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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8-25 07:06:51

경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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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682b4><colcolor=#ece5b6>
위(魏) 제5대 국왕
경민왕 | 景閔王
출생 연대 미상
사망 기원전 228년 (향년 미상)
능묘 미상
재위기간 위(魏) 태자
연대 미상 ~ 기원전 242년
위(魏) 제5대 국왕
기원전 242년 ~ 기원전 2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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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682b4><colcolor=#ece5b6> 성씨 희성 위씨(姬姓 魏氏)
휘 증(增) / 오(午)
부왕 위안희왕 위어
(魏安僖王 魏圉, ? ~ 기원전 243)
작위 태자(太子) → 위왕(魏王)
시호 경민왕(景閔王) }}}}}}}}}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중국 전국시대의 위나라 7대 국군, 5대 왕. 이름은 증(增). 다른 이름은 오(午).

2. 생애

태자 시절 진(秦)나라에 인질로 있었다. 위 안희왕 30년(기원전 247년), 신릉군이 하외에서 진군을 격파하고 몽오를 쫓아버리자, 진 장양왕이 증을 가두려고 했는데, 어떤 사람이 태자 증을 위해서 왕에게 간언했다. 그가 말하길 위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해 증을 가두게 한 것은 공손희의 음모로, 오히려 태자 증을 환대하여 위나라와 화의를 맺고, 제나라와 한나라로 하여금 위나라를 의심하도록 하라고 했다. 이에 장양왕이 태자 증을 가두지 않았다.

위 경민왕이 즉위하기 1년 전인 위 안희왕 34년(기원전 243년)에는 산조, 연읍, 허읍, 옹구, 산양 등 30여 개의 성을 빼앗겼다. 그 뒤 경민왕이 위왕으로 즉위한 이후에도 진나라에게 여러 차례 영토를 빼앗겼다.

위 경민왕 원년(기원전 242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조가(朝歌)를 빼앗았다. 그리하여 위(衛)나라가 도읍을 야왕(野王)으로 옮겼다.

위 경민왕 2년(기원전 241년), 진나라에게 급읍(汲邑)을 빼앗겼다. 이때 어떤 사람이 친정에 대비해서 경계령을 내리고, 10일 이내에 출병 준비를 끝내지 못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선포를 하라고 했다. 그 사람이 초나라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는데, 춘신군이 10일 이내에 수만명의 군사를 위나라에 보내겠다고 하자 진나라에서 이 일을 알고, 초나라와 위나라가 연합할 것을 우려해 사자를 보내어 위나라를 공격할 생각이 없으니 굳이 초나라의 군사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전했다.

위 경민왕 3년(기원전 240년),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자, 어떤 사람이 진나라 내부가 노애(嫪毐)의 파벌과 여불위(呂不韋)의 파벌로 나눠져 있으니 땅을 진나라에 바쳐 이를 노애의 공으로 삼아, 그의 위치를 굳건히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조치는 없었는데 아무래도 왕이 노애가 오래 못간다고 판단하여 그러지 않은 듯하니, 판을 읽는 능력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 경민왕 5년(기원전 238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원읍(垣邑), 포양(蒲陽), 연읍(衍邑) 땅을 차지했다.

위 경민왕 12년(기원전 231년), 경민왕이 진나라에 땅을 바치니, 진나라는 거기에 여읍을 두었다.

위 경민왕 15년(기원전 228년), 경민왕이 사망하고, 아들 위가(魏假)가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위왕 가다.[1]

3. 대중매체에서


[1] 죽은 해를 보면 알겠지만 이미 전국칠웅이 진나라에 의해 붕괴되는 시기였다. 한나라의 멸망도 보고 죽었고 그가 죽은 해에 조나라의 멸망과 조유목왕의 죽음도 같이 일어났다. 즉 주난왕과는 반대로 일찍 죽어서 운이 좋았던 사례. 실제로 위왕 가는 전국칠웅 중 멸망한 6국의 마지막 왕 가운데 가장 재위기간이 짧다. 초유왕과 초애왕도 한나라의 멸망을 보고 죽었으나, 이 두 사람은 단명한 케이스였다.(특히 초애왕은 살해당했다.) 위경민왕의 경우는 즉위 당시 이미 나이를 꽤 먹었기 때문에 상황이 좀 다르다.[2] 조나라의 재상이던 이목마저 합종군 실패의 책임을 지고 한동안 전선에서 손에 흙을 묻히는 신세로 전락했으며 도양왕이라면 속으로 이를 가는 이목마저도 참수당해도 할 말 없다고 인정했던 점을 감안하면, 과거에는 위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현재는 객장에 불과한 염파는 경민왕이 참수를 명해도 할 말 없는 신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파를 추방만 하면서도 사과까지 하는 경민왕은 관대한 것이 맞다. 사실,경민왕도 염파가 오히려 위나라를 위하여 잘해줬음을 알기에 용서하고 그대로 장군을 맡기고 싶었다. 그러나, 패배는 패배라고 조정에서 워낙에 염파를 참수하자는 주장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추방한 것. 경민왕의 태도나 얼굴만 봐도 마지못해 추방하면서 매우 아쉬워한 걸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