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물에서의 고성소 및 동음이의어 '림보'에 대한 내용은 림보 문서 참고하십시오.
라틴어 | Limbus |
프랑스어 | Limbes |
영어 | Limbo |
한국어 | 고성소(古聖所) |
1. 개요
고성소Limbo는 가장자리Limbus에서 유래한 말로, 다음 두 가지를 가리키는 가톨릭 신학의 표현이다.1. 구약 의인들의 내세 (그리스도교 신학 공통의 개념)
2. 원죄만 있고 본죄는 없는 상태에서 죽은 유아의 내세 (가톨릭 신학 특유의 개념)
2. 원죄만 있고 본죄는 없는 상태에서 죽은 유아의 내세 (가톨릭 신학 특유의 개념)
지옥의 가장자리라는 의미에서 '변옥(邊獄)'이라 부르기도 한다. 간혹 연옥이라고 표현하는 창작물도 있지만, 이건 명백한 오역이다.
2. 일러두기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전통적으론 내세를 공간적 표상으로 즐겨 표현하지만) 엄밀하게는 그리스도교에 공간적 내세 교리는 없으며, 사후의 '상태'를 천국(과 연옥), 지옥으로 표현한다.그렇기에 교리적으로 천국이란 하느님과의 영원한 지복직관 상태를 말하고,[1] 지옥이란 하느님과의 단절 상태를 말하며,[2] 가톨릭 교리에서 말하는 연옥(Purgatorium, 정화)이란 지복직관(천국)에 앞서 일부 인간이 겪는 정화(Purgatorium)의 상태를 말한다.[3] 곧, 천국(과 연옥), 지옥은 사람이 사후에 겪는 어떤 중대한 실재적 상태를 분명히 가리키지만, 공간적 이미지 자체는 어디까지나 비유이다.
그러므로 림보의 경우도 상태 개념이다. 림보는 가장자리Limbus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말 자체는 굉장히 공간적인 표상이지만, 이러한 공간적 표상을 통해 (구약 의인의 림보이든, 유아 림보이든) 내세의 어떤 상태를 가리키고자 하는 것이다.
3. 구약 의인의 고성소
신약 이전의 고성소는 구약에서의 성조(聖祖)들을 포함한 조상들이 머무르는 장소를 뜻한다. 즉 원죄로 인해 궁극적인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이며, 이는 그리스도가 강생하여 구원을 이룰 때까지 지속되었다. 현재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함으로써 이들은 모두 천국에 들어갔다. 즉 더이상 이러한 의미의 고성소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고성소Limbo라는 표현을 쓰는 건 가톨릭 신학뿐이지만, 구약시대 의인들이 천국에 있지 않다가 그리스도에 의해 천국에 들어갔다는 건 그리스도교 전체의 믿음이다.
3.1. 지옥? 저승?
descendit ad inferos; tertia die resurrexit a mortuis
지옥에 내리사 사흗날에 죽은자 가운데로 다시 살으심[을 믿으며] (한국 가톨릭, 옛 번역[4])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한국 가톨릭, 현행 번역)
he descended into hell;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미국 가톨릭)
descendu aux enfers; le troisième jour est ressuscité des morts (프랑스 가톨릭)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한국 개신교)
지옥에 내리사 사흗날에 죽은자 가운데로 다시 살으심[을 믿으며] (한국 가톨릭, 옛 번역[4])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한국 가톨릭, 현행 번역)
he descended into hell;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미국 가톨릭)
descendu aux enfers; le troisième jour est ressuscité des morts (프랑스 가톨릭)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한국 개신교)
사도신경의 위 부분은 예수가 림보의 옛 의인들을 구원한 것을 가리킨다. 다만 한국 가톨릭의 현행 번역에서는 '지옥'이라는 어감을 희석시키기 위해 '저승'이라는 번역으로 우회해서 의역했다는 문제가 있다. 비슷하게, 한국 개신교에서는 아예 이 부분을 누락하고 번역했다.
그러나 ad inferos는 지옥에로 번역하는 게 더 정확하다. 왜냐하면 inferus는 '지옥'으로 번역되는 infernus의 유의어이자 동일 어원의 단어이기 때문에 '지옥' 내지는 어떤식으로든 '지옥'과 연결이 되는 단어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전자의 예로는 영어권 번역(inferus와 infernus를 모두 hell로 번역)이 있고, 후자의 예로는 프랑스어 번역(infernus를 enfer
[
지옥]
로, inferus를 enfers[
지옥들]
로 번역)이 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예수가 죽음 직후에 겪은 것은 하느님과 단절된 비참한 상태이지, 결코 '고통 없이 편안한 사후세계 관광'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단절된 이 비참한 상태를, 그리스도교 교리는 '지옥'이라 부른다.
그리고 구약 의인들이 예수 전엔 지복직관을 누리지 못했기에 의인의 고성소 역시도 (비록 가장자리Limbus라는 표상을 통해 악인들의 영구한 고통 상태와는 구별하지만) 엄연히 '지옥'이 맞다. 구약 성경은 (흔히 '저승'이라고 번역되는) 셔올을 하느님과 단절된 비참한 상태라고 말하지, 희랍 신화나 무속에나 나올법한 중립공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셔올에서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 없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양할 수 없는 상태인 셔올, 바로 그 지옥을 예수가 겪었다는 것이다.
저승(셔올)은 당신을 찬송할 수 없고
죽음은 당신을 찬양할 수 없으며
구렁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당신의 성실하심에 희망을 두지 못합니다.
이사야 38,18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
죽음은 당신을 찬양할 수 없으며
구렁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당신의 성실하심에 희망을 두지 못합니다.
이사야 38,18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
물론 사도신경은 '예수가 죄를 지어서 지옥에 가서 벌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지옥'을 겪었다는 의미다. 곧 "인간의 가장 비참한 상태"를 온전히 맛봄으로써, 다시 말해 하느님과 단절된 상태인 지옥을 '천주이자 인간'인 예수가 온전히 겪는다는 바로 그 부조리를 통해서, (죄 없는 예수가 십자가형이라는 부조리를 당한 것이 구원론적 의미가 있듯이) 인류가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 비유가 아니며, 가톨릭 신학에선 바로 이렇게 사도신경을 해석한다.
주님께서는 지옥에 내려가심으로써 피조물의 모든 부분에까지 당신의 손길이 미치게 하셨다. (...) 그 이유는 누구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로고스를 발견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요, 심지어 사탄의 세계에서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 흔적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교부 성 아타나시오, 《De incarn》. 45 (Patrologia Graeca 52,409C)
교부 성 아타나시오, 《De incarn》. 45 (Patrologia Graeca 52,409C)
인간의 잘못에 대한 벌은 육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영혼의 징계도 포함된다. 게다가 죄란 원래 영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영혼은 하느님을 관조할 수 있는 특권을 박탈당함으로써 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 이런 영혼의 형벌은 받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그리스도 이전에 죽은 모든 거룩한 영혼들도 '지옥에' 내려가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모든 죄인들에게 부과된 벌을 속죄할 양이면, 죽기만을 원할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은 지옥에까지 내려가기를 원해야 했던 것이다.''' 이미 2세기 교부들은 이런 연대야말로 육화의 목적이요 종착점임을 분명히 표명했다. 예수가 저승의 밑바닥에까지 내려가서 당한 '죽음의 고통'은 오로지 성부께서 그를 다시 살려내심으로써 제거될 것이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추기경, 《성삼일 신학》Theologie der drei Tage, 김관희 번역, 인천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20, p.211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추기경, 《성삼일 신학》Theologie der drei Tage, 김관희 번역, 인천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20, p.211
이를 통해서 사도신경은 희랍계 그리스도인들과 현대인들이 빠지기 쉬운 오해, 곧 '예수는 잠들듯이 편안하게 내세에 가서 안락하게 관광하고 돌아왔다'는 착각을 배제하고 있다. 분명히 예수는 결과론적으로는 승리자로서 죽음을 정복하려고 지옥에 내려갔다. 그러나 동시에 그 승리는 당사자 예수 입장에선 마치 십자가의 승리처럼 예수의 고통을 전제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단순히 죄인들이 자초한 지옥의 고통을 겪으시는 것이 아니라, 이 지옥 너머 그 아래에 있는 무엇을 겪으신다.”[5]
주님은 우리죄인 구원하시려
어둠의 지옥까지 내려가시어
범죄로 죽어야할 우리들에게
생명의 값진선물 베푸셨도다
가톨릭 성무일도, 성토요일 아침기도
어둠의 지옥까지 내려가시어
범죄로 죽어야할 우리들에게
생명의 값진선물 베푸셨도다
가톨릭 성무일도, 성토요일 아침기도
오해를 막기 위해 사도신경의 '지옥'을 '저승'으로 의역하거나(한국 가톨릭) 아예 번역을 누락하는 것(한국 개신교)도 그 의도가 이해 안가는 것은 아니지만, 몇 분짜리 간단한 교리교육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아예 원문을 희석하거나 누락하여 번역해버리면, 원문의 어감이 전달되지 않을 뿐더러 신학적 엄밀함이 떨어지게 된다.
가령 '저승에 가시어'이라는 한국 가톨릭 번역을 보자. 신학적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그리스도교의 내세관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또한 가톨릭 교리의 '연옥'이든)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의 개념이다. 비록 대중신심에서 내세를 공간적으로 표현하기는 하지만, "베드로는 천국으로 갔다"는 공간적 표현은 "베드로는 하느님과 지복직관의 상태에 있다"는 실제 상태를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descendit ad inferos"(지옥에 내리사)라는 표현 역시도, 언명 자체는 공간적인 표현이지만 죽어있는 그리스도가 맛본 비참한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
사실 예수의 지옥 체험은 그분의 존재와 본질의 최종적인 내적 귀결일 수밖에 없다. 그분의 이타존재(Pro-existentia), 우리를 위하심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그분의 자기비움과 낮춤(Kenosis)이 어느 끝까지 이르는지, 그에 대한 결정적 대답이 바로 예수의 지옥에 내리심이기 때문이다. 이타존재로서 예수는 이 절대적 케노시스의 하강을 죽음이라는 깊은 심연 속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실현한다. 이로써 그분이 인간과 어느 지점에 이르기까지 연대하셨는지 하는 구원 경륜의 신비가 밝혀진다. 그분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어 인간과 연대하셨을 뿐만 아니라, 무덤에 묻힌 뒤의 현실이 가리키는 죽음 그 자체의 상태마저도 남김없이 맛보심으로써 인간의 운명을 당신 안에 받아들이신다.
...예수의 지옥 체험은 따라서 온전히 죽은 이로서 죽은 이들에게 가심, 죽음의 상태 그 자체를 온전히 겪으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십자가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다. 성금요일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곧 마지막으로 영을 아버지께 내어드림으로써(요한 19,30 참조) 하느님의 구원 업적이 정점에 도달했다면, 이제 성토요일[6]에 그분은 죽은 다음의 죽음의 상태 그 자체를 남김없이 맛보셔야 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이제 인간의 가장 깊은 심연의 상태에 처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이 지옥 체험은 밀도에서 보면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지옥을 질적으로 넘어선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하나이신 분이 체험하는 하느님 단절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단순히 죄인들이 자초한 지옥의 고통을 겪으시는 것이 아니라, 이 지옥 너머 그 아래에 있는 무엇을 겪으신다.”[7] 그리고 그 너머의 무엇은 발타살에 따르면, 임의의 어떤 상실이나 단절이 아니라 그 상실과 단절의 “본질적 근거”, “죄 자체”(Sünde an sich)[8]를 말한다. 여기에 예수의 지옥에 내리심이 갖는 유일무이한 특성이 있다.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감이 최종적이고 결정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들만이, 아버지의 품에 계신 분으로서 십자가 죽음과 그 모든 귀결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다 비우신 아들만이 아신다.”[9]
...하느님의 아들이 지옥에 내리심으로써 신적인 구원을 인간 운명의 가장 깊은 심연에까지 가져오신다. 그분이 남김없이, 그 이상으로 하느님 상실, 하느님 부재의 자리에 서심으로써 그 자리가 이제 하느님께 이를 수 있는 열린 자리로 반전을 이룬다.
김혁태. 〈예외 없는 희망? 발타살의 ‘지옥’ 담론과 그 종말론적 귀결에 대한 고찰〉 신학전망 no.179(2012)
...예수의 지옥 체험은 따라서 온전히 죽은 이로서 죽은 이들에게 가심, 죽음의 상태 그 자체를 온전히 겪으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십자가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다. 성금요일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곧 마지막으로 영을 아버지께 내어드림으로써(요한 19,30 참조) 하느님의 구원 업적이 정점에 도달했다면, 이제 성토요일[6]에 그분은 죽은 다음의 죽음의 상태 그 자체를 남김없이 맛보셔야 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이제 인간의 가장 깊은 심연의 상태에 처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이 지옥 체험은 밀도에서 보면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지옥을 질적으로 넘어선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하나이신 분이 체험하는 하느님 단절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단순히 죄인들이 자초한 지옥의 고통을 겪으시는 것이 아니라, 이 지옥 너머 그 아래에 있는 무엇을 겪으신다.”[7] 그리고 그 너머의 무엇은 발타살에 따르면, 임의의 어떤 상실이나 단절이 아니라 그 상실과 단절의 “본질적 근거”, “죄 자체”(Sünde an sich)[8]를 말한다. 여기에 예수의 지옥에 내리심이 갖는 유일무이한 특성이 있다.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감이 최종적이고 결정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들만이, 아버지의 품에 계신 분으로서 십자가 죽음과 그 모든 귀결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다 비우신 아들만이 아신다.”[9]
...하느님의 아들이 지옥에 내리심으로써 신적인 구원을 인간 운명의 가장 깊은 심연에까지 가져오신다. 그분이 남김없이, 그 이상으로 하느님 상실, 하느님 부재의 자리에 서심으로써 그 자리가 이제 하느님께 이를 수 있는 열린 자리로 반전을 이룬다.
김혁태. 〈예외 없는 희망? 발타살의 ‘지옥’ 담론과 그 종말론적 귀결에 대한 고찰〉 신학전망 no.179(2012)
하지만 '저승'이라는 공간적 표현은 그저 공간적 표현일 뿐, 지복직관의 상태인지 '하느님을 볼 수 없는' 비참한 상태인지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제3의 '공간'이라는 신화적인 언어만이 남을 뿐이며, 그리스도가 편안히 사후세계를 관광하고 온 것 같은 이상한 어감만 남는다.
죄 없는 예수가 지옥의 상태를 맛보았다는 그 '부조리'에 그리스도인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건 정당하다. 그러나 예수가 당한 바로 그 '부조리'가 파스카 희생의 핵심이며, 사실 십자가 부터가 바로 그 '부조리'의 자리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를 '지옥의 고통이 없는 내세 관광'으로 희석해버리는 것은, 아무리 그 의도의 정당함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어리석음이다. 십자가와 지옥이라는 부조리, 바로 그 부조리를 겪고서 영광 속에 들어가는 것이 예수의 메시아성이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루카 복음서 24,25-26
루카 복음서 24,25-26
4. 유아 림보
라틴어 | Limbus Infantum |
구약시대 의인들의 구원 문제와 별개로, 이 유아 림보 개념은 성사론과 원죄론에 따른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가설이다. 곧 다음과 같은 생각에서 제기된 것이다.
- 모든 죄를 다 용서받고 깨끗한 상태로 죽은 영혼은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린다.
- 물론 그렇지 못한 영혼은 지옥에 들어가 영원한 고통을 받는다.
- 그런데... 원죄 말고는 죄를 지을 기회도 없이 태어나자마자 죽은 유아들은 어떻게 될까?[11]
이에 따라, 원죄 이외의 죄를 지은 적은 없는, 유아들의 영혼이 머무르는 장소로서 유아 림보 가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죄를 지은 적이 없으므로 영구한 지옥에 갈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원죄를 포함한 죄로 천국에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가설이 처음에 나올 때부터 순조롭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교부(敎父)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처럼 세례를 받지 못한 유아들이 '감각적인 고통'을 받고 있으리라는 의견을 표명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은 이렇게 고성소(유아 림보)에 들어간 유아들에 대해 "하느님을 뵙지 못한다는 것만을 제외한다면 그들은 자연적으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이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스콜라 신학자들에 의해서 폭넓게 받아들여지면서 체계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12]
그러나 이러한 림보 개념은 교황청에서 정식으로 인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공식적으로 교황청에서는 위에 해당하는 림보 개념을 9품천사 개념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신학적 가설'로 취급하였으며, 따라서 믿어도 좋고 믿지 않아도 좋은 가설로 여기고 있었다. 왜냐하면 실은 이러한 림보 개념을 두고 현재까지도 신학자들 사이에 격론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림보를 반대하거나 지지하는 신학자들 모두 합당한 신학적 근거를 가지고 주장을 펼쳤기 때문에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간접적으로 이러한 가설을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한 적은 여러 번 있는데, 이는 많은 경우 칼뱅주의의 구원 예정설(預定說)을 배격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뿐, 전폭적으로 림보 개념을 지지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이때까지도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유아들에 대한 구원 가능성은 전혀 검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림보 가설을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상관 없이, 논쟁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되지 않았다.
4.1. 가톨릭 교회의 입장
공인된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중세시대 이후 폭넓게 받아들여지던 이러한 림보 개념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회의적인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이유는 위에서 말한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일부 예정론자들의 논리를 한큐에 싸잡아 뒤집어버리는 것으로, 쉽게 말해 "세례 못 받은 유아들이 왜 구원을 못 받는데?"[13] 혹은 니가 뭔데 유아들의 운명을 결정하냐[14]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즉 예정론자들이 말하는 '구원 예정설'은 애초에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천주교 교리상 용납될 수 없는 부분이었으며,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가장 기본적인 사항, 즉 "하느님께서는 모든 영혼의 구원을 바라신다"는 기본 중의 기본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이유이다. 이는 점차 교회가 말하는 "세례"의 개념과 정의가 점차 보편적인 의미로 확대되면서 일어난 많은 개혁적인 현상 중 하나로 볼 수 있겠다.
물론 림보 개념의 거부가 가톨릭 신자에게 강제된다는 건 당연히 극단적인 결론이다. 위에서도 한 번 말했듯이 여전히 림보 개념을 둘러싸고 신학자들간의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어느 한쪽이 믿을 교리(dogma)로 확정되어 장엄선포된 상태가 아닌 신학적 가설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각 신학자들의 의견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성 아우구스티노파(派): 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학자들로, 즉 림보 따윈 없으며 세례 받지 못한 유아들은 구원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그 수가 소수에 불과한 상태이다.
- 림보 지지파: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학자들로, 세례를 받지 못한 유아들은 구원은 받을 수 없지만 림보에서 하느님을 뵙는 행복을 제외한 영원한 행복을 누리며 산다고 주장한다. 이 의견이 상대적으로 다수를 이루었다.
- 구원 긍정파(?): 림보와 무관하게 세례를 받지 못한 유아들의 구원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주장한다. 근대 이후,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사실상 대세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또한 이 의견을 지지했다.
이를 두고 수많은 가설들이 오가고는 있으나, 아직 어떤 것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림보 개념은 오히려 가톨릭 신학자들간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상태이다.
이 때문에 현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애초에 애매모호한 상태에 빠뜨리지 말고 가능한 한 태어나자마자 유아 세례를 줘라.
2007년, 국제신학위원회는 "교회가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구원에 대하여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유아의 운명이 일반적으로 어떠한지는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았고, 교회는 계시된 것과 관련해서만 가르치고 판단한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우리가 명확히 알고 있는 사실에 근거하여 세례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의 구원을 희망하며, ... 교회는 그들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신 예수님의 어린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우리는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는 문서를 발표하였고,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를 승인하여 유아들의 림보 개념에 대해 기존 견해보다 더 넓은 천국으로의 가능성을 인정하였다.5. 기타
이슬람에도 바르자크(برزخ)와 알 아라프(الأعراف)라는 기독교의 림보 내지는 연옥 비슷한 교리가 있다.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는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과 타 종교권·문화권의 현인들이 머무는 장소로 묘사된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현인들은 물론 살라흐 앗 딘도 머물고 있다. 어떤 형벌도 받지 않으나 천국에 계신 하느님을 볼 수 없어 괴로워하고 있다.
[1]
《가톨릭 교리서 요약편》 제209항[2]
《가톨릭 교리서 요약편》 제212항[3]
《가톨릭 교리서 요약편》 제210항[4] 천주교요리문답[5] Hans Urs von Balthasar, Theodramatik, Ⅳ, Einsiedeln: Johannes, 1983, 252[6] (발췌자 주석) 이 논문의 문맥에서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과 '죽어있는 상태'를 각각 가리키는 표현이다. 곧 여기서 말하는 성토요일은 금요일 23시 59분 후의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죽어있는 예수를 의미한다.[7] (논문 내 주석)Hans Urs von Balthasar, Theodramatik, Ⅳ, Einsiedeln: Johannes, 1983, 252[8] (논문 내 주석)Hans Urs von Balthasar, “Von Balthasar antwortet Boros”, Orientierung 34, 1974, 38.[9] (논문 내 주석)Hans Urs von Balthasar, “Die Schlüssel des Todes und der Hölle”, SKZ 14, 1969, 198.[10] 왜 이 표현을 쓰는지는 위 문단 참고.[11] 현대에서야 어지간히 낙후된 나라가 아니면 영아 사망률 0~1% 수준이지만, 전근대의 영아 사망률은 엄청났다. 이미 근대에 들어선 19세기 미국에서도 윈슬로 부인의 진정 시럽 같은 사례도 있었는데("영아사망률이 높아 부모들은 아이가 사망하더라도 질병이나 영양실조로만 보았기 때문에 진정 시럽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고"), 14세기 영국의 경우에는 무려 22%에 달했다. 다섯 명 중 한 명은 영아기에 죽는다는 얘기니 영아기 뿐 아니라 유아기에 죽는 아이들까지 합치면 그 수가 엄청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많은 수의 영유아들이 원죄 빼곤 아무 죄도 없는데 영구한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면 반발이 클 수밖에 없다.[12] 스콜라 신학자들은 "고성소에서의 영혼들은 실향(失鄕)의 슬픔을 제외하면 자연 상태에서는 최고로 행복한 경지에 머무른다"고 주장했으며, 이후 이러한 주장은 일반 대중으로 퍼져나가면서 폭넓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13] 세례를 받지 못하고 사망한 유아들은 세례를 베풀지 못한 어른들의 책임이지 유아들의 책임이 아니다. 그런데 왜 유아들이 림보에 떨어짐으로써 책임을 져야 하는가?[14] 평범한 사람으로 예시를 들자면 "난 신부님 말씀 잘 들으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며 살았는데 내 아이가 유산했다. 그런데 내 아이가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라는 반발심리가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
문]
“천국”은 무엇을 뜻하는가? [
답]
천국은 결정적으로 가장 행복한 상태를 가리킨다.《가톨릭 교리서 요약편》 제209항[2]
[
문]
지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답]
지옥은 자유로운 선택으로 대죄(죽을죄) 중에 죽은 이들의 영원한 멸망의 상태를 말한다.《가톨릭 교리서 요약편》 제212항[3]
[
문]
연옥은 무엇인가? [
답]
연옥은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죽어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기는 하였지만, 하늘의 기쁨으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정화를 거쳐야 하는 상태이다.《가톨릭 교리서 요약편》 제210항[4] 천주교요리문답[5] Hans Urs von Balthasar, Theodramatik, Ⅳ, Einsiedeln: Johannes, 1983, 252[6] (발췌자 주석) 이 논문의 문맥에서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과 '죽어있는 상태'를 각각 가리키는 표현이다. 곧 여기서 말하는 성토요일은 금요일 23시 59분 후의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죽어있는 예수를 의미한다.[7] (논문 내 주석)Hans Urs von Balthasar, Theodramatik, Ⅳ, Einsiedeln: Johannes, 1983, 252[8] (논문 내 주석)Hans Urs von Balthasar, “Von Balthasar antwortet Boros”, Orientierung 34, 1974, 38.[9] (논문 내 주석)Hans Urs von Balthasar, “Die Schlüssel des Todes und der Hölle”, SKZ 14, 1969, 198.[10] 왜 이 표현을 쓰는지는 위 문단 참고.[11] 현대에서야 어지간히 낙후된 나라가 아니면 영아 사망률 0~1% 수준이지만, 전근대의 영아 사망률은 엄청났다. 이미 근대에 들어선 19세기 미국에서도 윈슬로 부인의 진정 시럽 같은 사례도 있었는데("영아사망률이 높아 부모들은 아이가 사망하더라도 질병이나 영양실조로만 보았기 때문에 진정 시럽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고"), 14세기 영국의 경우에는 무려 22%에 달했다. 다섯 명 중 한 명은 영아기에 죽는다는 얘기니 영아기 뿐 아니라 유아기에 죽는 아이들까지 합치면 그 수가 엄청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많은 수의 영유아들이 원죄 빼곤 아무 죄도 없는데 영구한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면 반발이 클 수밖에 없다.[12] 스콜라 신학자들은 "고성소에서의 영혼들은 실향(失鄕)의 슬픔을 제외하면 자연 상태에서는 최고로 행복한 경지에 머무른다"고 주장했으며, 이후 이러한 주장은 일반 대중으로 퍼져나가면서 폭넓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13] 세례를 받지 못하고 사망한 유아들은 세례를 베풀지 못한 어른들의 책임이지 유아들의 책임이 아니다. 그런데 왜 유아들이 림보에 떨어짐으로써 책임을 져야 하는가?[14] 평범한 사람으로 예시를 들자면 "난 신부님 말씀 잘 들으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며 살았는데 내 아이가 유산했다. 그런데 내 아이가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라는 반발심리가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