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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3:58:26

고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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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팔라 황제
고팔라 1세 | Gopala I
<colbgcolor=#088A68><colcolor=#ffd400> 고팔라
Gopala I
벵골어 표기 প্রথম গোপাল
아버지 바피아타
배우자 데따데비
생몰년도 ? ~ 774년
재위 팔라 황제
750년 ~ 774년[1]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벵골을 통일하다2.3. 팔라 왕조의 초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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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팔라 왕조의 초대 황제. 오늘날의 인도 동부와 방글라데시 전역을 포함하는 벵골 지방의 오랜 혼란상을 수습하고 향후 400여 년을 이어갈 팔라 왕조를 세운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원래 어떠한 인물인지, 몇 년에 태어났는지 어떠한 기록도 없다. 이는 그가 태어날 때 벵골이 한참 혼란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바피아타로, 별명은 '적을 죽이는 자'였다. 그의 할아버지의 이름은 다이타비슈누로, 별명은 '모든 것을 아는 자'였다. 또한 후대 팔라 왕조는 자신들의 기원을 전설적 크샤트리아 가문 수리야밤샤라 주장하였다.[2]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팔라의 이후 행적을 미루어 볼 때 밑천이라 할 만한 권력이 있었다는 것이며 이는 그가 한미한 가문 출신은 아님을 의미한다.

2.2. 벵골을 통일하다

팔라 왕조 성립 이전, 북인도를 확고히 장기 지배한 국가는 굽타 왕조였다. 하지만 굽타 왕조는 6세기 후반에 지배력 약화로 공중분해되는 형태로 멸망하고 말았다. 굽타 왕조 몰락 이후 약 200여 년간, 북인도는 소왕국들이 난립하여 지역 곳곳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형국으로 전락했다. 이 시기에 등장했던 대표적인 왕조로 바르다나 왕조가 있다. 바르다나 왕조가 하르샤 왕의 치세 동안 북인도의 패권을 일시적으로 잡았으나 하르샤 왕 사망 이후 굽타 왕조가 그랬듯 공중분해되었다. 이런 식으로 카리스마 있는 군주가 죽고 평범한 군주가 즉위하면 득달같이 봉신들이 군주를 쳐서 왕국이 분열하고 다시 내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팔라 왕조가 등장한 벵골 지역도 팔라 왕조 직전에 가우다 왕조가 들어서 샤샨카라는 귀족이 왕으로 즉위했으나 그의 사망 이후 왕국이 공중분해되었다. 팔라 왕조 중후기에 쓰여진 역사 서사시 라마차리탐은 이 시기를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더 큰 물고기가 그 큰 물고기를 다시 잡아먹는 상황으로 비유했다.

끝없는 싸움은 지역 귀족들을 피로하게 했다. 결국 가우다 왕조 멸망 이후 벌어진 마지막 투쟁이 수 십년 간 벌어진 끝에 귀족들은 모여서 덕망 있는 이를 국왕으로 선출하고 그의 권위를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순탄치 못 했다. 서사시의 표현에 따르면, 벵골 사람들이 왕을 세우자 즉위식 다음날 밤에 반인반사의 반신족 나가들의 여왕이 쳐들어와 왕을 살해했다고 한다. 이는 막상 왕을 선출하고 나니 왕좌에 욕심이 나는 일부 귀족들이 왕을 시해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음을 비유한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왕좌에서 살해당하고 750년 즈음에 왕으로 선출된 이가 바로 고팔라였다. 고팔라는 지금까지의 왕들과는 달랐다. 서사시는 고팔라가 왕으로 즉위한 다음 날 쳐들어온 나가 여왕과 당당히 맞서싸워 여왕을 죽였다고 기록한다. 즉, 고팔라는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귀족들의 하극상을 멈추는 데 성공했다. 고팔라의 재위가 시작되면서 벵골 지역의 혼란상은 잦아들었고 벵골 중남부의 귀족들은 모두 새 왕 고팔라에게 충성했다.

2.3. 팔라 왕조의 초대 군주

사실 워낙 기록이 부족한 만큼 벵골 군주로서의 고팔라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확실한 것은 그가 대략 30여 년에 못 미치게 재위했다는 것이며, 그의 통치가 훌륭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아들 다르마팔라 황제에 대한 기록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르마팔라 황제는 즉위 직후에, 바로 왕조의 중심지 벵골에서 꽤 먼 카나우지를 장악하고 그 곳에서 당대 인도의 다른 대국들과 겨루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다르마팔라 황제가 즉위 초반부터 군사 행동을 많이 벌일 수 있었다면 그 기반은 고팔라가 마련한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고팔라의 중요한 특징은 벵골 역시 힌두교의 세가 제법 있었음에도, 고팔라는 독실한 불교도였다는 것이다. 그를 시작으로 내려가는 팔라 왕조는 인도 최후의 불교 왕조가 되었다. 고팔라는 오단타푸리 마하비하르를 세웠다.[3][4] 오단타푸리 마하비하르는 많은 지원을 받으며 12,000명의 승려들이 머물며 수행하고 연구하는 종교 및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12세기 후반에 고르 왕조가 벵골을 공격했을 때 불태워 버렸다.
[1] 팔라 황제들의 재위 기간은 제일 최근에 정리된 D. 강굴리의 연대 추산을 따름.[2] 수리야밤샤란 인도의 태양신 수리야의 후손들을 의미하며, 달의 신 찬드라의 후손 찬드라밤샤와 한 쌍을 이루는 전설적 크샤트리아 혈통이다. 이들은 단순한 신화 속 가상의 가문이 아니라, 옛 코살라 왕국의 초대 왕조 익슈바쿠 왕조이다. 힌두교에서는 태양신의 직계 후손이자 최초의 크샤트리아라서, 불교에서는 석가여래와 샤카 왕조가 수리야밤샤 혈통이라, 자이나교에서는 수리야밤샤 왕조 시대에 자이나교의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티르탕카라가 26명이나 태어나서 이 혈통을 신성시했다.[3] 마하비하르란 대학을 낀 초대형 불교 사원을 의미한다.[4] 다르마팔라가 건립했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