국 도준·도황 형제에게 병사 7천 명을 주어 반란 진압을 지원케 했다. 그러나 도준이 무창에 이르렀을 때, 진나라가 오나라를 침공한다는 소식에 도준은 끝내 남방으로 향할 수 없었다.

오나라가 서진에 멸망당한 이후, 곽마를 비롯한 반란군들의 행적은 사서에 나타나지 않아, 이후의 일은 알 수 없다.

4. 결과 및 영향

이로써 오나라는 멸망하겠구나!
손호

당초에 '오나라가 멸망할 때 남방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는데, 손호 역시 이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곽마의 난에 대해 손호는 "이로써 오는 멸망하는구나." 라고 한탄했다고 하니, 이는 반란의 규모가 심상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오나라 중앙군인 등수의 군대가 듣보잡인 장수 왕족에게 막힌다거나, 현지 오나라 관리 및 관군들[9]이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갔던 것을 보더라도 단순히 변방 사병대장의 반란이라고 보기 힘든 수준이다. 곽마와 왕족 등 반란군 지휘관들의 능력이 특출났다거나, 오나라 지휘관들의 역량이 심히 부족했고 볼 수도 있으나, 결정적으로 광주 전체의 민심이 돌아섰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10] 결국 반란은 오나라 멸망때까지 진압에 실패했고, 이는 직접적인 오나라 멸망의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실제로 육손의 손자이자, 육항의 4남인 육기가 지은 《변망론》에서도 태강 전투와 광주의 난을 오나라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광주의 난은 오나라 멸망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주목 받지는 못하는 사건이다. 촉한 멸망 이후 삼국의 균형이 깨진 시기인데다가 변방 중에서도 변방인 지역에서 터진 일이라 인지도가 없어 다루는 작품도 거의 없고, 삼국지 후반부를 자세히 다루는 작품들조차도 지나가듯이 설명하는 수준으로 시공간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하다못해 이 난이 어떻게 끝났는지 기록도 없는데다, 바로 직후의 사건이 오나라 멸망과 서진의 완전 통일이기 때문에 이에 완전히 묻혀버리고 끝난다.
[1] 이 폭정이라 함은 광주의 호구를 면밀히 조사해서 조세를 확실하게 부과하려던 시도를 말한다. 광주 일대에 조세를 부과한다는 것은 곧 광주인들을 착취하겠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다. 각종 복지정책으로 국민들이 낸 세금을 되돌려주는 현대의 복지국가와는 달리, 그런 개념도 없고 그럴 능력도 후달리는 전근대 시대에서는 세금을 많이·자주 거둔다는 것이 학정의 상징이었다. 이 문제 때문에 동양권에서는 성군들조차 호구조사를 자주 시행하는 것을 꺼렸다.[자칭] [자칭] [자칭] [5] 곽마에게 주살당함[6] 곽마에게 주살당함[7] 중도 퇴각[8] 중도 퇴각[9] 우수, 유략, 서기 등[10] 진나라 최후의 명장 장한 역시 한 때는 중원의 반란군들을 박살내고 다닐 정도로 싸움을 잘 했던 명장이지만, 신안대학살로 크게 민심을 잃어 진나라 사람들에게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상태에서 옹왕에 임명되어 유방과 싸웠을 때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전쟁에서 민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내부에서는 주민들이 배신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고, 백성들이 적에게 협조 및 물자 제공, 심지어는 자원입대까지 하는 상황이 닥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