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100be><colcolor=#fff> 게일 할보르센 Gail Halvorsen | |||
본명 | 게일 시모어 할보르센 Gail Seymour Harvorsen | ||
별명 | 베를린 사탕 폭격기 날개 흔들이 삼촌 | ||
출생 | 1920년 10월 10일 | ||
유타 솔트레이크 시티 | |||
사망 | 2022년 2월 16일 (향년 101세) | ||
유타 프로보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100be><colcolor=#fff> 종교 |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 |
부모 | 아버지 루엘라 스펜서 할보르센 어머니 바질 K. | ||
배우자 | 알타 졸리 (1999년 사별) 로레인 페이스 (2004~) | ||
학력 | 베어 리버 고등학교 유타 주립 대학교 플로리다 대학교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항공단 | ||
1942년 ~ 1947년 | |||
미합중국 공군 | |||
1947년 ~ 1974년 | |||
최종 계급 | 대령 (미합중국 공군) |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냉전 | ||
주요 서훈 | 훈공장 공로 훈장 의회 명예 황금 훈장 독일연방공화국 공로장 | ||
링크 | [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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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일 할보르센은 베를린 봉쇄 당시 베를린 공군기지에 주둔하고 있던 파일럿이었다. 그는 아이들이 그에게 작은 껌 하나를 받아가서 30여 조각으로 나누어 수십 명이 함께 나눠먹는 것도 모자라 포장지를 잘게 찢어 냄새까지 맡는 것을 보고 식량 부족을 실감하며 충격을 받아, 이후 그 아이들에게 "날개를 위아래로 흔드는 비행기가 있을 텐데, 그 비행기는 내가 탄 비행기니까 그쪽으로 달려와라. 내가 선물을 더 주겠다"고 밝히고 사비를 털어 초콜릿과 사탕을 잔뜩 구매해 손수건과 낙하산을 개인적으로 만들어서 사탕 낙하산을 제작해 공수작전 중 떨어뜨린 것으로 유명한 미합중국의 군인이다.2. 생애
게일 할보르센은 1920년 10월 10일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 그는 아이다호 리그비의 작은 농장과 유타 갈랜드에서 길러졌다. 1939년에는 베어 리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유타 주립 대학교에 진학했다. 1941년 9월 개인 조종사 면허를 취득하고 민간 항공 순찰대에 조종사로 입대했다. 그는 1942년 5월 미국 육군 항공대에 입대했으며, 오클라호마주 마이애미에 도착하여 제3영국 비행 훈련 학교의 19과정에 입교했다. 조종사 훈련을 마친 후 그는 육군 항공대에 복귀하여 남대서양 전구의 해외 수송 작전에서 비행 임무를 맡았다. 1948년 7월 10일 베를린 봉쇄 당시 서베를린 시민들을 위한 물자 지원 작전[2]의 조종사가 되기 위해 독일로 명령을 받았다. 당시 C-47기와 C-54s기를 주력으로 몰았다. 당시 베를린의 아이들이 자신에게 받은 작은 껌 하나를 30여 조각으로 나누어 먹는 현장을 목격하고 이 아이들을 도와줄 방법을 몰색하다가 리틀 비틀스 작전이라는 1인 작전을 계획 후 개시한다.2.1. 리틀 비틀스 작전
베를린 공수작전에서 그의 역할은 물자를 실어 나르는 데 사용된 C-54 화물기의 조종이었다. 그는 사진과 영화 촬영에 관심이 있었고, 쉬는 날에는 종종 베를린을 관광하고 휴대용 카메라로 영상을 찍었다. 공수 작전의 주요 착륙지인 템펠호프 공항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을 찍고 있었을 때, 조망 울타리 뒤에 줄을 서 있는 30명 정도의 빈털털이 아이들이 보였다. 그는 이 장면을 이렇게 회상한다.템펠호프의 광대한 지역을 보호하는 철조망 울타리에서 30명 정도의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제가 말을 걸었을 때 그들은 흥분하며 "날씨가 너무 나빠서 착륙할 수 없어도 저희들은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적은 음식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지만, 저희가 자유를 잃으면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감동하여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아이들에게 줄 껌 두 개를 꺼냈다. 아이들은 그것을 작은 조각으로 쪼개서 나눠 먹었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 아이들은 포장지를 냄새 맡았다. 많은 아이들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서 그는 아이들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어서 다음 날 만큼은 아이들 모두에게 줄 껌이 충분할 거라고 다짐했다. 한 아이가 "조종사님의 비행기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라고 물어봤을 때, 비행기 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보이는 방법을 떠올려냈다. 날개 흔들이 삼촌 이라는 별명은 이 행동에서 나온 별명이다. 그날 밤부터 몇 주 간 그와 부조종사와 엔지니어는 사탕을 사 모았다. 많은 양의 사탕이 떨어져 아이들이 다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한 그는 손수건으로 낙하산 3개를 만들어 사탕 꾸러미에 묶었다. 매일 아침 그들은 보급품과 함께 손수건 낙하산에 매단 사탕 상자도 3개씩 투하했다. 그들은 한 달 가까이 일주일에 한 번씩 사적인 사탕 보급을 행했다.
공수 사령관인 윌리엄 H. 터너 중장에게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공수 작전의 이름인 비틀스 작전를 흉내내어 리틀 비틀스 작전 으로 확장하라고 명했다. 리틀 비틀스 작전은 1948년 9월 22일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베를린의 어린이들에게 초콜릿과 껌을 제공하려는 이 노력에 대한 지원은 동료 파일럿들 사이에서 빠르게 증가했고, 결국 비행대 전체로 퍼졌다. 리틀 비틀스 작전에 대한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미국 전역의 어린이와 과자 제조업체가 사탕을 기부하기 시작했다. 1948년 11월이 되자 그들만의 힘으로는 더 이상 미국 전역에서 보내지는 사탕과 손수건의 양을 따라갈 수 없었다. 매사추세츠 치코피의 대학생 메리 C. 코너는 국가적 프로젝트가 되어버린 리틀 비틀스 작전을 맡겠다고 제안했고, 전국 제과업 협회와 협력하여 사탕을 준비하고 손수건을 묶었다. 지지가 급증하면서 조종사들은 이틀에 한 번씩 사탕을 떨어뜨렸다. 예술 작품과 편지가 첨가된 꾸러미 역시 증가했다. 미국의 사탕 폭격기는 건포도 폭격기로 알려졌고, 할보르센은 베를린의 어린이들에게 "날개 흔들이 삼촌"[3] 이라는 원래 별명을 비롯하여 "초콜릿 삼촌"[4], 등등 다양한 별명으로 불렸다.
리틀 비틀즈 작전은 1949년 5월 13일 공식적으로 끝났다. 할보르센은 1949년 1월 작전의 지휘권을 로렌스 캐스키 대위에게 넘기고 귀국했다. 귀국 후 할보르센은 리틀 비틀즈 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여러 사람을 만나서 감사를 표했다. 그는 또한 전국에서 18톤이 넘는 사탕과 껌을 준비하고 독일로 배송하는 일을 맡았던 매사추세츠 치코피의 학생들과 리틀 비틀즈 위원회를 만났다. 리틀 비틀즈 작전은 총합 25만 개가 넘는 낙하산에서 23톤이 넘는 사탕을 떨어뜨린 것으로 추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