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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04 22:45:24

게르트루트 숄츠클링크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게르투르트 숄츠클링크
Gertrud Scholtz-Klink
파일:Bundesarchiv_Bild_146II-104,_Gertrud_Scholtz-Klink.jpg
본명 게르투르트 엠마 숄츠클링크
Gertrud Emma Scholtz-Klink
출생 1902년 2월 9일
독일 제국 바덴 대공국 아델샤임
사망 1999년 3월 24일 (향년 97세)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튀빙엔베벤하우젠
국적
[[나치 독일|]][[틀:국기|]][[틀:국기|]]->
[[독일|]][[틀:국기|]][[틀:국기|]]
가족 아우구스트 하이스마이어 (배우자)
에른스트 클린크 (자녀)
학력 초등학교 (졸업)
중학교 (졸업)
종교 루터교
직업 정치인
소속

국가사회주의여성동맹

1. 개요2. 생애
2.1. 생애 초기2.2. 나치당 활동 및 결혼 생활2.3. 전후 활동 및 체포
3. 활동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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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Only she can be strong who knows sorrow and deprivation”
"오직 슬픔과 결핍을 아는 여성만이 강해질 수 있다."
독일의 정치인. 국가사회주의여성동맹의 지도자였다.

2. 생애

2.1. 생애 초기

숄츠-클링크는 1902년 2월 독일 남부 바덴 지역에서 측량사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1910년에 사망했고 중등 교육을 마친 후, 그녀는 견습 과정을 수료하고 기자로 일했다. 1920년, 그녀는 나치당의 오펜부르크 지역 지도자였던 오이겐 클링크와 결혼했으나, 그는 1930년 선거 행사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 결혼에서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1929년, 27세의 나이에 정식으로 나치당에 가입한 그녀는 바덴 지역 여성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1931년, 의사 귄터 숄츠와 재혼하였으나 1937년 이혼하였다. 이후 1940년 12월, 나치당 업무중 알게된 SS 상급집단지도자였던 아우구스트 하이스마이어와 결혼하였다.

2.2. 나치당 활동 및 결혼 생활

1933년,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 주요 정책 중 하나는 여성 단체들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나치는 “모든 여성 단체들은 나치 지도부를 받아들이거나 해산해야 한다”라고 선언하였으며, 그 결과 1933년 대부분의 세속 여성 단체들이 자진 해산하거나 강제로 해체되었다. 이후 이들은 230만 명의 여성 회원을 보유한 국가사회주의여성동맹 산하로 통합되었다.

나치 여성 단체들은 젊은 여성과 소녀들을 대상으로 가사 관리, 모성 건강, 육아, 위생, 요리, 가정 경제학 등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역사학자 앤 T. 앨런에 따르면,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여성 시민의 주요 의무는 건강한 아이를 낳아 국가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숄츠-클링크는 1935년 연설 “독일인이 된다는 것은 강하다는 것이다”에서 남성과 여성의 분리된 역할을 강조했으며, 이 연설은 1936년 여성 잡지 프라우엔-바르테에 게재되었다.

이 연설에서 숄츠-클링크는 독일 여성들에게 국가의 어머니가 될 것을 촉구했다. 즉, 자신의 자녀뿐만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아리안 독일 여성들을 하나로 단결시키고, 어머니로서의 봉사를 통해 더 강한 국가를 형성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그녀는 여성이 가진 가장 깊은 소명은 모성이라고 강조하며, 1918년에서 1933년 사이 모성은 부담과 희생으로 여겨졌다고 주장했다. 당시 어머니들은 모성이 자신의 민족이 생존할 권리에 대한 기여라는 이상에 따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나치 정권은 출산율 감소가 군사적 준비태세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로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녀는 연설 내내 여성의 역할이 국가 생존을 위한 것이라는 나치 이념을 지지했다. 이러한 그녀의 철저한 히틀러 이념 동조로 인해, 영국에서는 그녀를 완벽한 나치 여성이라고 불렀다.

2.3. 전후 활동 및 체포

비록 숄츠-클링크가 라이히스프라우엔휘어린으로서 제3제국의 최고 여성 지도자로 활동했지만, 그녀는 전통적인 남성 중심의 정치 영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독일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나치당와 국가사회주의여성동맹은 선전, 신문, 연설, 그리고 여성 전용 잡지 NS 프라우엔바르테 및 무터 운트 킨트(Mutter und Kind, 어머니와 아이) 등을 통해 나치 이념을 독일 여성들의 일상에 침투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녀는 소련의 전쟁포로 수용소에서 탈출했다. 뷔르템베르크의 폴린 공주의 도움을 받아 독일의 한 마을에 숨어 지냈다. 1948년, 그녀는 결국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프랑스 군사재판에서 문서 위조 혐의로 기소되었다. 1953년, 그녀는 석방된 후 베벤하우젠에 정착하였다. 전후에도 그녀는 나치 이념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인터뷰에서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태도를 보였다. 1978년, 그녀는 자서전 《제3제국의 여성》(Die Frau im Dritten Reich, "The Woman in the Third Reich")을 출간하며 나치 시절을 미화하려 했다. 1999년 97세의 나이로 생을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3. 활동

4. 여담

잉글랜드에 방문한 숄츠클링크
"이상적 나치 여성" - 브리티시 무비톤 뉴스, 1936년 7월 20일