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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14:51:20

경부선 경산역~고모역 열차 추돌사고

대구 열차 추돌사고에서 넘어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파일:news4u_125557_1[3].jpg

대구 경부선 무궁화호 추돌사고 혹은 경산역-고모역 열차 추돌사고라고도 한다.

1. 개요2. 발생 과정3. 사고 원인
3.1. 2661호 화물열차의 정차 이유3.2. 고모역은 왜 303호 무궁화호를 출발시켰는가?3.3. 303호 무궁화호의 전방주시 태만
4. 사고 이후5. 판결6. 기타

1. 개요


2003년 8월 8일 대구광역시 수성구 사월동 경부선 철로(서울 기점 337km) 하행선에서 김천발 부산행 303호 무궁화호 열차[1]가 정차 중인 2661호 화물열차를 추돌하였다. 이 사고로 6세 남자 어린이와 34세 고등학교 영어 여교사가 사망하고 123명이 부상당하였다.(경상 40명)

2. 발생 과정

2003년 8월 8일, 경부선 경산역-고모역 구간은 경부고속철도 공사로 인해 신호기 교체 공사가 진행 중인 탓에 한시적으로(새벽 6시~오후 2시) 무전을 통한 수동으로 열차가 통행되고 있었다. 오전 7시, 고모역을 출발한 화물열차가 사고지점에서 신호기가 적색인 것을 확인하고 정차하였다.

이 때 경산역에서는 "하행선은 통신식으로 운행한다. 신호를 무시하라"고 무전했지만, 화물열차 기관사는 "정상운행인데 어떻게 무시하는가?"라고 답변하며 둘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한편 그 시각, 고모역에서는 조금 전 구내에 진입해 정차하고 있는 무궁화호에게 "천천히 출발하세요"라고 지시했다. 무궁화호 기관사는 이에 따라 발차 후 60km/h의 속도로 서행하던 중 전방에서 정차 중인 화물열차를 발견, 급히 제동을 걸었지만 제동거리 부족으로 추돌하고 말았다.[2]

파일:external/www.newstown.co.kr/c_20030808_7213_10326.jpg

추돌 직후 무궁화호는 탈선하지는 않았지만 기관차 바로 뒤에 달려 있던 발전차가 바로 뒤 객차와 충돌하면서 타오름 현상을 일으켜 객실 좌석 3열까지 밀고 들어오게 된다. 이 때문에 2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그나마 60km/h로 서행했고 탈선이 일어나지 않아 피해가 적은 정도였다. 하지만...

3. 사고 원인

사고 원인의 핵심은
1. 왜 화물열차가 정차해 있었는가?
2. 왜 고모역에서 무궁화호를 출발시켰는가?
이다.

부수적으로 무궁화호 기관사가 선로 구조상 100m 넘게 시야가 확보됨에도 불구하고 40m 남겨두고서야 정차를 시도했던 것도 원인 조사가 들어갔다.

3.1. 2661호 화물열차의 정차 이유

2661호 화물열차는 고모역을 출발할 때 "하행선은 정상운행합니다. 통신식으로 운행하세요"라는 무전을 들었다. 즉 "신호를 무시하고 정상으로 운행하라"는 이야기임에도 화물열차는 도중에 적색신호를 보고 정차했다.

이에 경산역에서 다시 "통신식이니 신호를 무시하고 바로 들어오세요"라고 무전을 하니 뜻밖에도 "정상운행인데 어떻게 신호를 무시하냐?"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철도대학 교수에 의하면 당시 무전으로는 목적어 없이 '정상으로 운행'하라고 했다고 한다. 이를 기관사는 대용폐색방식이 아니라 '상용 폐색 방식을 사용하며' 정상으로 운행하라는 것으로 오인했고 폐색신호기 앞에 정차한 것.

일각에서는 기관사의 대용폐색방식 이해 부족이라고 하지만 대용폐색은 야간에 작업 등이 있을 때 상당히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고 기관사 교육 및 양성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이 신호 및 폐색 부분인데 애초에 이 부분에 대한 개념이 없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3.2. 고모역은 왜 303호 무궁화호를 출발시켰는가?

경산역-고모역 구간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경부고속철도 공사로 인하여 신호기 교체 공사 구간이었다. 신호기를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당구간을 운행은 하되 구간전체를 폐색구간으로 보고 반드시 1대씩 통행하도록 무전을 통해 폐색구간 확인을 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상대편 역에서 열차가 들어와야 이쪽에서도 출발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고모역에서는 경산역에 화물열차가 도착했음을 확인하지도 않고 무궁화호를 출발시켰다. 물론 고모역에서는 아무런 근거 없이 출발시킨 것은 아니고 부산지방철도청 운전사령으로부터 출발무전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산역에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3. 303호 무궁화호의 전방주시 태만

무궁화호 기관사도 전방주시를 게을리 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해당 구간은 선형상 150m 시야가 확보되어 있었고 당시 안개가 끼어 있었지만 1km의 시야 확보가 가능한 옅은 안개로 조사되었다.

즉, 앞만 똑바로 보고 갔었더라면 화물열차를 보고 세우거나 추돌하더라도 훨씬 약한 충격을 받을 수 있었다. 적어도 2명의 생명은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4. 사고 이후

사고 직후 119구조대가 투입되었지만 찌그러진 객차에서 승객을 구조하기엔 장비가 부족했다. 또한 현장 도로사정이 열악해 환자수송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철도청은 사고 이후 동대구지역관리역장, 운전사령, 기관사 2명을 직위해제했다. 또한 경찰은 사고원인 조사 후 과실혐의가 있는 고모역장과 부산지방철도청 운전사령, 기관사 2명과 신호기 교체공사 중 신호기를 끄지 않아 화물열차 기관사의 혼란을 야기한 공사관계자 등을 사법처리했다.

당시 발전차의 타오름 현상에 대해 무궁화호 열차의 결함에도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타오름 현상을 방지하고자 충돌시 타오름 방지 장치와 열차간 충돌흡수장치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그런 장치가 전무한 데다가 객차에 결함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 감사를 하기도 했다.

또한 사람이 타지 않는 발전차만 상대적으로 단단하여 객차를 부수게 되는 현상을 수십년째 봐 왔음에도 그대로 두어 이번에도 발전차가 객차를 부수어 승객을 죽였다. 발전차가 객차와 기관차를 모두 덮쳐서 사태가 커진 구포 참사가 1993년에 터지고도 이에 대한 대책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철도청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음을 보여주었다. 타오름현상을 막기 위한 장치는 2000년대 후반이 돼서야 전동차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또한 사고를 당한 무궁화호는 전체가 리미트 객차로 편성된, 일명 '올 리미트' 편성으로 운행하고 있었다. 이 사고에서 타오름 현상으로 1호차(12585호)가 크게 찌그러지면서 리미트 객차의 취약한 충돌안전성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3년 8월 23일에 대구 수성경찰서는 고모역 역무원, 화물열차 기관사, 공사현장 책임감리원, 철도청 부산지방사무소 사령 등 4명의 구속 영장을 신청하고 무궁화호 기관사와 고모역장을 포함한 4명을 불구속 입건하였다.

5. 판결

2004년 1월 19일에 대구지방법원은 고모역 역무원, 화물열차 기관사, 철도청 부산지방사무소 사령에 대해 금고 2년, 공사현장 책임감리원과 무궁화호 기관사에 대해서는 금고 1년에 집행유예 2년, 고모역장에 대해서는 금고 1년 6개월을 선고하였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대중 교통사고는 사회적 파장이 큰 만큼 과실로 인해 불특정다수에게 피해를 준 것은 중대한 과실”이라며 “편법을 이용한 열차운행을 방지하고 향후 열차 안전운행 수칙을 준수하는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이같이 선고한다”고 밝혔다.

6. 기타



[1] 지금은 없어진 계통이다. 1997년 7월경 대구발 열차가 김천으로 연장되면서 생긴 계통. 당시 열차번호는 #193이었고 1999년 시간표 개정과 함께 #303으로 변경되었다. 이 날 사고 여파로 당시 실질적인 복편인 #224가 5량으로 운행하면서 혼잡도가 극에 달했다는 후문이 있다. 이 계통은 #225 열차로 낮에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저녁에 #304로 부산에서 김천으로 올라가며 다시 다음 날 아침에 #303으로 김천에서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점심 때 #224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 수색으로 입고하는 계통이었다. 봉고 기관차 견인이었으며 6량으로 구성되었다.[2] 2003년 8월 8일과 9일, SBS 8 뉴스에서 지적된 보도가 나왔다. 어찌 보면 예고된 인재였다.[3] 99541호[4] 1호차부터 순서대로 12585-12680-12591-10136-12557-1256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