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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2 17:38:27

고종(조선, 혁명의 시대)

1. 개요2. 작중 행적3. 자녀4. 기타

1. 개요

조선, 혁명의 시대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고종 황제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

주인공 완화군 이선의 아버지이다.

2. 작중 행적

원래 역사대로 민씨 일족에게 휘둘리던 무능한 국왕으로 임오군란을 맞았으나, 장자이자 회귀자인 장남 이선의 개입으로 파국은 피했지만 중전 민씨는 악행이 낱낱히 밝혀지고 폐서인되었으며, 개화당이 정권을 잡자 이형은 국왕으로서 유학자들에게 존중받긴 하지만 실권은 박탈당한 도장 찍는 기계로 전락했다. 이후 세상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자신의 정치를 펼치고 싶어했지만 좌절되고 헌법 반포와 의회 개설로 폭발했다가, 조선 독립전쟁을 계기로 청에 도움을 청해서 권력을 되찾으려는 발상으로 청에 밀서를 보낸다.

이 밀서는 전후 시모노세키 조약 협상 과정에서 이홍장이 가져오면서 들통났는데, 일전에도 비슷한 음모를 꾸몄던 것으로 밝혀지지만 당시만 해도 이홍장이 아무 관심이 없어서 묻혀버린다. 이로 인해 부자유스러운 왕이 아니라 실권자로 남고 싶었던 이선의 꿈은 무산되었고, 흥선대원군과 개화당 내각은 이를 빌미로 이형을 압박해서 이선에게 양위하게 만들고, "이전 밀서는 근거가 없고 이 밀서는 혹시나 패전할 경우 국체를 보전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선전으로 대충 무마한다.

칭제건원 이후엔 태상황으로 모셔졌다. 이선은 그에게 거액의 연금과 즐길 거리들을 주어서, 여러 취미들을 즐기면서 유유자적하게 살게 되었다. 아들과 소원했던 사이는 황태자 이진이 태어나면서 좀 더 나아졌고, 원래 역사와 달리 흥선대원군의 임종 직전에도 마지막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때의 영향인지 흥선대원군 사후에는 확실히 편한 모습을 보였고, 이선이 의도한 역모 모의 사건 때 주범들을 어떻게 살려줄 수 있냐며 분노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정치적인 발언도 일절 하지 않는다. 이선도 고종이 얌전히 산다면 잘 대해줄 의사가 있어서 물질적인 풍요와 안락한 노후를 보장해주었다.

스트레스 없는 삶을 살아서인지 노환으로 몸이 불편해진 것 빼고는 원래 역사보다 더 오래 살고 있다. 파리강화회의 이후 시점에서는 마르가리타의 자식들은 없는 것처럼 취급하고 이강의 진보적인 식견에 혀를 차는 등 보수적인 면모는 여전하지만, 자신이 군주였어야 한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위대한 군주인 아들을 둔 것에 자부심을 느낄 정도가 되었다.

인생을 즐기는 대신 운동을 안 해서 고도비만이 되고[1] 결국 뇌졸중으로 실어증에 걸리고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미 1920년에 전조 증상을 보여 주치의들이 식습관 개선과 체중 감량을 처방하려 했으나 자신은 이미 살 만큼 살았다며 이대로 인생을 즐기다 가겠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역대 조선의 군주 중 70살을 넘은 인물이 태조 이성계와 영조 이금 외에 없었기 때문에 이미 역사상 3번째 장수였다고.[2]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미련은 장손이 혼인해서 증손자를 보는 것이었는데 역대 조선시대 임금 중 증손자를 살아서 본 인물은 아무도 없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고종은 뇌출혈 전조 증상을 보였을 때부터 사망할 때를 대비해 미리 유언장을 써놓았고 이를 아들 이척(원 역사 순종)에게 맡겼는데, 순종도 상자 안에 담아놓은 유서를 관리하고만 있었지 내용물은 몰랐다.[3]
「내가 재위에 올라 34년, 열성조의 유업을 받들어 국가를 중흥하려 하였으나, 무능하고 부덕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 열성조께서 보우하사, 천만 다행스럽게도 나의 장남 선이 국가의 중흥을 이끌게 되었다. 만청을 무찔러 자주독립을 이뤄 내고, 하늘의 뜻을 계승하여 칭제건원하기에 이르렀으니, 실로 국가의 경사이자 왕실의 홍복이다. 한(漢)의 중흥을 이끈 광무제가 있었다면, 우리 대한에도 만대에 갈 왕업을 닦은 광무제가 있으니, 위대한 군주를 아들로 둔 내가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 24년이 흘러 내 나이 고희를 바라보게 되었다. 두보가 이르길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하였고, 내 나이가 칠십이 되니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도다. 열성조 중 고희를 넘기신 이가 드무니, 참으로 왕좌의 짐이 무겁다 할 것이다. 내가 붕(崩)하면 장례는 간소히 치르라. 국가의 중대사가 많으니, 허례(虛禮)로 낭비할 이유가 없다. 왕조의 전례를 따르되, 굳이 황제의 예를 갖추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태자 진의 국혼이 급하니, 설령 국상(國喪) 기간이라 하여도 개의치 말고 국혼을 진행하도록 하라. 국상이라 하여 국경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 예년과 마찬가지로 계천기원절, 건원경절, 개국기원절 행사를 성대히 치름으로써 우리 왕조와 대한의 권위를 만방에 빛나도록 하라. ……」
첫 번째 유언장은 공식적인 유언장으로, 황태자 이진의 국혼이 급하니 국상 기간이라도 국혼을 진행하도록 하고 황제의 권위를 중시하는 자로서 장례비를 아껴서라도 국경일과 같은 행사를 중시하라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국상 기간이라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국혼을 앞당겨서 한 전례가 있기 때문에 특이한 것은 아니다.
「선은 보아라. 내 공적으로는 너와 군왕과 신하였고, 선위 후에는 상황과 황제였지만, 사적으로는 우리는 부자가 된다. 나는 네 부친으로서 네게 몇 가지 부탁을 하고자 한다. 황태후는 아직 젊으니, 홀로 남게 될 기간이 길 것이다. 현숙한 이니 황실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하겠지만, 네가 아들로서 황태후를 극진히 모시리라 믿는다. 황귀비는 네가 친자로서 잘 모시고 있으니, 내가 따로 부탁할 일은 없겠다. 순친왕 척은 본래 왕세자였으나, 그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내게 지극히 효성을 다하였다. 내 적통은 네가 계승하게 되었으나, 내가 죽은 후에는 척이 창덕궁에서 머무르도록 허락해 주길 바란다. 의친왕 강은 어릴 적부터 궁 밖에서 자라, 내가 애정을 주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엇나간 게 아닌지 걱정이다. 다행히 네가 강과 친밀하니, 강이 친왕으로서 책무를 다하도록 해 주길 바란다. 영친왕 영은 어릴 적부터 내가 크게 아꼈으나, 구주로 떠난 후에는 거의 보지 못하였다. 아라사 여인과 혼례를 올려 왕실의 존엄에 누를 끼쳤으나, 이 또한 세상이 바뀐 탓이니 어찌하랴? 영의 아들이 비록 혼혈이라고는 하나 영친왕가를 계승하도록 배려해 주길 바란다. 정혜공주는 막내로, 나와 황태후를 가장 가까이 모셨던 아이기도 하다.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재가를 권하여 좋은 집안의 사내를 부마로 삼기를 바란다. 진은 내 장손으로, 왕조의 대통을 이을 적장자이기도 하다. 내가 진의 혼례를 보지 못한 게 유일한 한이다. 진이 속히 혼례를 치르고 후손을 얻기를 바란다. 청국이나 일본과 국혼이 오고 간다고 들었는데, 내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면 전례를 따라 대한의 명문가 사대부 여식과 혼례를 올리는 게 옳다고 본다. 하지만 황실의 좌장은 너이니, 네가 국익에 필요하다면 뜻대로 하여라. 무엇보다 중요한 건 굳건한 왕통을 세우는 것이다. 민씨는 비록 폐비되었다고는 하나, 내게 있어는 오랜 세월 동안 지어미였다. 네가 비빈(妃嬪)의 예로 다시 장례를 치러 줘서 감사할 따름이다. 그 장자인 척이 제사를 잇고, 척의 자식이 없으니 양자를 들여서라도 제사는 끊이지 않게 해 주길 바란다.」
두 번째 유언장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개인적으로 남기는 유언이었다. 대원군이 민씨에게 미안함을 느껴 사후 장례를 치르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선은 흔쾌히 충주에 가매장되어 있던 민씨를 황귀비에 준하는 비빈의 예로 장례를 치르고 양주에 매장해 주었기에 이에 따로 감사를 표한 것이다. 고종 나름대로 살아남은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이런저런 조언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지금부터 말하는 바는 광무 2년, 무술년에 대원왕께서 훙(薨)하실 때의 일이다. 대원왕께서 내게 이르시길, 성상이 경진년(1880) 이후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하시었다. 본래 알던 완화군 선과 너무 달라졌다는 말씀이셨다. 선이 원래 총명했다고는 하나, 청국과 아라사로 갑자기 떠날 정도로 모험심이 넘치는 성품은 아니었다. 아라사에서 돌아온 임오년에는 더욱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이 열다섯에 동서고금의 역사와 정세를 꿰고 있으며, 정치적 경륜도 놀라울 정도로 기민했다. 도대체 무슨 경험을 했기에 이렇게 변화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선은 마치 모든 일이 일어나리라 예상한 듯 대책을 세우고 기민하게 행동했다. 선의 총명함과 기민함이 사직을 구원하고 국가를 보위하였으니, 이유야 어찌 됐건 크게 만족하였다. 비록 개화당 일파가 추진하는 급진적인 개혁이 조선의 전통을 파괴하였다지만, 선을 굳게 믿고 대임을 위임하였다. 마침내 청국을 격파하여 자주독립을 이룩하고, 칭제건원하여 국위를 사방에 떨쳤으니 어찌 여한이 있겠는가. 대원왕은 훙서를 앞두고 깊이 생각하기를, 이는 도저히 사람의 일이 아니며 하늘의 뜻이 이뤄진 것이다. 감히 추측하건대, 아마도 경진년에 하늘의 기이한 뜻으로, 선은 앞날을 보게 된 것이 아닐까?」
대원군 사후 고종이 왜 이선에 대한 태도가 유해졌는지에 대한 진실이 여기서 밝혀지는데, 대원군은 죽기 직전 고종과 독대했을 때 괴력난신을 거부하는 흥선대원군조차 이선의 성격이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변해 미래를 다 내다보는 듯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기이함을 느꼈다. 흥선대원군이 아무리 괴력난신을 싫어한다 하더라도, 결국 본질적으로 전근대인이기 때문에 조선을 중흥시키라는 천명을 받아 심안(心眼)을 얻어 미래를 보는 힘이 생겼다고 해석한 것이다. 이 내용을 본 이선은 이척에게 내용을 보았는지 확인한 뒤,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자 밖으로 내보내어 단둘만 있게 된다.
「대원왕은 내게 거듭 말씀하시었다. 단을 높이 쌓아 천자의 지위에 오르고 만대를 이을 왕업을 이룩하였으니, 황제는 천명을 받든 존재다. 선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천명이 선을 통해 구현되었다면, 우리가 구구히 논해 봐야 천명을 거역하는 일이다. 내가 왕업을 계승할 운명을 타고났기에 왕이 된 것처럼, 선은 천명을 계승할 운명이 타고났기에 황제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나도 마음을 내려놓고 천명이 지상에서 이뤄지는 일을 지켜봐 달라고 하셨다. 천명의 계승자가 후손이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참으로 기이한 말이라, 나는 쉬이 납득할 수 없었다. 대원왕이 환상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죽음을 앞둔 노인과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러겠노라 하고 따랐다. 그러자 대원왕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이제 편히 갈 수 있겠다고 하시었다. 그리고 지난날 자신이 아들에게 행한 잘못이 많으니 용서를 구하고 싶다 하시었다. 심지어 자신의 손으로 끌어내린 민 중전에게도. 이는 오직 국가와 사직을 위한 일이었으며, 부득이한 결단이었으나 사죄하고 싶다고. 아버님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엄격하고 무서운 아버님이었다. 아버님은 나를 자식이 아닌 권력의 도구처럼 여긴다고 생각했다. 내게 있어서 부친이라기보다는 두려운 정적이었다. 그랬던 아버님이 죽음을 앞두고 내게 용서를 구하셨다. 그때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결국 혈연의 정이 권력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내 아들에게 있어 나 역시 부친이라기보다는 정적이었다는 것을. 나와 대원왕의 불행했던 역사를 더는 반복하면 안 되겠다는 것을. 그리 생각하니 오랜 미움과 분노가 수그러들었다. 나는 대원왕의 뜻을 받아들이고, 나 역시 대원왕에게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했음을 용서를 빌었다. ……」
해당 내용을 본 이선은 권력 앞에서 부모 형제도 없다는 것만 실감했지만, 그래도 죽기 직전에는 친부자로서 제대로 화해했다는 것을 알고 다행이라 여겼다.
「네가 정말로 하늘의 뜻을 받아 앞날을 예견하게 되었다는 대원왕의 말씀이 계속 뇌리에 남았다. 나는 을미년(1895)에 너와 독대했던 일을 잊지 못한다. 아들에게 대의멸친(大義滅親)과도 같은 말을 듣고 치욕에 떨었다. 하지만 곰곰이 그때의 대화를 곱씹어 보니, 너는 내가 계속 집정했다면 벌어졌을 일을 예견하듯이 말했다.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어찌 그리도 생생하게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이 지나 차분하게 생각을 해 보니, 너는 마치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견하듯이 움직였다. 멀리서는 임오년에서부터 가까이로는 구주대전(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내가 왕위에 있던 시절, 용하다는 점쟁이를 불러들였다. 점쟁이가 예언하기를, 장차 조선은 칭제건원하여 중화의 천명을 계승할 거라 하였다. 놀랍게도 참으로 그리되었다. 그 복사(卜師)는 미래를 예견하는 눈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정말로 너는 천시(天時)를 읽고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이 있단 말이냐? 나는 너무나도 궁금하다. 무엇이 너를 바꾸었는지, 너를 통해 이 나라의 운명이 바뀌었는지. 과연 천명이란 존재하는지. 이를 알 수만 있다면 내가 어찌 더 여한이 있으랴?」
대원군은 미신을 싫어했지만, 고종은 성리학적 교육을 받았음에도 점술이나 예언을 좋아해 점쟁이를 가까이 두고 종종 점을 치거나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과학적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이선은 그 정반대에 있었지만, 자신의 빙환트는 도저히 '과학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대원군의 말마따나 정말로 '천명'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여 처음으로 자신이 미래를 보았음을 밝히게 된다. 어차피 언어 능력을 상실한 뇌졸중 환자라서 어디 가서 떠들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알려준 것.
“공자께서도 그 옛날에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소자 또한 어찌 다르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소자는 언제나 합리성을 추구해 왔습니다. 하오나 대원왕의 말씀이 옳습니다. 경진년에 열병을 앓은 이후, 소자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날을 예견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100년 뒤의 미래까지 보게 되었습니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했습니다. 이게 만약 대원왕의 말씀대로 천명이라면, 하늘의 뜻인 것이겠지요. 저는 본래 경진년 그해에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운명을 바꾸기 위해 청국으로 떠났습니다. 30년 뒤에는 나라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국운을 바꾸기 위해 대비해야 했습니다. 제 모든 행동은 미래를 예견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본 미래에서는, 부황께서 망국의 군주라고 100년이 지나도 손가락질을 받고 있었습니다. 저는 부황을 비롯한 모든 조선인의 운명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식민지의 노예로 억압받는 암울한 세상이 아닌, 자주국가의 국민으로서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세상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현재에까지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부황께서는 망국의 군주로 기억되지 않을 겁니다. 격동의 시기에 재위했던 조선 26대 군주로 기억되겠지요. 조선인들도 망국노로 살지 않을 겁니다. 당당한 주권국가의 국민으로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갈 겁니다. 이를 위해 부황의 권력을 빼앗게 되었으니, 자식 된 도리로서는 송구하오나 하늘이 제게 내린 의무를 충실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게 하늘의 뜻이자 인민의 뜻이요, 천명이겠지요.”
“태상황 폐하, 맹세하겠습니다. 열성조의 유업을 잇고, 대한의 왕업이 만대에 이르도록 하겠습니다. 대한의 국위가 사방에 떨치고, 모든 인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부디 편히 눈을 감으십시오. 선도 언젠가는, 제게 주어진 의무를 다한 후에, 조부와 부황의 뒤를 따라 가겠습니다.”
그렇게 이선은 원 역사에서 1919년까지 일어나는 일을 대략적으로 설명하였고, 우울하기 그지없는 1921년과 달리 밝은 미래가 보이는 것을 떠올리며 천명이라는 추상적인, 그러나 한자 문화권에서 가장 확고한 믿음으로 이를 설명하였다. 모든 것을 알게 된 고종은 절망하면서도 결국 이선이 미래를 바꾼 것에 감사를 표했고, 그렇게 둘은 오랜 응어리를 풀고 화해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정말로 고종이 이날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주치의의 진단에 고종의 모든 직계 후손들이 고종을 방문하였다. 고종은 서양인 혼혈이라 꺼리던 손자들에게도 마지막 순간에는 온화한 태도를 보였고, 오래전 첫사랑이었던 영보당 이씨와 정말 오랜만에 만나 대화하다 영보당 이씨에게서 어머니로서 아들이 열두 살 때부터 자신이 알던 아들과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알아차렸지만 그저 하늘의 뜻 내지는 부처님의 뜻이라 여겨 일개 사람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생각해 모든 걸 받아들였고 어찌 되었든 그로 인해 자신들의 아들이 대업을 이루어 자신들은 위대한 황제의 부모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는 말을 듣게 된다.

고통을 줄여 주는 모르핀을 맞고 잠든 태상황은 옛 광경의 주마등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57년 전인 1864년 1월 21일(음력 계해년 12월 8일)은 소년 이재황이 창덕궁으로 입궐해 왕위에 오른 날이었다. 방계 왕족인 흥선군 이하응의 차남으로 태어난 이재황이 왕통을 계승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만큼 왕실의 혈연이 귀했고, 흥선군과 조대비의 막후교섭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왕위에 오른 이재황, 아니 이형은 제왕학을 익혔다. 10년간의 수렴청정, 실질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거치며 통치를 준비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순순히 권좌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었으니, 부자간의 치열한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1차전은 군주라는 명분을 등에 업고, 중전과 처가 여흥 민문을 대리인으로 내세운 이형의 승리였다. 대원군은 강제로 은퇴하여 패배를 곱씹어야 했다.

이후 이형은 10년간 친정을 하며, 나름대로 의욕적인 통치에 나섰다. 하지만 대원군의 최대 실책인 당백전이라는 악성 화폐의 청산에 발목 잡혀 뭘 제대로 해 볼 수가 없었다. 이형 자신도 경제에 무지했고, 처족과 측근의 부정부패가 심화되면서 재정은 파탄에 접어들었다. 통상거부정책을 썼던 대원군과 달리, 강화도조약 이후 의욕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기는 했으나, 이 역시 본격적인 근대화라기보다는 주먹구구에 가까운 임기응변이었다. 재정파탄, 부정부패, 개화정책의 실패는 임오군란이라는 폭발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일으킨 군대와 도성 빈민이 궁궐을 점령하고, 대신을 살해하고 중전까지 시해하려 한 전대미문의 사태였다.

결국 권력다툼의 2차전은 대원군의 승리로 끝났다. 바로 이형의 장남인 이선이 권력투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청군의 개입은 무마되었다. 이형은 불과 나이 서른에 이름뿐인 군주로 남게 되었다. 개화당의 지도자로 추대된 이선은, 갑신경장 이후에는 조부조차 제치고 실질적인 통치에 나섰다. 모든 통치의 명령은 군주 이형의 이름으로 발표되고 집행되었지만, 실권은 이선과 개화당에 있었다.

나름 열심히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개화에 공감한 이형이었지만, 개화정책의 성과는 이선이 금세 압도했다. 이형의 통치 10년과 이선과 개화당 통치 10년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형의 통치 10년은 임오군란이라는 파탄으로 끝났지만, 개화당 통치 10년은 옛 상국인 청나라를 격파하고 자주독립을 완수했다. 그 와중에 권력을 되찾아보겠다고 청나라에 밀서를 보냈던 이형은, 그나마 지키고 있던 왕위에서마저도 내려와야 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광무제 이선의 제국은 이전의 조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권력과 왕위를 빼앗은 아들에게 깊은 분노와 질시를 느꼈던 이형은, 강대하고 번영하는 조선의 변화를 지켜보며 점차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다. 비록 자신이 이룩하지는 못했으나 자신의 아들이 제국의 대업을 이루었다. 약소국에서 열강의 반열에 들어섰다. 이제는 아들에게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 천명을 계승하여 국위를 떨친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죽음을 앞두고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고 하던데, 태상황은 정말로 옛일이 주마등처럼 흐르자 죽음을 직감하게 되었다. 죽기 직전 아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비록 말은 나오지 못해도 의식은 뚜렷했기에, 이선이 하는 말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천명으로 미래를 보고 왔다. 미래를 보고 왔기에 역사를 바꿀 수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정녕 그렇다면 그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일이었다. 바로 천명이었다.
‘하늘이 내 아들을 선택했단 말인가!’

그 자신으로서는 일본에 멸망당해 망국의 군주로서 100년이 지나도 지탄을 받는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사실이 아니라 이선의 허언(虛言)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이라면, 만약 그럴 운명을 아들이 바꿨다면, 참으로 천행이었다. 후대에도 끊임없이 비난을 받을 망국의 군주가 아닌, 제국을 창건한 위대한 황제의 아버지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테니까.

“태상황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시의(侍醫)의 말에 이선과 직계 황족들은 속히 대조전 침전 안으로 들어왔다. 마지막 회광반조(廻光返照)라도 일어난 듯, 태상황은 오른손을 뻗어 천장을 가리켰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

‘하늘의 뜻, 천명을 받아 내 아들이 천자에 올랐도다! 이제 나도 하늘의 명을 받아 돌아가노라!’

이선이 죽어 가는 부친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천장을 향해 뻗은 오른손을 맞잡았다.

‘그래, 내 아들 선아. 이왕지사 이리되었으니, 네가 조선왕조 아니 대한국의 천년대계를 완성하길 바라노라! 나는 너를 믿고 하늘로 돌아가겠다!’

“부황이시여, 소자와 후손들이 열성조의 유업을 계승하여, 대한의 국위를 만대에 빛내고 만백성을 지키겠습니다. 하늘에서 굽어 살펴 주소서.”

마지막 맹세를 들은 태상황은 더는 여한이 없다는 듯, 최후의 힘을 다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깜빡였다.

“상위복! 상위복! 상위복!”

태상황을 가까이 모시던 마지막 대전내관(大殿內官)이 황색 곤룡포를 들고 지붕 위에서 북쪽을 향해 세 번 상위복(上位復)을 외쳤다. 세상을 떠난 군주의 영혼이 되돌아오길 바라는 의식이었다. 광무 25년 1월 21일 오후 6시, 조선왕조 제26대 군주 이형은 재위 34년, 선위 24년 만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붕어(崩御)했다. 향년 70세, 만 68세에 맞이한 죽음이었다.
「태상황께서 광무 25년 1월 21일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붕어하시었다. 아, 대행황제(大行皇帝)의 장자이자 왕통을 계승한 짐은 애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칙령으로 태상황의 국장(國葬)을 명한다. 7일간 정조시(停朝市)를 하고 가무음곡(歌舞音曲)을 금한다. 빈전(殯殿)과 혼전(魂殿)을 대조전으로 한다. 빈전도감(殯殿都監)은 대행황제의 국장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묘호와 시호는 고종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 약칭 고종 태황제로 원 역사 그대로이며, 전호는 효덕(孝德)으로, 능호는 홍릉(洪陵)으로 서계하였다.

묘호는 원래 역사처럼 고종이 되었다. 칭제건원한 인물의 아버지를 추숭한다는 특성상 원래라면 조(祖)의 묘호를 받는 것이 관례이지만, 신하들이 삼망(三望)을 아뢸 때 고종(高宗), 신종(神宗), 경종(敬宗)을 제안한 것을 보아 아들이 칭제건원하기는 해도 조선 왕조의 연장선인 데다 고종이 하도 무능해서(...) 그냥 종(宗)으로 처리한 모양이다.

조선의 근대화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향촌의 유림들은 옛 성리학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유생들은 전국에서 올라가 최후의 전통적인 조선 군주를 향해 예를 다했다. 고종의 죽음은 기존의 조선 시대의 끝을 고하는 상징이기도 하였고 대한제국으로 완전히 넘어갈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고종 태황제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전례 없는 변혁의 시대를 맞이한 군주였다.
평시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군주가 될 자격이 있었으나, 위기의 시대에는 최악의 군주였다.
역사의 변화 덕에, 망국의 군주가 아닌 제국을 창건한 황제의 부황으로서 세상을 떠날 수 있었다.
새로운 역사는 이형을 망국의 군주이자 패배자가 아닌, 왕조의 중시조이자 승리자 고종 태황제로서 기억하게 될 터였다


3. 자녀


작중에서 장성한 자식이 4남 1녀라는 것을 보아 원 역사처럼 요절한 자식들이 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 역사 순헌황귀비 엄씨의 아들인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과 복녕당 귀인 양씨의 딸 덕혜옹주(德惠翁主)가 언급되지 않는 것을 보아 이들은 태어나지 않았거나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 역사에서 요절한 광화당 귀인 이씨와의 8남 이육(李堉)과 보현당 귀인 정씨와의 9남 이우(李堣), 내안당 귀인 이씨와의 요절한 딸이 있었는지는 불명이다.

4. 기타

원 역사와 달리 아들인 이선이 칭제건원을 했기 때문에 생전 대한제국 황제였던 적은 없고 대한제국 태상황으로서만 존재했다.

사망 당시 조선 시대 임금 중 3번째로 오래 살았다.[17] 1852년 9월 8일~1921년 1월 21일로 향년 68세(세는나이 70세)로, 이전 조선시대 왕들의 향년은 태조(72세), 정종(62세), 태종(54세), 세종(52세), 문종(37세), 단종(16세), 세조(50세), 예종(19세), 성종(37세), 연산군(29세), 중종(56세), 인종(30세), 명종(33세), 선조(55세), 광해군(66세), 인조(53세), 효종(39세), 현종(33세), 숙종(58세), 경종(35세), 영조(81세), 정조(47세), 순조(44세), 헌종(21세), 철종(32세)로[18] 영조와 태조 다음으로 오래 살았다. 설정상 사망 당시 고종 다음으로 오래 산 건 광해군이었고, 폐위당한 광해군을 제외하면 정종이 가장 오래 살았다.[19] 주인공 이선의 나이가 1939년 71세를 넘어가면서 아버지 고종의 나이를 넘어섰기 때문에 3번째로 오래 산 군주 타이틀은 아들 이선에게 넘어갈 듯하다.

서양인 혼혈 손자들을 꺼리기는 했지만, 죽기 직전에는 나름대로 귀여워하기도 했고 재혼을 터부시하던 조선 시대 왕실에서 자신의 막내딸로 추정되는 정혜공주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것이 안타까우니 재혼시키라고 유서에 써놓은 걸 보아 자식에게 무심하기만 한 건 아니었던 듯하다.


[1] 153cm 73kg이었다고 한다.[2] 고종은 1852년생이라 1920년 시점에서 67~68세였다.[3] 이척은 고종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아버지 곁에서 효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4] 원 역사의 명성태황후 민씨. 조선 왕비 시절 임오군란 때 폐위 및 암살. 다만 이선이 칭제건원한 뒤에는 황귀비에 준하는 비빈의 예로 매장되었기 때문에 비 대접은 받았을 듯하다.[5] 원 역사의 순종 황제[6] 원 역사(1926년 사망)보다 12년 더 살았다.[7] 고종 사망 당시 영친왕의 아들로 우와 연이 언급된다. 연만 서구적인 외모에 갈색 머리라 언급되는 것을 보아 이우는 동양인에 가까운 외모인 듯하다.[8] 작중에서 이선은 자신의 사생아인 이리나 리에게 '예성공주'의 작호를 주는 등 작호에 적서 구별을 안 했지만, 정혜공주가 고종과 황태후 김씨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다는 것을 보아 정황상 황태후 김씨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9] 정혜공주가 젊을 때 과부가 되어 1920년 유언장을 쓸 때 정혜공주의 재가를 요청한 것을 보아 1919년 이전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10] 원 역사의 내안당 귀인 이씨. 원 역사에서는 1914년에 사망하였으나 본작에서는 1921년 이후까지 살아있었다.[11] 원 역사의 완화군. 본작의 주인공 이선의 빙의체이다.[12]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의 아들[13]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의 딸[14] 원 역사 선통제 푸이와 푸제의 동복 여동생[15] 원 역사 선통제 푸이의 남동생이자 윈잉의 오빠. 원 역사에서 사가 히로의 남편으로 알려진 사람이다.[16] 작중에서 여러 첩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식들이 있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에 자녀는 원 역사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17] 조선 시대 왕들은 지나친 과로와 스트레스, 잘못된 식습관과 생활 습관 때문에 오히려 고대 한반도 군주들보다 짧게 산 경우가 적지 않았다. 고대 한반도 군주들을 보면 살해당하지 않거나 근친혼의 지나친 누적으로 인한 유전병이 아니면 60~70대 이상 산 인물들이 제법 많았다. 사실 강건한 신체를 타고난 이성계가 72세까지 살았고, 조선시대 왕들 중 이성계 닮아서 타고난 신체 자체는 건장했다고 기록된 인물들이 제법 많은 걸 고려하면 생활 습관만 아니었으면 후손들도 제법 오래 살았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 때문에 대체역사소설 근육조선에서는 조선 왕실이 21세기 헬스를 전면 도입한 헬창이 되자 중세시대에 평균 수명이 70~80대로 폭등하는 진기록을 세웠다.(...)[18] 추존까지 포함하면 덕종(의경세자, 18세), 원종(정원군, 39세), 진종(효장세자, 9세), 장조(사도세자, 27세), 문조(효명세자, 20세)가 있다.[19] 정종도 숙종 대 반쯤 추존된 인물이라, 정종도 빼면 정종을 추존시킨 숙종이 가장 오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