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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6-07-20 16:59:32

광개토대왕/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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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의 광개토대왕2. 야사3. 기타 학설
3.1. 기년 수정론3.2. 유사역사학

1. 오늘날의 광개토대왕


이 단락은 길기 때문에 따로 항목 분리한다. 자세한 내용은 이 항목을 참고한다.

2. 야사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야사도 전해지는 것들이 있다. 물론 거의 출처불명이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종종 정사인것마냥 소개되고 있다는건데 요즘은 예전에 비하여 한국 고대사가 많이 정립되면서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검열이 허술한(?) 상대적으로 학술적 접근이 관철되지 못한 동화책에는 이런 내용이 넘처나고 있다. 사실 동화 작가들이 지어낸게 설화마냥 퍼저나간 것들도 있을 것이다. 가장 유명한 설화로는 광개토대왕이 여자때문에 싸움이 난 두 마을을 화해시켜줬다는 이야기등이 있다.

야사라고 하기엔 민망하지만 《환단고기》에도 짤막하게나마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부분이 나오는데 의외로 중원을 호령하고 어쩌고 하는 이상한 내용은 없다. 그냥 정사로 통용되는 정복전쟁에 자잘한 과장과 미사여구를 덧붙인 수준... 그것도 중국계인 후연이나 만주 대륙의 국가들과의 싸움은 없고 왜와 연결되어있는 한반도를 공격하는 내용인데...

당시 시대상이 일제강점기였음을 생각해보면 《환단고기》 저자의 친일혐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어느정도 시대상을 잘 반영했다.참고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광개토호열제라는 이름으로 나와있다. 야사나 다름없는 《조선상고사》에도 대륙으로의 진출(?)보단 왜와의 격돌에 비중을 두고있다.

그리고 《화랑세기》의 저자로 유명한 박창화가 남긴 고구려사초라는 책의 영락대제기도 광개토대왕의 치세를 다루고 있는데 자잘한 내정기록,왕실비사등을 제외하면 새로운 내용은 별로 없고 정사로 통용되는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정복전쟁과 관련해서는 탐라(제주도)가 항복했다는것 말고는 새로운게 거의 없는데, 『광개토대왕릉비』나 《삼국사기》같은 정사로 통용되는 사료의 기록을 살짝 비틀어놓거나 전투기록 한줄 더 추가한게 전부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탐라가 항복했다는 내용과 거란과의 전투 기록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기존의 사료에 존재하는 내용들이다. (토욕혼을 정벌했다는 내용도 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대에 활동했던 것이 확실한 진이나 모두루가 고구려사초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의 소설일 가능성도 높아진다. 진, 모두루 모두 박창화 사후에 확인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3. 기타 학설


비려의 위치나 정체에 대해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몽골유연이라고 했으나 근거 자체가 해괴하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부산 밑에 와룡이 있었는데 와룡이 유연의 별칭인 유유와 발음이 비슷(?)하니 와려(비려)는 유연인것 같다...' 라는게 근거다.[1] 신채호가 해괴한 추론을 가끔 하기는 하지만 이건 매우 극악한 편에 속한다. 당시 유연은 나름대로 성장하고 있던데가 유연과 고구려 사이를 '고구려도 쩔쩔매는 후연을 처바르는 북위' 가 가로막고 있던지라 말도 안된다.;; 아니, 거란이 선비의 후예라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현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시라무렌강 상류에 위치한 세력으로 보고 있다. 훗날 비려가 거란의 일원이 된 것으로 보곤한다. 한 편 진서 동이전에 나오는 만주 중앙에 위치한 비리국이라는 설도 있고 중국 학계에서는 요동의 태자하 상류의 세력으로 보기도 하며 소수맥이라는 주장도 있다. 헌데 태자하 상류설이 말이 안되는게 광개토대왕이 비려를 격파하고 돌아오며 태자하를 거첬으므로 성립하기 어렵다. 더구나 소수맥은 수백년전인 유리왕때 격파되고 이후로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이때 토벌한 비려는 391년 토벌한 거란과 같은 존재로 보기도 한다. 광개토대왕비문에 광개토대왕때 상대한 적들은 모두 기재했다는 가설에 의하면 거란이라고 빠뜨렸을리는 없으니 아마도 비려는 거란과 같은 존재일수도 있겠다. 더구나 비려는 광개토대왕비문의 기로에 의하면 거란이 위치해있던 곳에 있었으니...

다만 이걸 딱히 실증할만한 또렷한 결정적인 근거는 없다. 주요 근거는 비려와 거란의 위치가 비슷한것같고 거란의 부족중에 필혈부가 있었는데 비려와 발음이 비슷하다는것. 위서에는 필혈부라고도 읽는 필결부(匹絜部)·려부(黎部), 통전에는 필려부(匹黎部), 북사에는 다시 필결부(匹潔部)·려부(黎部)라고 적혀 있는데[2], 근데 이건 아예 당시부터 물길의 필려이국과 헷갈리고 있었으니(...) 더구나 발음이 비슷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리스크가 매우 크다. 당장 고구려를 의미하는 무구리와 말갈만 해도 발음이 비슷한데 완전히 남남인 것을 보면. 발음이 비슷한데 남남인 경우가 매우 흔하다.

비려와의 전쟁터였던 부산,염수등의 위치를 고증하면 대강 실마리가 잡히겠으나 그마저도 힘든게 현실. 염수가 고유명사일수도 있고 소금이 많이나서 붙은 이름일수도 있는데 만주지방에 소금이 나는곳이 한둘인가... 부산같은 경우도 고유명사라는 해석이 있는가하면 고구려인들이 이름모르는 산을 아무개라고 부르거나 큰 산이라고 부른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쨋든 비려는 고구려 국경에 근접한 거란을 먼저 토벌한 점이나 광개토대왕비문에 장거리 원정이 있던것마냥 기술한 점으로 보아 거란보다 서쪽의 내몽고 어딘가였던것 같다.
아니면 진서 동이전에 기술되어 있는 비리국일수도 있는데, 진서가 광개토대왕 시기를 기록하고 있고(이상한건 정작 고구려는 없다.) 진서 동이전에서 서술하는 비리국의 위치가 광개토대왕비문의 비려처럼 고구려의 북쪽 어딘가이기 때문에 비리국일 가능성도 무시할수 없다. 또한 비리국이 광개토다왕 시기인 진서 동이전에만 잠깐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도 묘하다. 광개토대왕대에 고구려에게 먹혀서 이후로 등장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뭐 학계에서는 이 주장이 사장되긴 했다만...

비려의 인구는 35만 정도로 추정된다.[3] 기껏 3개 부락 격파했는데 어떻게 35만이라는 숫자가 나온지 의아할수 있는데, 부락이라는 단위는 고정된 수치를 갖고있는게 아니라 쓰일때마다 다르다. 마을 하나를 부락으로 칭할수도 있고 부족 하나를 부락으로 칭할수도 있다.

근데 이것도 비문의 판독에 따라 부락이 아니라 부(부족)으로 판독할수도 있어서... 참 애매하다. 3개 부의 의미를 부족이나 부락 3개를 격파했다는게 아니라, 거란족이 스스로를 칭할때 관용적으로 쓰는 3개 부라는 의미로 해석한 연구결과도 있다. 하지만 그건 훨씬 후대의 일이라...

영락 6년에 점령한 58성 700촌은 대강 현재의 강원도, 충청북도와 경기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이다. 58성 700촌의 위치 비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데 일각에서는 충청남도까지 남하한걸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이 비류백제설로 이어지곤 하니 문제.

3.1. 기년 수정론

17세 후손 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2·9에 등극하니 부르길 영락태왕이라 ……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 39세에 나라를 버리고 돌아가셨다. - 호태왕비문

광개토대왕의 탄생년도에 대해서는 능비를 통해 추론할 수 있으나, 《삼국사기》와 1년의 차이가 있고 또 사망연대와 맞춰 볼 때도 의아한 점이 있어 학계에 이론이 있다. 학계의 중론은 대체로 374년인 듯하나, 375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능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18세 되던 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설은 즉위년에 대한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광개토대왕은 392년에 즉위한 것이 되는데, 연표에 따르면 이 해는 바로 임진년이다. 그런데 능비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을 신묘년이라 하고 있다. '영락 5년 을미(395)', '영락 6년 병신(396)' 등으로 정벌 기록마다 확인이 되고, 덕흥리 고분 등에서 교차검증도 되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주류 학계에서는 능비문에 《삼국사기》를 맞추어 《삼국사기》의 기록을 한 해 앞당김으로서 광개토대왕이 신묘년 즉 391년에 즉위한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즉위년만 앞당기게 되면 광개토대왕의 재위년 자체가 23년으로 40세에 사망한 것이 되어 《삼국사기》 본래의 기록은 물론이고 능비와도 그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되며#, 혹시 전체 재위년을 한 해씩 당겨서 391년 즉위해 412년 사망한 것으로 한다면 중국 사서와 교차 검증되는 《삼국사기》의 연표 자체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문제점이 생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일각에서 '사서의 연도에 능비의 간지(干支)를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도 한국 고대사에서 유일하게 잘 정리된 연표의 간지를 무시하고 연대를 끼워맞춰야 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양 사료 간에 미묘하게 일치하는 부분도 있는데다가 앞서 수정론의 오류에 비추어 볼 때 무시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 알아서 판단하자 차후의 연구를 기대한다.

이상의 문제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능비의 '신라 구원 요청(9년 기해)-신라 구원군 파견(10년 경자)'에 비정되는 사기의 '신라 내구마 울음(9년 경자)-실성 귀환(10년 신축)'를 굵은 글씨에 주목하며 비교해보자.

3.2. 유사역사학

민족을 숭배하는 한국의 유사역사학과 엮이기 좋은 소재이다보니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유사역사학적인 주장들도 많다.

광개토대왕이 죽고나서 아틸라가 등장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이 유럽으로 건너가서 아틸라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틸라는 선대의 계보가 명확해서 당연히 말이 안되는 소리다. 인지도는 후달리지만 한국판 요시츠네=징기스칸설이랄까...

광개토대왕비문에 등장하는 '식신토곡'이라는 세력명에서 토곡만 떼와서 토곡이 토욕혼과 발음이 유사하여 광개토대왕이 토욕혼을 정벌했다는 주장도 있다. 식신토곡이라는 말은 식신땅의 곡이라는 의미지 토곡자체가 어떤 세력명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더구나 당시 토욕혼은 백란이라 국호를 바꾸었다. 토욕혼이 고구려의 웬수인 모용씨의 나라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어느정도 그럴싸하기도 한데 환빠들은 토곡=토욕혼 주장을 할때 이런 근거는 들지 않는다. 식신토곡이라는 세력명은 판독자에 따라 백신토곡도 되는데 신자를 어거지로 란자로 판독해서 백란정벌설을 내세우면 꽤나 그럴싸한데 아직까지 그런 괴인은 안보인다.

398년 북위의 수도 업에 고구려인 46만과 기술자 10만이 가득차서 수도를 평성으로 옮겼는데 사실은 고구려가 북위 수도 업을 함락해서 북위가 불가피하게 수도를 평성으로 옮긴거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다. 사료에서 확인되는 고구려와 북위의 최초 접촉은 장수왕때다. 둘다 공동의 적으로 후연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굳이 동맹을 맺을만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지도 않았고(서로 눈치보면서 후연을 공격하는 수준) 국경이 닿아있지 않은 관계로 직접적으로 접촉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후연과 백제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고구려가 무슨 수로 북위까지 처리할까? 과장일 여지가 있지만 북위가 후연을 칠때 기병 40만을 동원했는데 겨우 5만 보기를 박박 긁어모으고도 병력이 없어 후방을 털렸던 고구려다.
[1] 원문 : #[2] 애시당초 ㄱ(ㅋ)음과 ㅎ음이 유사한 거야 주지의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몽골어의 칸과 여진어의 한이 있고, 오랑캐 즉 우랑카이는 중국에서 우랑하이라 불렀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올량합(兀良哈)으로 적혀있다.[3]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