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부정행위 속옷 협대. 부정행위를 막아보겠다고, 청대에는 모든 과거 응시생을 독방에 집어넣고 가둬서 시험을 쳤다. 그래서 나온 것이 속옷을 커닝페이퍼로 활용한 협대이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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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과거 제도의 부정행위를 다룬 문서. 오늘날의 시험과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 과거 제도에도 수많은 부정행위들이 존재했다.2. 수법
수법은 아래와 같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아래 언급된 부정행위들은 모두 실제 저질렀던 것들이며, 숙종시기 언급된 대표적인 과거의 폐단인 과거 팔폐(科擧八弊)를 강조해서 작성했지만 실제로는 더 막장인 경우도 많았다. 참고로 조선시대 구한말 때는 이런 행위를 감인고(堪忍苦)라고 했으며 이런 폐단은 KBS 스펀지 79회 방송분에서도 소개되었다.- 고반(顧盼): 고개를 돌려서 옆의 답안지 베끼기. 부정행위의 기본중의 기본.
- 낙지(落地): 답안지를 일부러 땅에 떨어뜨려서 다른 사람을 보게 하는 것. 응시자 사이에 이루어지기도 하고, 매수된 시험관이 행하기도 한다.
- 설화(說話): 옆사람과 의견을 나누어서 답을 작성하는 것.
- 수종협책(隨從挾冊): 커닝 페이퍼. 커닝의 기본인 커닝 페이퍼는 과거의 역사와 함께 했다. 수종협책은 책 자체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말하지만, 콧구멍 속에 숨기는 의영고(義盈庫), 붓 속에 숨기는 협서(狹書) 등 다양하게 존재했다. 상술했듯 각각 방안에 집어넣어서 시험을 쳤던 청나라 시대에는 커닝페이퍼 속옷까지 등장했다.
- 암표(暗標): 응시자가 시험관과 미리 정해놓은 표시를 시험지에 해서 자신을 알리는 방법. 답안지에 적힌 응시자의 이름은 합격여부가 밝혀진 뒤에나 시험관들이 볼 수 있었기에 만들어진 방식이다. 시험관을 매수했다면 반드시 나오는 방법 중 하나다. 이 암표와 필적을 통한 부정 행위를 막기 위해서 서리들이 모든 시험지를 다시 작성해서 시험관이 검사하게 하는 과장역서법(科場易書法)이 고려말부터 시행되었다. 물론 촉박한 시간에 대량의 문서를 수필로 다시 작성해야 하며, 서리를 매수하는 등의 문제점이 있는 등 과정역서법 자체는 폐단이 많아서 폐지가 검토되었지만 결국 과거가 없어지는 고종시기까지 꾸준히 행해졌으므로 암표는 그리 흔하게 행하지는 않았다.
전하는 얘기에는 홍국영이 이 수법으로 과거에 합격했다고 한다. 한 대갓집 하인을 매수해 그 집안의 편지를 모조리 손에 넣어 샅샅이 살펴본다. 찾고보니 그 집 사위가 곧 과거를 보는데 장인이 사위를 위해 시험관과 짜고 답안지에 사위가 이름을 쓸때 옆에 작게 동그라미를 그리면 그 사람이 자기 사위니 합격시켜달라는 얘기였다. 홍국영은 이 수법대로 자기도 똑같이 따라해 합격한다. - 외장서입(外場書入): 시험지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 말 그대로 외부와 짜고 모범 답안지가 과거장 안으로 들어온 경우도 있는데 이를 대술(代述)이라고 하며, 이를 위해서 대나무 관을 사전에 매설한 방법을 시도했다가 들통난 경우가 숙종실록에 실려있다. 응시자가 밖에 나가서 답안지를 작성한 후 다시 들어와서 제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 정도 되면 말그대로 명문가문으로 시험관 등의 전체 매수는 기본이다.
- 음아(吟哦): 서로 짠 옆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웅얼거려서 말해주는 방법. 앞서 언급된 설화와 다른 점은 설화가 두 사람이 서로 나누는 대화라면, 이쪽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떠드는 독백형식이라는 것이다. 즉, 설화는 A↔B, 음아는 A→B 형식이다. 때문에 옆 사람에게 답을 알려주는 용도부터 시작해서, 라이벌 방해목적까지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 이석(移席): 자리 옮기기. 시험치는 도중에 차를 마시러 가거나 화장실을 가는 등의 이유로 한 번 자리를 뜰 수 있었는데 그걸 이용한 방법이다. 작게는 매수한 사람 근처로 옮기는 것부터, 크게는 다른 사람과 자리 바꿔치는 용도로 이용되었다.
- 이졸환면출입(吏卒換面出入): 시험장을 경비하는 이졸을 미리 매수한 사람으로 교체해서 하는 부정행위.
- 입문유린(入門蹂躪): 과거 시험장에 응시자가 아닌 사람이 출입하는 것. 잡상인 등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대상은 한 명을 위한 태스크 포스 팀을 가리킨다. 명문대가 정도 되면 일개 중대에서 대대규모가 움직였다. 다른 부정행위의 기본이 되는 부정행위.
- 자축자의환롱(字軸恣意幻弄): 시험지에 장난을 친 다음, 그 답안지를 이리 저리 손봐서 합격하는 행위. 부정행위라기 보다는 이미 과거제도를 엿먹이는 문제점 그 자체다.
나쁜 예로는 잔존 소론의 박멸을 불러일으킨 심정연의 시험지 역모 사건이 있다. 한편 장난괴수로 유명한 이문원은 시험지에 딱 세글자, 臣不文(신은 글을 모릅니다)를 냈는데, 마침 그때 영조가 친람한 과거였다. 영조가 보기에 답안지에 몇자 휙쓰고 가버리니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괘씸해 답안지를 가져와 보니 저 세글자만 달랑 써있어 대노했다. 당연히 시험장은 발칵 뒤집혔다. 어명으로 신원을 밝히기 위해 비봉을 떼는 바람에(당시 시험 답안지에는 자기 이름과 4대조 이름을 기입해야했고 지금의 포스트잇처럼 이 부분은 비봉이라 하여 살짝 붙여놓고 응시자가 과거 합격했을 때만 떼어내야했다.) 이문원은 과거합격자와 같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더욱이 이문원의 부친(실제로는 양부) 이천보가 생전에 영조가 아끼던 신하였고, 본인이 사도세자 보호에 힘쓰다가 사망해 영조가 그에 대한 부채감이 컸던 탓에 영조의 분노가 녹아 버려, 되려 이문원은 칭찬을 받고 과거에 합격했다. 물론 이 얘기는 그냥 야담이고, 실제로는 음서로 진출했다가 다시 과거를 봐 병과에 합격에 관직을 시작했다. - 절과(竊科): 합격자의 답안지에서 이름 부분만 미리 정해진 사람과 바꿔붙인다. 이 경우는 부정행위를 하지 않은 합격자 하나가 확실하게 떨어진다. 기본적으로 시간차 부정행위이기 때문에 일정시기까지는 답안지 자체를 제출하지 못하게 하기도 하고, 허락을 받고 제출하게 하기도 하였으나 뒤에 기술하는 선착순의 문제 때문에 흐지부지되어서 결국 꾸준히 문제시 되었다.
- 정권분답(呈券分遝): 시험지 바꿔치기. 옆사람과 바꾸면 환권(換券)이라고 한다.
- 차술차작(借述借作): 다른 사람의 글을 빌려 쓰는 것. 넓게는 대리시험까지 포함하지만, 좁게는 여러 사람을 미리 데리고 들어간 다음에 각각 답안지를 작성하게 하고 그중에서 잘 된 것을 답안지로 제출한다.
- 혁제(赫蹄): 시험관 매수. 부정행위 가운데에는 이것을 기본 전제로 하는 것도 많았다.
- 혁제공행(赫蹄公行): 과거 제목을 미리 아는 것. 시험관 매수인 혁제를 배경으로 하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부정행위가 이뤄지는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중간단계의 부정행위.
- 시험지 빨리 내기: 역시 조선 후기에 성행한 방법으로, 응시자수의 증가로 채점할 시간이 부족해지자 채점을 대충대충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긴 방법이다. 날이 갈수록 응시자수가 폭증해서 첫 줄만 읽고 대충 채점하거나 아예 선착순으로 하는 일이 생겨났다. 게다가 선착순의 숫자도 대충 300명 선에서 끊어졌는데, 응시자 숫자는 많으면 만 명 단위였다. 이건 과거 합격자가 당일에 발표되었는데, 시험관의 숫자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즉일방방(卽日放榜)이라 해서 국어사전에도 실려 있는 단어다. 따라서 시험지를 빨리 내지 못하면 아예 채점도 받지 못하므로 필사적으로 시험지를 빨리 제출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자리잡기, 제출과정의 몸싸움으로 인한 선접군이라는 전문 싸움꾼의 등장 등 폐단이 많았다.
- 답안지 훔치기: 나중에는 아예 시험장을 습격(해서 시험관을 구타)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세도가들의 경우에는 아예 답이 주어져 있었고, 답안을 제출하는 방식도 집에 가서 답안지를 가져온다든지, 아예 감시하라고 붙여놓은 포졸들이 완성된 답안지를 가져다 주든지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게다가 어떤 양반은 이걸 노리고 계속 노비 바꿈질을 해서 머리가 좋은 노비를 사와서는 공부를 시킨 뒤 대리시험을 치르게까지 했다.
3. 단체 행동화
원래는 이렇게 오와 열을 맞춰서 봐야 하지만...
당시 과거장을 그린 그림을 보면 아주 파라솔까지 펴놓고 느긋하게 모여앉아 다과회라도 나누는 듯한 풍경이다. 조선 말기엔 과거제 자체가 막장이 되어 난장판이란 말의 유래가 될 정도로 혼란스러워졌다.[2]
3.1. 역할
조선 후기~말기쯤 되면 이야기에서 흔히 보듯 '혼자 공부해서 한양 올라가 단번에 장원급제해 임금님 밑에서 벼슬 시작'은 말 그대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기본적으로 과거에 1차라도 붙고 싶다면 몇 명이서 서로 역할을 나눠 단체전으로 움직여야 했다. 이렇게 단체전을 위해 모인 조원들을 '접'이라고 하며, 대개 사수, 거벽, 선접군으로 구성되었다.- 선접군: 미리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 사람. 과거제는 시험문제를 나눠 주는게 아니라 써 붙여둔 걸 수험자들이 와서 보고 답을 작성하기때문에 자리가 나쁘면 문제를 굉장히 늦게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선접군들의 자리다툼은 그야말로 필사적이었다. 게다가 목숨도 걸린 일이다. 아침에 선접군들의 자리쟁탈전에서 밀려나 쓰러진 사람은 그대로 세상 하직, 뒤에 몰려올 일만에 가까운 인파에 그대로 깔려버리기 때문이다. 더불어 선접군은 답안지 제출시에도 용맹을 발휘하여 어떻게든 자기 접의 시험지를 300장 안쪽으로 밀어넣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 사수: 글을 베끼는 사람. 답안의 내용만 보는 게 아니라 얼마나 서체가 바르고 곧은가도 점수가 되기 때문에 등장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오로지 거벽이 만들어낸 답을 간지나게 써내기만 하면 된다.
- 거벽: 실제로 문제를 푸는 사람. 적당히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 맡으며 접의 다른 사람들의 답안까지 작성해야 한다. 하지만 수종협책(커닝) 기술이 있으니 박터지게 공부하는 놈은 거의 없었다. 주로 머리가 엄청 좋은 노비를 구해다가 시킨 뒤 급제하면 면천 + 종가 친척 어르신의 양자로 입적시키는 호적세탁을 상으로 내리거나, 신분/재력/나이 등의 사정으로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는 선비들이 부자집의 문객으로 숙식을 해결하며 개인과외 혹은 거벽을 뛰기도 했다. 요재지이로 유명한 포송령이 나이 60 되도록 밥 먹고 살던 일이 바로 이 일이었다.
- 거자: 과거시험지에 최종적으로 이름을 쓰는 사람. '접' 의 구성원들 중에서 선접군, 사수, 거벽이 다 해놓은 밑작업의 수혜를 보는 사람이다. 즉, 선접군, 사수, 거벽으로 구성된 TF 팀이 만들어 놓은 답안지가 급제할 경우 관직에 오르는 장본인이다. 당연하게도 거자는 선접군, 사수, 거벽의 고용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거자는 보통 이들을 고용할 만한 재력이 있는 집안일 확률이 높았다.
4. 처벌
법적으로 부정행위에 대한 처벌은 매우 엄하게 규정되어있어서 응시생이 과거시험 보다가 다른 사람의 답안지를 베껴서 쓸 경우에는 곤장 100대에 3년간 막노동을 강제당했고, 미리 책을 들고 올 경우에도 과거응시자격이 3년간 박탈당하도록 규정이 되어있었다. 또한 응시생들뿐만 아니라 시험관이나 중간 브로커들도 영구히 관직에 임용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고종대에도 수십명의 사람들이 과거제도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보냈고, 명청시기에는 부정행위 적발 시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하지만 조선 말기나 청나라 말기에 부정행위가 만연해있었던것을 보면 뒤로는 뇌물을 주는 방식으로 적당히 무마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5. 창작물
나중에 가면 명문가 자손이 낙방을 하면, 그게 덕성이 높은 증거라고 찬양하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부정행위를 안 했다는 말이니까.근래 경외 유생들이 대소 과장에서 대개 구차한 일을 면치 못하여 간혹 의심스럽다는 시비를 많이 듣게 된다.
그러나 김수증[3]만은 상국 청음의 손자이며 영의정 김수흥과 김수항 두 사람의 형인데 그 글을 읽은 것이나 착실한 공부가 범상한 선비에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과거를 보러 가서는 시험관의 취하고 버리는 데만 맡기고 한 번도 시속(時俗)의 구구한 짓을 아니 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붉은 종이 위에 이름 쓰는 것을 얻지 못하였다. 하지만 분수를 편안하게 여기고 한가하게 살면서 오직 문집과 사기를 읽으며 글쓰기와 그림 그리는 것으로 혼자 세월을 보내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인격이 청백하고 지조가 높은 것을 탄복하였다.
정재륜, 『공사견문록』
그러나 김수증[3]만은 상국 청음의 손자이며 영의정 김수흥과 김수항 두 사람의 형인데 그 글을 읽은 것이나 착실한 공부가 범상한 선비에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과거를 보러 가서는 시험관의 취하고 버리는 데만 맡기고 한 번도 시속(時俗)의 구구한 짓을 아니 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붉은 종이 위에 이름 쓰는 것을 얻지 못하였다. 하지만 분수를 편안하게 여기고 한가하게 살면서 오직 문집과 사기를 읽으며 글쓰기와 그림 그리는 것으로 혼자 세월을 보내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인격이 청백하고 지조가 높은 것을 탄복하였다.
정재륜, 『공사견문록』
창작물에서 이런 난장판을 잘 묘사한 것으로 네이버 웹툰 호랭총각 과거편과 조선왕조실톡, 글로는 엽기 조선왕조실록과 웹소설 탐관오리가 상태창을 숨김이 있다.
[1] 오늘날 중국에서도 이런 부정행위가 나타난 적이 있다.[2] 본래 조선 시대 과거를 보던 난장(亂場)에서 여러 사람이 어지러이 뒤섞여 떠들어 대거나 엉망진창인 것을 뜻하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혹은 행상인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서 벌이는 시장인 난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3] 김상헌의 손자로 동생들이 정승 자리에 오른 반면에 그 자신은 과거를 계속 봤는데도 합격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